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인용]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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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비역2 작성일12-12-01 23:38 조회3,5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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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 "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p.422~427
서울대학교에서 석사,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를 지냈고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공보비서관으로 9년여에 걸쳐 3명의 대통령을 직접 보좌했다. 휴버트 험프리 공공정책연구소 교환교수와 랜드 (RAND)연구소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1997년 이래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포스코 펠로우십(POSCO Fellowship)을 관리하는 동시에 대통령 리더십, 남북한관계, 한미관계 등을 연구해 왔다.
주요저서로는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 『정치사회화와 정치교육』, 『현대공산주의 분석』(공저), Korea and the Asia-Pacific Region(공편), A Changing Korea in Regional and Global Contexts(공편) 등이 있고 Leadership for Nation Building : Korean Presidents from Syngman Rhee to Kim Dae Jung이 현재 미국에서 출판중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부정부패사건 규모에 비해서 전두환의 친인척의 비리는 실제로 별것 아니다"는 글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종북좌파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29만원을 물고 늘어지나, 김영삼, 김대중의 부정부패(옷로비, 각종 게이트)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더군요. 전두환 대통령이 평가절하를 받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 물가안정, 과외금지, 삼청교육대 운영으로 조직폭력배를 소탕하여, 국민들이 생활하기에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으론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때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자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의 김영삼, 김대중의 실정으로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빈곤층으로 무너지고, IMF 구제금융, 카드대란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이혼하는 가정이 늘어나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고, 그 영향이 2012년 현재의 대한민국에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께서 기반을 조성하셨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전두환 대통령이 안정시켰고, 전두환 대통령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 받아 한국경제를 부흥시키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26년" 처럼 전두환 대통령을 나쁘게 평가하는 영화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의 좋았던 점과 업적 등을 종북좌파에게 세뇌되기 쉬운 일반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5.18광주사태가 전두환 대통령과는 상관없다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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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의 업적과 유산
한국의 장래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을 당시 전두환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그로부터 7년 후 그러한 회의적인 견해는 대부분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붕괴 직전의 경제를 구출하여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선진국 문턱에 이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확고한 리더십이 없었다면 그 같은 성공적인 대전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후임자들이 국정운영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던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본다.
전두환 정부는 또한 올림픽을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준비함으로써 한국의 경이적인 발전을 세계에 과시하여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해 선진국 못지않은 발전된 국가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어 수출시장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박정희에 시작되고 추진된 ‘한강의 기적’도 전두환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되지 못했다면 미완성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만약 전두환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들은 보다 일찍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경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집권 당시 물려받았던 부정적인 경제유산을 고려할 때 전두환 정부의 경제업적은 놀라운 것이다.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안정 정책과 구조개혁 노력이 대부분 실패했지만 한국만은 성공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제3세계 경제개혁의 모델이 되었다.1) 1960년대 초부터 고질적인 문제로 등장했고 특히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경제성장의 잠재력마저 위협했던 인플레는 전두환 정부에 의해 성공적으로 극복되었다. 1980년 도매물가 상승률은 무려 39%나 되었으나 1982년에 이르러 4.6%로 낮아졌고 그 후 1987년까지 1% 수준으로 유지되었으며 소매물가도 1980년의 29%에서 1982년에 7%로 떨어졌고 그 후 1987년 말까지 3%로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한국경제는 구조적 취약점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험난한 민주화 과도기였던 1986년부터 3년간 경제는 연평균 12% 성장했으며 같은 기간 중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상당한 무역흑자까지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그림 5-3). 1980년대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1%로서 당시 세계 200여 개 국가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1) Corbo and Suh, Structural Adjustment.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해였던 1987년 말 한국의 국민총생산은 1,3600억 달러를 넘어섰고 1인당 국민소득도 3,218달러에 달했다. 1980년의 국민총생산이 630억 달러였고 1인당 소득도 1,600달러였던 것을 고려할 때 경제력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고도성장의 추세는 1988년에도 지속되어 국민총생산은 1,800억 달러, 1인당 소득은 4,300달러에 이르렀다. 전두환 정부 하에서 대외수지(對外收支)도 1981년의 44억 달러 적자에서 1987년에는 기록적인 100억 달러 흑자를 달성하는 등, 놀라운 개선을 보였다. (그림5-4).
그 같은 대외수지개선은 주로 국제경쟁력 향상에 따른 무역흑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같은 무역수지 흑자현상은 한국역사상 최초로 있었던 일이다. 무역적자는 1960년대 이래 한국경제가 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였으며 경제정책의 귀재라 불리던 박정희마저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외채를 갚기 시작했으며 외채망국론도 수그러들게 되었고 제3세계 국가 중에서 외채를 상환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요컨대 전두환 정부는 물가안정, 고도성장, 무역흑자라는 세 말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정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는 또한 빈부 간, 도농(都農) 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전두환 정부의 경제적 업적은 박정희 정부보다 다소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후임정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2)
2) 조선일보 주관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의 평가에 의하면 박정희의 경제치적은 85점을 받은 반면 전두환은 비교적 높은 70점으로 역대 대통령 중에서 2위로 평가되었다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 『한국의 역대 대통령 평가』, p.88). 안병만 교수가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전두환은 박정희 다음으로 선호도가 높은 정치지도자로 나타났다 (안병만, "역대정부의 정책평가와 신정부의 정책과제," 『한국행정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1998, p.266).
이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놀라울 정도로 인기 없는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전두환 정부는 치적과 과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두환 정부 7년 동안 반정부세력은 전두환에 대해 쿠데타로 집권했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장본인이라고 보고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줄기차게 저항했다. 그의 재임7년 동안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서 전투경찰이 보이지 않은 날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그의 재임 기간 중 여러 차례 위수령과 계엄령, 그리고 긴급조치를 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한 번도 그 같은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 그의 업적을 제쳐두고 그의 정권의 과오만 조명되고 잇는 것이 전두환에게 다소 불공평한 것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의 과오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김영상 대통령이 정치보복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전두환은 1995년에서 1996년에 걸친 재판에서 12․12사태와 광주사태에 대한 과오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또한 재임 기간 중 막대한 정치자금을 거두어 썼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유죄가 인정되었다. 다행히 재판부는 전두환이 광주사태 당시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3)
3) 재판기록 요약은 한국일보, 1996년 8월 27일 참조.
전두환은 박정희 서거후 다가온 민주화의 호기를 말살했으며 7년 내내 민주세력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러한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만약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1980년에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좀 더 일찍 더 많은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1980년대 초 민주화가 국민의 열망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국의 안정이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 사회․정치적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 자본가들이 한국에 더 이상 투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으며 기존의 투자까지 회수해 갔을지도 모른다. 전두환은 안정을 회복하고 고도성장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1987년 민주화로 전환할 수 있었고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통해 북한을 압도함으로써 국가안보면에서도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이를 준수함으로써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을 수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과소평가될 일이 아니다. 4)그는 평화적 정권교체야말로 한국민주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헌법 개정을 통해 정권을 연장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본인은 헌법절차에 따라 정부를 이양한 첫 번째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으며 결국 그는 그 약속을 지켰고 그것은 한국정치사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4) 김운태, 『한국 정치론』, 박영사, 1994, p.416.
그의 리더십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하면서도 권력의 도덕성을 지키는데 실패했다는데 있다. 그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 아래 사회악을 제거하고 기성 정치인들을 규제함으로써 적지 않은 희생자와 정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 그 자신과 친인척이 부정부패 혐의로 지탄받고 처벌받아야 했다. 그는 막대한 정치자금을 마련하여 선거운동 지원 등 정치목적으로 사용했고 그것은 과거부터 있어 온 관행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같은 관행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후임자에 의한 정치보복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했고 자기 주변을 철저히 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5) 그의 비자금 문제는 ‘5공 비리’의 상징처럼 됨으로써 능률적이며 열심히 일한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5)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부정부패사건 규모에 비해서 전두환의 친인척의 비리는 실제로 별것 아니라는 것은 뒤에 밝혀질 것이다.
늦게나마 전두환도 제5공화국 헌법이 변화된 여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사회발전의 수준에 맞게 전면적인 민주화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1987년 여름 대통령 직접선거를 비롯한 민주화 조치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전면 수용했다. 그의 임기가 끝난 즈음 한국은 명실 공히 완전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야당과 반대세력의 개헌요구에 대한 그의 수용은 과감한 결단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한국정치발전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의 민주화는 국가발전의 ‘성공으로 인한 위기’에서 촉발되었으며 그것은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의 몰락에서 보듯이 ‘실패로 인한 위기’에서 비롯된 민주화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6)
6) Hyug Baeg Im, "New Democracy and Structural Economic Adjustment," in Doh Chull Shin, Myeong Han Zoh & Myung Chey, eds., Korea in the Global Wave of Democratization (Seoul Nationla University Press, 1994), pp. 123-136.
전두환은 어떤 점에서 국가건설에 기여했는가? 한마디로 말해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가 미완성으로 남긴 ‘한강의 기적’을 완성시켰다는 데 있다. 그의 확고한 경제안정과 경제개혁 정책으로 한국은 선진국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세계 제12위의 무역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경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북한을 크게 압도하게 되었다. 전두환 정부가 거국적으로 추진한, 올림픽 준비를 위한 국가 발전 노력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국가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업적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의 실패 또한 없지 않았다. 정권의 출범과정과 전두환 정부 7년 중 과오와 실책이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기여한바 컸다고 본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누구보다도 인기가 없는 대통령이었지만, 후임 대통령들이 연이어 국민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개선되었고 특히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크게 향상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10․26사태 이후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국가발전을 이룩한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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