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스승 리영희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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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2-12-27 01:53 조회4,4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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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세무민 진보사기꾼 리영희의 깡통민족주의와 진실 타령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QsOi83hu7k8
애국을 버리고 진실을 추구하다
그 진실이 거짓으로 판명나면
매국노 거짓말쟁이, 진보 사기꾼일 뿐이다!!
1983년 어느날 대학생이었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친구를 따라 기독교 회관에서 무슨 행사에 참석했다. 입장할 때부터 전경들의 경비가 삼엄하고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분주한 것을 보니 아마도 뭔 일이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한 현장분위기였다. 버마에서 아웅산 테러가 발생한 지 불과 며칠지나지 않은 터라 사회분위기가 흉흉하던 때이기도 했다.
행사장 안에는 리영희교수가 있었고 행사는 그의 강연이었던 것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그의 등장만으로도 환호했고 일련의 사태에 대해 리영희 교수가 바라보는 통찰과 안목이 빛을 발하는 시국진단을 바라던 눈동자들이 한 곳으로 모여 마치 한사람이 정적속에서 또 한사람의 강연을 경청하듯 고도의 집중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리영희 교수가 불안한 듯 이리 저리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여기저기 눈치를 보더니만 난데없이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 근자에 버마에서 일어난 사건은 국내에서 자행된 폭력(야만적 만행)에 대한 국외에서의 응징과 보복의 의미를 갖는 폭력인 것입니다 "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천인공노할 인면수심의 버마 아웅산테러가 광주학살 만행에 대한 응징과 보복으로서 역사적으로 정의로운 전쟁의 맥락을 가진 테러라는 취지의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의 발언을 듣는 순간 느꼈던 섬뜩함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내가 그의 책들을 읽으며 느꼈던 애매모호함과 의문 그리고 짜증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리영희 교수가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대한민국에 버젓이 살면서 조선노동당 내린집단을 추종하고 따르는 악성 분단 증후군 즉 종북지랄병 환자였던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그의 모든 저서들을 쓰레기 취급했다.
골수좌익 리영희의 김일성 우상화작업 |
대화(리영희/임헌영 대담, 한길사, 2005)’를 읽고 |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부조리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모든 부조리는, ‘도덕보다 경제(이익)가 우선이다’는 정신과 관련돼 있습니다. ‘어떤 이익도 중요하지만 도덕성(원칙, 법치, 정직, 성실, 배려 등)도 매우 중요하다’는 패러다임이 위축될수록 각종 이기적인 부조리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세상은 삭막해질 것이고, 결국 약삭빠르거나 튼튼한 빽을 지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이 부조리의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리영희 교수는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 박힌 부조리를 주변 사람들보다 날카롭게 거부했고, 덜 타협했고, 매우 고지식했습니다. 그만큼 개인적인 이익을 얻는 기회를 많이 잃으며 살아왔습니다. 6.25시절 장교로 복무할 때 다른 타락한 장교들처럼 군수물자를 빼돌렸다면, 기자생활을 할 때 다른 타락한 기자들처럼 촌지를 열심히 챙기거나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기사를 부지런히 썼다면 일찍이 아늑한 저택을 장만하고 고급 승용차도 굴릴 수 있었을 것이고 부모님과 처자식을 호강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영희의 생활은 고달팠습니다. 아홉 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을 받고, 언론계에서 두 번 쫓겨나고, 교수 직위에서도 두 번 쫓겨났습니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1012일이라고 합니다. 나는 리영희 교수의 사상과 표현을 문제 삼아서 감옥에 보낸 것은 지나쳤다고 봅니다.(그러나 북핵은 미국 탓이라는 리영희씨의 어법을 적용한다면, 리영희씨를 감옥에 보낸 것은 반공정책을 쓴 정부 탓이 아니라 끊임없이 대한민국 멸망을 추구한 북한 탓입니다. 북한이 평화를 추구했다면 북한에 반사이익을 챙겨주는 듯한 처신을 했어도 굳이 감옥에 보낼 필요는 없었겠지요.) 리영희 교수가 진실을 말했다면 수렴할 일이었고, 거짓을 말했다면 논리로 반박할 일이었습니다. 리영희 교수는 시련의 나날 속에서도 끊임없이 독서를 했고, 어학공부에도 매진했습니다. 영어와 일어는 강의를 할 정도이고, 불어는 독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노력도 많이 했고 머리도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료조사를 철저하게 하는 기자생활로 잔뼈가 굵었으니 문장에 논리적인 파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숱한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논리에 빠져들었고 ‘의식화의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을 것입니다. ‘대화(한길사, 2005)’라는 책은 대담형식으로 써내려간 리영희 교수의 회고록인데 무려 740여 쪽입니다. 구술하고 기록하고 고치고 정리하는데 2년 가까이 걸린 책이라고 서문은 적고 있습니다. 이 책 465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80년대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한국 학생운동의 사상적 맥락을 다룬 연구책자를 보니까… 학생들이 사상적 영향을 받은 도서 1위가 ‘전환시대의 논리’이고 2위가 ‘8억인과의 대화’이며… 다섯 번째가 다시 나의 ‘우상과 이성’이었어요…” 731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연세대학원신문이 1999년 말…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을 설문조사했는데… 국내 학자 1위가 리영희였어요.” 리영희는 ‘이성, 진실, 평화, 보편타당한 상식 등’을 엄격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곳곳에서 표출하고 있습니다. 675쪽입니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리영희씨가 쓴 글들은 ‘진실’이라는 겁니까? 우상을 타파하는 이성이었다는 걸까요? 446-447쪽을 보겠습니다. “내가 문화혁명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에는 진실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다른 외국의 학자들에 비해서 월등히 열악하고 한정된 범위의 정보밖에 없던 나에게는 그 후 알려진 이른 바 ‘홍위병’의 반문화적 파괴행위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부정적 사실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가 과거에 중공을 경계하는 대세 속에서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미화하며 썼던 글은 ‘우상을 타파하는 이성’이 아니며 ‘정확한 진실’도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진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책 몇 권 읽고, 피상적인 정보만을 근거로, 모택동을 우상화하는 속단이요 기만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리영희는 정직한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현상을 한국에 투영할 때에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우리 남한사회와 국가 내부의 온갖 부조리와 왜곡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 대조적인 현상으로서 외부의 현상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그것들이 지니는 반면교사적 효용과 의의를 중요시한 거요.” 참 교활한 궤변입니다. 왜 우리 국가 내부의 부조리와 왜곡을 파악하는데, 굳이 모택동을, 6.25때 적화통일을 지원한 모택동의 문화혁명에서, 그것도 그 혁명의 전모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모택동으로부터 교훈을 찾아야 하는 겁니까? 얼마 전에는 리영희가 존경하는 모택동의 나라 당국자들이 리영희가 경멸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정부 당국자들은 멍청한 걸까요, 리영희의 시각이 한심하게 삐뚤어진 걸까요? 과거에 자신만만하게 발표한 학설이 오류였다는 진실이 드러났을 때, 리영희는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내가 오직 진실을 추구한다는 자부심을 품고, 이성으로 우상을 타파한다며 기존의 틀을 깨는 관점을 표현했던 것이, 얼마 지나고 보니 정확한 진실, 핵심적인 진실이 아니며, 또 하나의 편견, 사실의 왜곡과 과장, 그리고 우상 만들기일 수도 있다는 배움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오직 진실을 추구하고 우상에 도전하며 글을 썼다’는 자랑은 감히 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말한다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대세와 다른 관점의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얻었다.” 리영희는 ‘광적인 반공주의’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반공주의’도 아니고 ‘광적인 반공주의’입니다. 반공을 표방하면서 생사람을 잡았던 학살사건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권과 평화’가 고귀하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대화’ 740여쪽 중에 ‘북한 무장공비의 이승복 가족 학살’이나 ‘북한 간첩의 KAL민간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한 분노의 표현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김일성 사진을 곱게 보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요덕수용소로 직행하는 북한주민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두 세력이 갈등으로 대립하는 상황을 가정하겠습니다. 거기서, 한 세력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항상 나머지 세력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합니다. 한 세력의 선택 대부분은 나머지 세력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그런데 나머지 세력과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받았는지 그 ‘관계성’은 도외시하고, 한 세력을 따로 떼어내서 어떤 부조리가 얼마나 있었냐를 파헤친다면, 나머지 세력을 적극 돕는 시다바리 노릇이 될 수 있습니다. 6.25가 휴전으로 끝난 후에도 북한의 김일성은 끊임없이 도발을 일으켰습니다. 무장공비의 침투가 있었습니다. 산골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를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땅굴을 팠습니다. 청와대 습격 시도가 있었습니다. 대통령 영부인을 저격했습니다. 김일성이 적화통일을 시도하는 작업을 그렇게 치열하게 하는 상황에서 ‘반공주의’가 ‘타파돼야 할 우상’일 수 있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김일성을 직간접적으로 옹호하거나 찬양하는 행위가 ‘진보’일 수 있습니까? 광주에서 전두환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경향을 그냥 ‘전두환 부정’이 아니라 ‘‘광적인 전두환 부정’이라고 묘사해도 되는 걸까요? 리영희 부류는 박정희 대통령을 혹독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적화통일을 저지한 것’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라고 칭송하고 싶습니다. 오직 ‘진실’과 ‘우상을 타파하는 이성’을 추구한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리영희는 북한을 직접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기자출신이니 일반국민에 비해 북한인권의 진상을 얼마든지 먼저 더 많이 파악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리영희 부류는 북한 인권상황에 대해 침묵합니다. 성공회 사제라고 하는 이재정 통일부장관은 북한 인권상황은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설레발을 칩니다. 대한민국 멸망이 일생의 목표였던 김일성을 우상으로, 성역으로 모시겠다는 믿음이 있을 때나 선택할 수 있는 처신입니다. 적화통일이 되었다면 대한민국 국민들도 김일성 동상을 숭배하며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두팔을 높이 쳐들고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이 어쩌고”하는 찬양을 배웠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도 먹을 것이 없어서 두만강을 건너 연병시장바닥을 헤매는 꽃제비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주체성이 그렇게 처참하게 파괴되는 비극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리영희 부류는, 적화통일을 엄격하게 경계했던 박정희 정부의 ‘반공주의’가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평화주의자, 인권주의자, 진실주의자 행세를 합니다. ‘대화’ 80-81쪽에서 리영희는 이렇게 북한을 찬양합니다. “(해방직후) 이북에서는 새 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친일파들을 비롯하여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되고 있었는데, 같은 민족의 땅 이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는 한숨과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어요.” 우선 ‘깡그리 청소’랍니다. 내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은 ‘김일성이 권력을 잡는데 방해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이었는데, 리영희는 ‘깡그리 청소’랍니다. 리씨가 지적하는 것처럼 ‘친일파’이고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라고 합시다. 아무리 그래도 ‘깡그리 청소’라는 표현을 인간에게 사용할 수 있는, 리영희의 그 심성은 삭막하게 느껴지네요. 아니, 어떤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비인간성일 뿐입니다. 리영희씨의 책을 읽었을 때, ‘코페르니쿠스적인 의식의 전환’을 경험하고 북한과 모택동과 베트남 공산주의를 옹호하고 미국을 날카롭게 배척하는 심판자의 사상을 지니게 된 청년은 생겼을지언정, 가슴이 따뜻해지는 인격의 성숙을 경험하는 청년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오만과 독선과 편견이 하늘을 찌르는 리영희의 표현대로 “청소가 됐다”고 합시다. 청소된 사람들은 오직 친일파였습니까? 오직 호의호식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친일파가 아닌데, 호의호식하지도 않았는데, 오직 진실과 평화와 정의를 추구했기에, 김일성과 공산당의 독단적인 권위주의와 폭력성을 거부했기에 청소된 사람은 없었을까요? 리씨의 증언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적극 가담하는 개소리가 아닙니까? 인터넷으로 검색할 때 이런 자료를 접했습니다: “해방직후 북한 고위 간부 명단- 김영주(김일성의 친동생, 부주석, 헌병대 보조원), 이활(북조선 공군 총사령관, 나고야 항공병학교출신), 허민군 9사단장/강치우 기술부사단장/김기옥 제1연대장/김한욱 제2연대장 등 북한공군간부 20명(대부분 일본제국군출신, 10명은 만주군 출신), 장헌근(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문화선정성 부부상, 친일 밀정), 김정제(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이 자료가 정확한 사실인지 공신력 있는 자료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 자료가 10%만 사실일지라도 리영희의 “친일파 깡그리 청소”라는 증언은 완전히 우상만들기입니다. 이 자료는 확실하지 않지만, 김일성이 항일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 선생과 오산학교와 대성학교와 숭실학교 출신의 지식인을 모두 숙청한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들도 ‘청소’가 된 겁니까? 이들도 ‘청소’가 되었으니, 리영희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도 모두 ‘친일파’거나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일까요?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 정도의 정신이 “내가 20-30년 동안 길러낸 제자와 후배들이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큼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면, 그만큼 더 우리 사회에는 청소돼야 할 편견과 독단의 부조리가 퍼진 것이라는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은근히 미화하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서전 형태의 책에서 착잡함을 심각하게 느꼈는데, 그의 단점을 포함한 실체를 좀 더 포괄적으로 안다면 십중팔구 참기 어려운 환멸이 있을 것 같습니다. <三德 프리존 논설가: http://www.freezone.co.kr/> |
자유민주주의,전체주의,공산주의:20세기 경쟁에서 윌슨주의 승리
이승만,인간적 약점은 많았지만 민주공화국 초석 놓아 '功九過一'
윌슨 따라 대한민국 방향타 잡은 이승만 죽이기는 대한민국 부정
-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렛せ聆�
20세기는 윌슨주의와 레닌주의의 경쟁 역사였다.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자유민주주의와 정치적 자결(自決)주의, 그리고 레닌이 주창한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라는 두 거대 사상의 대결이 20세기를 장식했고, 그 귀결은 윌슨적 가치의 승리였다. 1910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한 야심 찬 한국 젊은이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윌슨 총장에게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윌슨의 정치적 이상도 전수받았다. 개화파의 막내로서 입헌(立憲)제를 주장하다가 모진 옥살이를 한 이승만이 유학 생활에서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에 이어 한국인으론 첫 박사 학위(Ph.D.)를 받은 것이다.
지난 10월 3일 윌슨의 이름을 딴 프린스턴대 우드로 윌슨 스쿨(공공정책대학원) 내에 이승만 홀이 명명(命名)됐다. 필자도 참석한 이 명명식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마치 이승만이 스승이었던 윌슨의 품에 편안히 안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필자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조직적인 '이승만 부정(否定)' 세뇌를 온몸으로 받은 세대다. 리영희 교수 등의 책을 읽으며 이승만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갔다.
물론 이승만은 인간적인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과 고집이 강했고 정치적 술수에 능했다. 신익희려떵늉� 등 대한민국의 초석(礎石)을 함께 놓은 애국 인사들에게조차 권력을 나눠주는 것을 꺼렸다. 또한 너무 노년(73세)에 집권했고 거기에 장기 집권 문제까지 겹쳐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그러나 이런 과오는 그의 빛나는 공적과 같이 공평하게 다뤄져야 한다. 집단농장화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나라를 파탄 낸 모택동에 대해 등소평은 이렇게 평가했다. "공칠과삼(功七過三). 공이 7이라면 잘못은 3이다." 같은 기준으로 보면 이승만은 어떻게 평가돼야 할까. 아마도 '공구과일(功九過一)'이 아닐까.
길고 고달팠던 독립운동 생활은 물론 의무교육 실시, 자유민주주의 노선, 한-미방위조약 체결,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線) 선포 등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놓은 그의 공적을 다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란다. 그중 농지개혁만 언급해 보자. 대부분 국사 교과서는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였기에 성공적이었고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렝?鑿橘瓦눙藪� 불완전했다'는 식의 오류를 앵무새처럼 되뇐다. 그렇게 북(北)의 토지개혁이 성공적이었다면 왜 북한의 농업은 엉망이고 농민들은 국가 농노(農奴)와 같은 존재인가? 그리고 북한은 토지의 무상분배를 한 적이 없다. 토지의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줬을 뿐이고, 그마저도 나중에 집단농장화했다. 소유권 없는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 남쪽에서는 지주가 사라지고 자영농이 자라났다. 그리고 여러 경로를 통해 근대적 산업자본이 형성됐다. 반면 필리핀은 농지개혁과 근대화렌袁宅?� 실패해 아직도 15대 지주 가문이 국부(國富)의 50%를 차지한다. 대통령도 배출한 아키노와 코후앙코 가문이 대표적이다. 다음 달 개관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은 원래 필리핀 회사의 감리로 1961년 세워졌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3배였던 필리핀의 국민소득은 지금 한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이승만은 결국 자기 성공의 제물이었다. 그가 자신이 세운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통치를 했을 때 교육받은 국민은 용인할 수 없었다. 경제 발전으로 먹고살게 되고 시민으로 성장한 국민이 박정희의 권위주의를 더는 못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선각자였고, 윌슨의 이상을 따라 대한민국의 방향타를 옳은 방향으로 잡고 공산주의와 대결한 지도자였다. 역사는 결국 윌슨렝決쨍� 노선이 레닌렘뵀뻗갬모택동런窩究� 노선보다 옳았음을 증명했다.
돌이켜 보면 '이승만 죽이기' 교육은 '1948년 체제'를 부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을 갈라놓으려는 시도도 많았다. 그러나 3�1운동의 정신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와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통합된 과정의 산물이었다. 1919년은 정신적 건국이자 대한민국이 수태된 날이었고, 그 이후는 고통을 수반한 임신의 기간이었으며, 1948년은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란 갓난아이가 탄생한 실질적 건국의 해였다. 그 중심부에 이승만이 있었으니 그는 임정과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었다. 이렇게 난산(難産) 끝에 태어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소중히 성장해간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나 그들과 야합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주도하려 나서는 작금의 상황이 한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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