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혁명과 2013 자유통일 체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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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3-01-02 16:09 조회2,2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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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선거혁명과 2013 자유통일체제의 등장
민족분단 정전체제를 넘어 자유통일로!!
8.15광복으로 나타난 해방공간은 민족대단결(대동단결)노선에 따른 민족독립국가 건설의 역사적 시공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를 추종하는 종소반역자들의 설익은 사회주의 적화야욕과 민족분열책동의 결과인 6.25남침전쟁과 무승부로 끝난 정전으로 38선 분단이 기정사실화되고 비로소 성립된 한반도 민족분단 정전체제가 6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53년 정전협정으로 출현한 민족분단 정전체제는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 조국통일의 역사적 과제를 숙제로 남긴 뼈아픈 결과였으나 해방공간이후 지속된 계급투쟁혁명을 불러오는 내란형 좌우익 이념대결로 인한 더 이상의 민족 에네르기의 유혈적 소진을 막고 계급투쟁을 외부화시켜 두 개의 체제로 만들어 선의의(?) 체제경쟁으로 전환시켰다는 장점도 있다. 민족의 운명개척과 진로선택을 놓고 벌어진 무력투쟁을 동반한 이념대결을 선의의 체제경쟁으로 바꾼 측면이 있는 것이다.
민족분단 정전체제 초기의 주도권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이 잡았다. 이승만 주도하에 민주체제의 제도화와 정착이 순조롭지 못하면서 극도의 정정혼란과 국민분열이 지속되었으며 경제도 개발원조시대를 한발짝도 넘어서지 못하고 국민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으며 하늘을 원망해야 했다.
반면에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은 6.25전쟁을 통해 미제국주의에 대한 주적개념 정립과 승전신화 조작에 성공함으로써 내란집단과 스탈린 모택동의 꼭두각시라는 오명을 벗고 신속한 전후복구에 성공하여 초반기세를 올렸다.
3.15부정선거가 빌미가 된 4.19의 의거로 이승만이 퇴진하자 김일성의 적화공작에 의해 聯北統一 기운이 급격히 고조되면서 민족분단 정전체제가 조기에 무너질 위험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좌절과 국민생활의 도탄의 틈바구니를 파고든 김일성의 위장평화공세 앞에 급격히 무력화돼 북으로 흡수통일(평화통일)하자는 불길이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거세게 타올랐던 것이다. 체제경쟁이 비참한 패배로 마무리되려던 위험천만한 찰나였다.
자유의 파수꾼 국군이 박정희를 앞세워 5.16 군사혁명으로 급한 불을 끄고 반공을 국시를 내세우고 전면적인 산업화와 조국근대화를 추진함으로써 하면된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죽기살기의 체제경쟁에 다시 나선 것이다. 김일성의 도발책동에도 불구하고 민족분단 정전체제가 재정비되고 산업화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남북간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의 주도권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전전긍긍하던 김일성은 김대중을 적극 지원하며 국론분열을 야기하면서 75년 베트남공산화를 계기로 남침기회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중국공산당 등소평의 지원거절로 실패했다. 국민을 결집시켜 압축적 산업혁명을 주도하던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가 흉탄에 사라지며 나타난 절대권력의 공백상황에서 민족분단 정전체제의 위기가 또다시 찾아왔다.
직선개헌과 대통령선거라는 국민적 합의(10.26이후 암묵적으로 동의된 국민적 합의)를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김대중은 대학생들을 동원하여 유신잔당의 무조건 퇴진과 하야를 요구하며 직선개헌 반대를 외치고 내란을 선동하고 다녔다. 윤상원 평전에서 사노맹 출신 박노해 시인의 견해에 따르면 5월 9일부터 김대중이 측근 윤상원에게 무기고 탈취 범행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외국순방중인 최규하가 즉시 하야하지 않으면 5월 22일부터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공공연한 내란선동이 난무하고 동교동 24시의 저자 함윤식씨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예비내각 명단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김대중 내란음모 혐의 체포 및 5.18 광주폭동은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인 것이다. 북한 특수군의 광주폭동 개입설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광주인민의 지주 민주 통일을 요구하는 의로운 인민봉기를 유신잔당 전두환이 파쇼폭압으로 진압했다는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의 주장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신군부는 민족분단 정전체제의 붕괴를 통한 적화통일의 위기를 일거에 제압하고 중단없는 전진을 통하여 견실한 경제성장 지속과 유례없는 물가안정 구현 및 무역흑자시대 개막 등으로 남북체제경쟁에 쐐기를 박았다. 인민의 생활개선은 외면하고 반제 반미 비동맹 외교를 내세우며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 대규모 운동 경기장 등을 지어주고 다니며 허장성세하던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은 또다시 내란집단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중산층으로 자라난 화이트칼라 넥타이부대의 민주화요구에 화답한 6.29선언으로 소위 87민주화체제를 출범시켜 체제의 민주적 국민적 정당성을 한층 강화하고 88서울 올림픽 개최로 남북 체제경쟁의 사실상의 종지부를 찍었다.
더구나 단임실천으로 전두환이 뒤끝 없이 물러나고 직선으로 등장한 노태우 대통령이 88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바탕으로 제고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십분 활용하여 북방외교에 나섰다. 공산권 국가들과 모조리 수교를 통해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을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새끼 신세로 만들어 버리자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이 오히려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서둘러 민족분단 정전체제 공고화에 나섰다. 남북 유엔동시가입도 같은 맥락이다. 대한민국에 의한 흡수통일을 막고자 노심초사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종북주사파 세력들을 전면에 내세워 수령결사옹위와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의 방패막이로 활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은 그토록 염원하던 김대중 집권이 93년에도 좌절되자 심각한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이대로 생을 마감하고 조선노동당이 고립돼가다 대한민국에 흡수합병돼 버리면 자신은 6.25남침전쟁의 戰犯이며 역사의 罪人으로 낙인찍혀 영원히 민족반역자로 남게 돼버릴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김대중의 실패와 좌절의 불똥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튀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대로 지내다 죽음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반공 의회주의자에 불과하지만 김영삼과 만나 담판이라도 지어야 했다. 남북평화통일로 가는 물꼬를 자신이 직접 나서서 터놔야 역사의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울불바다 발언을 계기로 조성된 위기를 구실로 카터를 불러와 꿍작을 부린 다음 김영삼을 평양으로 불러 100만 군중대회를 열어 성대하게 환영해준 다음 남북통일 합의를 발표해 놓고 죽음을 맞더라도 맞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의 생각은 달랐다. 굳이 반공주의자 김영삼과 남북통일 합의를 무리하게 추진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노동당이 대한민국에 서서히 흡수통일되는 것에 합의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죽는 것이 혁명정신인데 반공주의자를 평양으로 불러 들여 뭐하자는 것인가? 아버지 김일성이 아무래도 노망이 든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혁명의 길을 가다보면 좋은 날도 힘겨운 날도 있기 마련인데 힘들다고 백기투항이나 마찬가지인 협상을 한다면 미래가 사라지는데 그게 무슨 혁명인가? 아무래도 노친네를 배제하거나 제거하고 우리식의 사회주의를 고난의 행군으로 사수하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지금 혁명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우리 모두가 죽게 되며 우리식 사회주의 혁명도 주체위업도 한 순간의 거품처럼 사라진다.
(어버이 수령을 묘향산 별장에 감금 고립시키고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라!! 정보유출을 막고 준동세력이 있으면 가차없이 색출 처단하라!! 어버이 수령에 대한 최종결단은 내가 직접 내릴 것이다. 즉시 시행하도록 하라!! 행동개시!!)
남북수뇌회담을 앞두고 느닷없이 김일성의 사망이 발표되었다. 김정일 요리사의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사망직후 김정일이 권총을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가 권총을 입에 물었다고 한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극도의 흥분과 불안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이때 김정일을 잡아준 것은 김옥이라고 한다. “당신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면 당신을 믿고 따라왔던 이 많은 인민과 당원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란 것이냐”며 설득했다고 한다.
이 후 김정일은 유훈통치를 내세우고 효자를 자처했지만 유훈통치에는 김일성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추진했던 6.25전범 면죄부 사업 김영삼과의 남북회담 추진의 계승은 없었다. 그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대신 대다수 인민의 생존을 외면하고 고난의 행군과 우리식 사회주의 고수라는 핵심 혁명역량 보위책만 시행되었다. 이번에는 조선노동당 내란집단 내부에서 초래된 민족분단 정전체제의 해체위기가 나타났지만 대한민국이 이 기회를 적절히 활용했는 지는 의문이다. 한반도 남북대결 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자 기회가 그렇게 지나가버린 것이다. 참으로 아깝고 통탄할 일이다. 게다가 김영삼은 하나회 숙청과 5.18특별법제정 등을 통해 남북체제대결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등 한반도 전체를 조망하는 인식틀과 전략에 무지하고 무능한 지도자라는 것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인정사정 없는 반인민적 배급중단으로 고난의 행군시기 헐벗고 굶주린 300만명의 주민이 굶어죽고 사회해체로 나아가던 상황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을 소멸하고 민족분단 정전체제를 과감히 허물어 대한민국에 흡수통일시킬 절호의 기회를 수수방관한 채 문민의 깃발을 들고 역사 바로세우기 굿판을 벌이는데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선 의원의 자질도 못 갖춘 차남을 소통령으로 내세워 정치를 농단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국회청문회로 날을 지새우는 문민정치의 허망한 모습을 자랑하다 IMF사태를 맞고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만 것이다.
비자금 760억 의혹이 불거지자 광주내란협박으로 수사강행의지를 무마시키고 DJP연합으로 보수세력을 분열시키고 마침내 집권의 꿈을 이룬 김대중은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지원하다 먼저 세상을 뜨고만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에게 보은하기로 작심하고 95년부터 임동원을 통해 착실하게 준비해온 용공노선 대북 무조건 퍼주기 햇볕정책을 본격적으로 내걸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웅거하며 숨어지내던 조선노동당 내란집단 쥐새끼들의 쥐구멍에 마침내 햇볕이 들게 된 것이었다. 전교조 합법화를 필두로 국내 종북세력의 합법화와 본격 배양에 나서는 한편 6.15선언을 통해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이 주도하는 민족분단 정전체제 해체공작에 적극 협력해 나갔다. 어버이 수령 김일성이 남겨준 유훈만 입버릇처럼 낭송하며 무너져 내리다가 또다른 정치적 유산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구명줄이 되어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은 적화통일의 정신과 기력을 되찾고 급속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등장한 노무현 정부는 드러내놓고 종북반역질에 매달렸다. 6.15선언(조선노동당 주도하의 조국통일 정치강령)을 이어받은 10.4선언은 6.15반역의 실천문서였다. 조선노동당과 종북세력이 마침내 합세하여 민족분단 정전체제를 허물고 되돌이킬 수 없는 적화통일로 나아가기 일보직전에서 이명박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으니 실로 피눈물을 삼킨 후퇴였으리라. 이제는 노무현의 부엉이바위 자살사건과 문재인의 임기중에 반드시 연방제통일을 이루겠다는 공약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정일 노무현 회담 대화록에 실린 내용의 맥락 또한 구체적 내용이 더 밝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일이다.
대남선동선전 기구인 조국평화통일 위원회 안경호와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김양건 등 대남 사령탑의 지휘를 받는 범민련, 6.15실천연대, 원탁회의, 진보연대 등이 18대 대선을 승리로 만들어 출범시키려던 2013체제는 6.15선언,10.4선언 합의정신에 따라 조선노동당 주도하에 민족분단 정전체제를 혁파하고 서는 새로운 반외세 민족동맹체제이다. 즉 연방제 적화통일로 두려움 없이 힘차게 전진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가치와 헌법수호를 위해 박근혜를 앞세운 애국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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