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의 원조는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의 횃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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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후보의 광화문 촛불유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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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
| 1992년 인터넷 서비스망 하이텔의 유료화에 반대하여 처음 열렸으며,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廣積面)의 지방도로에서 길을 가던 두 여자 중학생 신효순·심미선이 주한미군의 장갑차량에 깔려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정착된 집회의 한 형식이다. 이 사건은 당시 개최중이던 한·일월드컵축구대회와 제16대 대통령선거의 열기에 묻혀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가 두 여자 중학생을 추모하자는 뜻으로 인터넷을 통해 촛불시위를 제안하였고, 이 제안이 네티즌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같은 해 11월 처음으로 서울의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추모집회의 성격을 띠었으나, 미군 법정이 사고 장갑차 운전병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반미(反美) 시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때 한국과 미국 사이에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과거의 폭력적 시위와는 다른 평화적 시위를 유지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으며, 한국의 대표적 집회 및 시위 문화로 자리잡게 되어 이후 제16대 대통령선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2004년 3월 노무현대통령 탄핵사건이 일어나자 탄핵에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결국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 2008년 5월 2일에는 10대 여학생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를 처음 연 뒤로 많은 시민들이 수입조건 재협상을 외치며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2008년의 촛불집회는 이전과는 달리 이른바 주도세력이 없는 자발적 개인들의 모임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하지만 전교조 의식화의 대중동원 검증수단이 되는 대회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고생들로부터 시작되어 대학생, 일반 회사원, 유모차를 끄는 젊은 주부들까지 다양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비폭력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대중선동을 민주주의라고 굳게 믿는 김대중은 아테네이후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촛불집회를 선동했다. 문성근은 걸핏하면 백만민란을 주장하며 촛불집회를 선동한다. 직접민주주의 촛불문화제란 이름뿐인 허울이며 광란의 촛불집회로 변질되어 야간폭력시위로 질서유지를 담당하던 경찰을 공격하고 도시게릴라들이 이합집산하는 신종 내란에 지나지 않는다. 한미디로 민주주의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일상적인 공권력 무력화 투쟁대회인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촛불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주위를 밝게 비춘다는 점에서 희생을, 약한 바람에 꺼지면서도 여럿이 모이면 온 세상을 채운다는 점에서 결집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새벽을 기다리는 불꽃이라는 점에서 꿈과 기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촛불집회가 문화제 성격을 띠게 된 데는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는 옥외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문화행사 등은 예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이 즐겨 사용해온 군중동원 횃불선동집회가 원조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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