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과 인민군의 본질적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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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2-12-19 15:32 조회2,949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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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의 본질적 차이
자유통일의 혁명무력과 역사의 반동군대
대한민국 국군은 1910년 한일합방이후 해외 각지에서 비롯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후 이어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빛나는 항일 무장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과 광복군 활동 등 관련인사가 속속 참여하여 항일무장투쟁 전통과 정신을 일부 계승하였으나 전면적으로 이어받아 만들어진 군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태평양 전쟁의 승전국인 미국이 설치한 미군정하에 만들어진 국방경비대로 출발하였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1945년 우리 민족이 1905년 외교권을 상실한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41년간을 청산하고 1945.8.15 광복을 맞이한 것은 우리 민족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국제적으로 고양된 민족자결주의 정신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젊은 피 10만여명의 값비싼 희생을 치루고 얻어낸 일본 군국주의의 무조건 항복의 결과물이다. 미국이 우리 민족을 일본군국주의로부터 떼어내 독립국가를 만들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군국주의 때문에 우리 민족구성원이 무수한 각고의 고초를 겪고 피해를 입었다는 것과 저항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희생이 항일독립투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심리적 저항을 포함하여 일체의 저항과 일본군국주의를 패퇴시킨 무력투쟁의 객관적 실질적 업적은 역시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막바지에 이른 일본군국주의의 최후의 마지막 도박이자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에 기여한 우리 민족의 객관적 기여도는 10% 정도 인정하는 것도 엄청난 과장이다. 좀 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역사가라면 아마도 1% 정도로 한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1%의 의미는 무엇이냐? 열화같이 불타오르는 독립의지와 그에 따르는 격렬한 항일 무장투쟁은 없었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체념하고 좌절한 채 살아갔지만 일본군국주의가 패퇴하길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었으며 독립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으며 이러한 심리적 저항감을 바탕으로 미미한 실제적 물리적 저항도 간혹 있었다. 이것이 역사의 솔직한 진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피해를 입으면서 심리적으로 형성된 저항의식과 독립운동 또는 무장투쟁을 통해 일본군대를 객관적으로 물리력으로 몰아낸 투쟁의 업적기여도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맞이한 광복은 위와 같은 역사의 산물이었으며 광복으로 나타난 해방공간의 성격과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식틀을 제공한다.따라서 해방공간은 태평양 전쟁의 전승국 미국이 마련해준 대동단결 독립국가건설의 기회로서의 역사적 시공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기 위해 유럽전선에서의 소련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만주지역에서의 일본군 무쟁해제를 위해 소련의 참전을 독려했지만 소련의 야심은 한반도를 낼름 집어 삼키고 미국과 정치협상으로 일본을 나눠먹고자 하는데 있었다.
일본군국주의의 패망이 임박하자 비로소 이루어진 소련의 기회주의적 참전과 전격남하에 당황한 미국이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38선이 생겨났다. 우리 민족이 지헤로왔다면 소련 붉은 군대의 음흉한 수법과 적화야욕을 간파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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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system님의 댓글
system 작성일글 주심에 감사 드림니다
송석참숱님의 댓글
송석참숱 작성일
한반도 자유통일 추진 국민위원회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반도님 박근혜후보 대통령당선 축하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취임 첫 국군의 날에 위 그림에 나오는 모든 장비들을 서울시내 시가행진
시켰으면 글고 아주 옛날 같이 국군의 날 행사를 서울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팬텀님의 댓글
팬텀 작성일그것도 광화문광장에서 매번국군의날마다 우리의 신무기들을 보여줌으로서 우리군대가 강하다는것을 보여줘야함
한반도님의 댓글
한반도 작성일
참숯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한민국 희망이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기쁜 하루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