5.18폭동반란의 원흉 김대중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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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3-01-20 23:02 조회3,0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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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반란의 元兇은 김대중과 북한
1. 김대중이 불러온 5.18광주의 비극
김대중 X-파일 제1탄 “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을 남조선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라는 책에서 언론인 손충무는 5.18광주의 비극을 당시의 정세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여 결국 김대중이 불러온 비극으로 평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요약한 1980년 초의 긴박했던 정치역정과 김대중이 초래했던 5.18광주 비극의 원인과 결과를 그의 저서 ‘김대중 X-파일 제1탄’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대중 X-파일 제1탄 238쪽-248쪽)
1)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이 김영삼 때문에 실패할 것을 깨닫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2) 5.18광주의 비극을 잉태시킨 ‘김대중 신민당과의 결별’ 및 ‘국민연합’ 김대중에 의해 점령
3) 대통령 집권 욕에 불탄 나머지 객관적인 정세판단이 환상, 과신, 착각에 의해 완전히 흐려져 김대중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결국 비극의 광주사태를 불러 오게 된다
4) 국민연합을 사조직화 하여, 제1조직은 반체제운동 복학생으로 구성된 ‘민주연합청년동지회’ 김대중의 전위조직 결성하고 학생운동 전담시킨다
5) 제2조직은 ‘민주헌정동지회’로 일반인을 상대로 김대중의 외곽전위조직을 결성한다
6) 제3조직은 ‘한국정치문화연구소’로 20-40대의 정치지망생으로 구성한 김대중의 외부사조직 결성
7) 대학가에서는 학원민주화를 둘러싸고 전국 85개 대학 중 40개 대학에서 학내시위, 단식투쟁, 철야농성, 총장실점거 등 실력행사가 빈발한다
8)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한다고 발표한다.
9) 4월21일 사북탄광 노조폭동사태가 발생한다
10) 5월1일 서울 대전에서 최초 학생가두시위 발생, 5월3일 서울대총학생회에서 15일 대규모 가두시위를 예고하고, 김대중은 학생운동을 정당한 저항이라고 발표한다
11) 손충무는 전두환을 면접하고 당시 워싱턴의 우려와 북한의 움직임을 설명하다
12) 전두환이 손충무에게 김대중에 대한 불만 토로하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김대중파들입니다. 나는 김대중을 유능하고 똑똑하며 언젠가는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손 국장(손충무)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한 김대중의 행동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측(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김영삼과 헤어지고 대학복학생들과 종교인들을 앞세워 국민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나(전두환)의 예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믿을 수 없는 인간입니다. 손 국장도 조심하세요. (중략)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김대중에게 나쁜 선입관을 갖고 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에 대해 나쁜 이야기만 하고 있어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람(김대중)은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으니 조금만 참고 때를 기다리면 될텐데… 너무 성급한 것 같습니다”
13) 전두환이 손충무를 통해 김대중에게 2년 정도의 미국외유를 권하지만 김대중은 거절한다. 김대중이 철저하게 도착되어 있다고 하며 국민의 외침이 모두 자신을 향해 쏟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4) 5월12일에는 더욱 과열양상을 띄는 학생시위를 기화로 제주도를 포함 전국비상계엄학대 공포
15) 같은 날 김대중의 국민연합이 ‘민주화 촉진국민연합대회선언문’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비상계엄령 즉시 해제, 신현확 총리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즉시 퇴진, 정치범의 전원석방과 복권, 언론자유보장,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정부개헌심의위원회의 즉시 해체에 대해 정부의 명확한 대답을 국민 앞에 밝힐 것이며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5월19일 정오를 기하여 행동강령에 기초하여 우리 국민은 투쟁에 나선다.
16) 5월18일 0시를 기해 김대중 등 반 체제인사들이 ‘내란선동 및 음모혐의’로 체포된다.
17) 광주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된 그 날 바로 광주사건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김대중’조직의 계획적 행동이며, 전국계엄령에 대결하는 궐기였다고 계엄사가 발표한다.
18)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학생데모는 20일에 이르러 군중을 끌여들인 폭동상태로 에스컬레이트하고, 그 속에서 과격분자들의 파괴활동이 표면화 되었다. 전남대 어느 학생이 “20일부터 데모양상이 변하고 우리들이 생각 한 것과 달라졌다”면서 데모에서 폭동으로 변했음을 말한다. 또 조선대의 한 여학생은 “학생이 아닌 사람이 끼어들어 선동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는 상황도 20일부터의 폭동화를 보여 주는 것이다. 광주는 20일 이후 불과 연기에 휩싸인 ‘무정부상태’로 돌변했다.
이상과 같은 언론인 손충무의 기록에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5.18단체와 좌파들이 떠들어 대는 ‘광주학살의 원흉 전두환’은 순전히 김대중과 그 후예들 혹은 북한 김일성이 침투시킨 특수군부대의 선전선동을 위한 유언비어인 것이다. 전두환과 신 군부는 처음부터 권력을 노리고 12.12와 5.18을 일으킨 것이 아님을 전두환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김대중)이 조금만 때를 기다리면 될텐데…” 최규하 대통령 과도정부는 분명하게 정치자유화 과정을 선포하였고 당시에는 점차적인 정치자유화를 실현하고 있었던 시기였는데도 김대중과 민주화 광신도들의 변명은 자신들의 성급하고 부당했던 권력찬탈 행위로 인한 5.18광주폭동 사태를 모두 전두환과 신 군부에 떠 넘기고 말았음을 김대중 X-파일은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김대중이 불러온 5.18광주의 비극’은 실로 대한민국 건국 후 중반의 역사를 암흑으로 변질시켰으며, 그 비극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한 미래까지도 후손들에게 거짓과 왜곡 날조된 역사를 진실인 것처럼 가르칠 것이다. 2007년의 ‘화려한 휴가’ 그리고 작금의 ‘’26년’이라는 영화로 인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순박한 국민들은 김대중과 반체제인사들이 민주화의 가면을 둘러 쓰고 권력을 획득하려고 일으켰던 내란음모범죄행위였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범죄행위를 막으려 했던 전두환과 신 군부에게 원한을 품도록 끊임없이 세뇌하고 있다.
2. 5.18폭동반란에서의 북한의 대남전투
1980년이 바로 대한민국 좌익역사에 엄청난 획을 긋는 해였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33여 년 전이다. 왜 5.18을 좌익의 역사라고 하는지를 나는 이 글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예로 들어 입증해 보고자 한다. 좌익의 역사라는 것이 입증되면 이는 곧 북한의 역사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좌익 혹은 좌파는 세계 어느 나라의 그것과도 비교 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대한민국의 主敵인 북한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이제 탈북군인 단체인 자유북한군인협회가 2006년에 발간했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증언기록)으로부터 발췌한 내용들을 여기에 옮겨 보겠다.
1) 5.18을 전후한 김일성의 지령과 북한군의 대남침투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5.18 전에 김일성이 대남공작요원들에게 직접 내린 지령이었다. 또한 당시 북한군이었던 탈북자 증언은 이렇다.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증언자는 말한다, 광주봉기 침투자는 조장이었던 4군단 70정찰대대 상좌 황종인, 부조장이었던 4군단 33사단 중좌, 조원으로 침투했던 4군단 정찰대대 작전집체조의 홍씨 성을 가진 참모였다고 한다.
2) 5.18광주봉기 전후의 북한 수뇌부 상황자료
1979년 10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과 12.12 전두환 정권 수립으로 남한에 복잡한 상황이 조성되자 김일성은 오랫동안 대남 공작을 총괄하다 퇴임하여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북한노동당 비서 김중린을 개별적으로 불러 한국내의 현 정세를 이용하여 비밀공작 조직을 더욱 활발히 움직일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한편 김일성은 표면상으로는 1980년 초(2월6일)에 남북한 총리회담개최. 남북 간의 직통전화 개설 등의 평화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남한 내의 혼란스런 정세를 이용하여 내부 교란작전을 구상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한국내의 비밀공작 조직들을 통해 광주에서 대규모 항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고 김중린을 불러 광주항쟁에 대비한 북한군의 지원 작전을 지시하였고 김중린은 북한 정찰국 및 특전사부대들을 광주봉기에 투입할 것을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으로 있던 장성우와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다.
1980년 5월 초. 김일성은 루마니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루마니아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고 5월 말까지 루마니아에 이어 구라파 방문일정을 소화하게 되어있었다. 루마니아 방문 출발 직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김중린을 불러 장차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응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김중린의 증언을 사적인 자리에서 직접 청취하였음) .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3) 5.18광주에 투입되었다는 북한 특수 군에 대한 기록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들의 실무 작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5월10일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연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중린.이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년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탄광복같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갓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년5월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70여명은 광주에서 죽은40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4) 5.18 당시 목포에 침투했다는 북한 특수군에 대한 증언
광주 시민군을 배후에서 조종한 북한군 지휘관 중에 534부대 타격대의 안창식 대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한다.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였던 탈북 여성은 광주사태를 지휘한 아지트는 목포에 있었으며, 목포에 침투해 있었던 북한군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시민 군을 조종했다고 증언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76쪽),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77쪽).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78쪽).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81쪽).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87쪽).”
다음은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서 시민군이라고 칭하고 군사적전을 벌였던 기록을 들어 그들이 당시에 광주에 침투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겠다.
5) 5.18광주에서의 무기고 탈취와 광주교도소 습격
무기고 탈취-1995년 7월18일 검찰이 내 놓은 ‘5.18관련사건수사결과’보고서와 1985년에 안기부가 작성한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을 보면, 1980년 5월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4시간 대에 17개 시와 군에 산재한 44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 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북한 특수군이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출귀몰한 군사작전이었다.
광주교도소 습격-그 해 5월 21일에는 충격적인 교도소 습격 사건이 무장시위대에 의해 6차례나 저질러 졌다. 광주교도소에는 당시에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복역 중이었고, 총 복역수가 2,700명이었다고 한다. 시민군이 복면을 쓰고 장갑차를 앞세워 총 6차례나 교도소를 습격했었고 쌍방간에 피해가 가장 심한 사건으로 기록 되었다. 시민 군 사망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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