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 장군 별세에 부처 - '5 16'때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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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피터 작성일12-08-10 10:59 조회3,970회 댓글6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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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군의 별세에 부쳐 - ‘5 16’때의 미스터리’
- 5 16 역사에서의 가정 (假定) –
김피터 박사
끊임없이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때 격동기를 만나면, 요란한 굉음(轟音)을 내며 정신 없이 빠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1961년 5월의 달,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숨가쁘게 돌게 했던 주인공 중 하나인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이 최근 (8월 3일) 플로리다의 자택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리더쉽과 친화력,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6 25 전쟁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특히 5 16때의 그의 역할 등으로 인해, 우리 세대들에게는 오래 기억되어질 고인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비는 바이다.
장도영은 한마디로, 불운한 시대를 살았지만, 역사의 소용도리를 헤쳐나간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2차대전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졸병으로 중국대륙에서 복무하다가 장교가 되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건군에 참가, 국군 장교가 되었고, 고속 승진하여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별을 달았다. 그리고 그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1961년, 2월, 육군 참모총장의 자리에 앉으므로, 3개월 뒤에 일어난 박정희 소장의 ‘5,16군사혁명’ 의 소용도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군사혁명 위원회 의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국방장관’, ‘내각 수반’ 등의 어마어마한 감투들을 쓰게 되지만, 그것들은 불과 47일만에 날라가 버리고 만다. 곧이어 ‘반혁명 사건’으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형 면제로 출감된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때 만 39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서, 박사학위(정치학, 미시간대학교)를 취득하고, 미국 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하는 등, 그야말로 ‘7전8기’적 일생을 살았다.
그런데 ‘5 16’때의 장동영 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몇가지 이해되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성립될수 없지만, 장도영 장군이 1961년, ‘5 16 군사혁명’때, 그 ‘미스터리’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 ‘만일’의 ‘가정’을 실행에 옮겼었더라면, ‘5,16 혁명’은 실패되었거나, 또는 역사의 방향이 다른 길로 달음질치게 되었을 것이다.
첫째로, ‘5 16’ 발생 전에, 당시 장면정부나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박정희 장군의 ‘구데타’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 왔었다. 장도영 자신은 그것을 부인하고 있으나, 장면 총리가 그를 불러 박정희 일당의 구데타 정보에 대해 물어본적이 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도 말하고 있다. 또한 미 CIA 한국 책임자도 구데타 정보에 대해 장 총장과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심지여 박정희 측에서는 ‘혁명 계획서’를 사전에 장총장에게 서면 보고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장도영 총장은 그런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는데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사하지 않았다. 그런 제보를 하는 부하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가저 오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일단 혐의자에 대한 조사를 하면 증거가 나올수 있을텐데, 대단히 이상하지 않은가 ‘만일’ 장 총장이 그때 그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그래서 사전에 박정희와 장군과 그 동조세력을 체포 조사했었더라면, 5 16은 일어나지도 못했을것이다.
둘째로, 5월 15일 저녁에, 구체적인 ‘반란군’(장총장의 표현) 출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장총장은 그 중요한 서울의 남쪽 관문에 불과 50여명의 경무장한 헌병들을 배치시켰다. 이것도 하나의 미스터리이다. 물론 장총장은 그때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것뿐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대 육군의 수장인 참모총장이 극단의 비상조치를 취했다면 얼마던지 더 강력한 병력이나 화력을 그곳에 배치시킬수도 있었을것이다. 만일 그때 장총장이 그 한강교 지역에 적어도 1개 대대 이상의 병력이라도, 또 동원할수 있는 중화기등을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516’은 성공되지 못했을것이다.
장도영 총장이 구체적인 ‘반란군 부대’의 출동 정보를 보고받은 것은, 15일 저녁, ‘은성’이라는 요정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방첩부대로 부터였다. 그는 즉시 ‘506 서울지구 방첩대’로 가서, 30사단, 공수부대 등, 모든 출동 예정 부대에 직접 전화를 하여, 출동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김포반도 서부전선의 해병대의 출동은 그때는 정보가 없었다. 나중에 해병대 출동정보가 들어왔지만, 육군 총장으로서 해병부대에 직접 지시를 내릴수도 없었다.
16일, 새벽 3시경, 김포반도에서 떠난 해병 혁명부대가 한강다리에 도착했다. 바리케이트 등으로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던 ‘헌병’들과 교전끝에, 일부 부상자를 내고, 저지선을 돌파한후 해병부대는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그런데 그때 해병 출동부대의 병력은 불과 약 1천여명에 불과 했다. 만일 장총장이 어떻게 해서라도 한강다리 방어선을 강화해서 사전에 해병부대의 서울 진입을 차단시켰다면, 그 뒤를 따라오던 공수부대도 저지당했을 것이고, 결국 ‘5 16 거사’는 아마도 실패되었을 것이다. 장총장 자신도, 5 16은 오직 ‘해병대’ 때문에 저지되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6군단 포병부대가 거의 같은 시각, 육본에 도착했었지만, 한강 쪽이 저지되었다면 장총장의 명에 의해 포병부대는 원대복귀 되었을것이다.
세번째의 미스터리는, 장총장은 역전의 용사이고, 대 육군의 수장인데, 여러 경로를 통해서 ‘구테타’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전혀 이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는것이다. 군 작전은 공격도 있지만 사전대비, 방어체계가 있지 않은가?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다. 대구의 모 중국집에서 박정희 소장등이 구데타 모의를 했고, 거사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들어왔는데도, 장총장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사전에 구데타 저지 작전계획 내지 ‘저지 방어군’ 부대 준비라도 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15일 저녁, ‘구데타 군’ 부대 출동 정보를 받고, 장총장이 취한 행동도 그렇다. 그가 만일 즉시, 총장의 권한으로, 또 국방장관과 협력하여, 전군 ‘비상령’을 선포하고, 그의 지휘하에서, 가능한 전 지휘체계, 정보, 방첩, 헌병부대 등을 총 동원하여, 박정희소장과 그의 동조자들에 대한 체포 작전에 나섰더라면, 이미 탄로가 난 ‘5 16’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장총장은 다만 혼자서 출동부대에 전화하여 ‘출동하지말라’는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 좀 이해가 안되는 ‘육군 최고 지휘관’의 태도였다.
넷째로, 16일 아침, 당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갖고있는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구데타 출동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강제진압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또 가장 병력이 많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도, 일선 부대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구데타 군을 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만일 이때 장총장이 매그루더 사령관의 지휘아래 미군 및 이한림의 1군 병력중 1부를 서울에 신속히 투입하여, 즉각적인 구데타 진압작전이나 혹은 구데타군을 포위 압박하는 작전을 펼첬다면, 5 16은 실패로 돌아갔을것이다.
그때 박정희소장 및 혁명군 측은 계속 장총장을 자기네 편에 서도록 설득 및 압박을 가했다. 혁명군 최고 지휘관으로 모시겠다고 설득하였다. 이런 중요한 기로점에서, 처음 장도영 총장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좀 우왕좌왕 했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만일 장총장이 이때 막강한 군 작전 파워를 갖고 있는 매그루더 사령관이나 또 이한림 1군 사령관과 손을 잡았다면, 아마도, 어느정도 유혈 충돌은 불가피했을지 모르지만, 한국의 역사는 달라ㅤㅈㅓㅆ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같은 국군끼리의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주도하에, 이 ‘사태를 빠른 시일내에 수습’하고, 군의 엄격한 감시하에 선거를 통한 참신한 정부를 세운다는 명분을 가지고, 고민 끝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는 결단을 함으로, ‘5 16 군사혁명’을 성공시키도록 하였다. 일부 5 16 연구가들은, 5 16때 보였던 장총장의 처신을 ‘양다리 걸치기였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후, 장도영씨는 미국에서 쓴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그때 박정희의 손을 들어준데 대하여, ‘나는 정변 주체들의 범행을 용납한 죄를 범했다…..대한민국과 국민에게 죄를 범했다.’라고 진술할 정도로, 박정희와 ‘5 16 군사 구데타’를 맹 공격하며, 자기의 5 16때의 처신을 깊이 후회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금 한국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들, 심지어 일부 여당 후보들조차 ‘5 16’을 단순히 ‘군사 구데타’라고 폄하하고 있고,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 의원은 ‘구국의 혁명’ 혹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함으로, ‘역사 인식’시비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물론, ‘5 16’을 단순히 헌정질서를 유린한 ‘군사 구데타’라고 인식한다면, 장도영씨는 역사의 한 죄인이 되지만, ‘5 16’이 ‘구국의 혁명’으로 규정된다면 그는 그 ‘혁명’을 성공시키게 한 1등 공신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의원이 말한대로, 지금 한국 국민의 ‘반 이상’이 박근혜의 ‘5,16’에 대한 발언에 대하여 찬성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도영 장군이 (그는 이미 고인이되었지만) ‘5 16 군사혁명’에 협조한 일에 대하여 그렇게 깊은 ‘회한’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5 16’은 누가 뭐래도 ‘구국 혁명’이다. 오늘날의 2010년대의 관점으로, 1960년대의 상황을 재단하지 말라. 미국에서는 ‘총을 쏴 사람을 죽여도 그 상황이 ‘정당방위’등 ‘불가피한 상황인 경우는 ‘살인죄’를 적용 안 한다. 마찬가지로 5 16은, 구데타적 방법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필요한 ‘구국의 혁명’이었음으로, 단순히 ‘구데타’라고 폄하해서는 안된다.
저 5 16혁명으로 시작된 ‘한강의 기적’을 통해서 국민소득 백 딸러 미만의 한국이 오늘의 세계 경제 10위권의 ‘잘사는 나라’로 발전했고, 또 민주화도 이룩된 것을 부인하는자들은 누구인가? 지도자들은 바른 역사관을 갖기를 바란다.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세우고, 그래서 5월 16일이 ‘국경일’이 되고, 세종로에 박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지고, 온 국민이 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기를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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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김 피터】박사님! '장 도영'장군님께서 영면하셨군요. 저는 '앵삼이' IMF 사태 초래 이후 TV를, '금 뒈쥬ㅣㅇ'롬의 전북 군산항 창녀촌 화재로 백주에 쇠창살에 갇혀 살려달라고 2층에서 비명지르다가 죽어갔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서부터는 '이게 언론이 그토록 지지하던 인이 통수권자가되어 다스리는 나라인가?' 싶어서 신문마저도 일절 끊고 있읍니다! ,,,.
'장 도영'장군님께서 이역 만리 미국에서 작고하셨다니 마음이 쓰립니다. 저는 '장 도영'장군님을 서울 동작동에 모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누가 뭐라고하던 저는 '장 도영'장군님께서는 일단 1961.5.16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시키신 유공자이시기에요! ,,. 그분이 아니었다면 '박'통의 1961.5.16은 반드시 실패했을 터이니깐요! ,,. 요즘 며칠간 바빠서 소식을 접하지 못하다가 【김 피터】박사님의 기고문을 보고서야 알게되었으니,,.
제거 고1이던 1961.5.16은 강원도 원주에서 맞이했는데 아침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침 밥상에 마주 앉아 "'박 정희'가 빨갱이래,,." 라는 소리를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걸 듣고는 옆방에서 밥 먹으려고 들어가려다가 숨이 턱 막하는 느낌과 함께 '이거 큰 일났구나!' 속으로 생각하는데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아버지가 이어서 하는 말이, "그런데 '장 도영'은 이북 출신이라는데 그런 사람이 빨갱이와 내통치야 않았겠지?!" 하는 말에 비로서 맘이 조금 놓였읍니다. ,,. 내가 방에 책가방들고 들어가닌 대화는 중단되고,,.
하여간 이북에서 목숨 걸고 삼팔선을 넘어 남하해 온 분이 군에 투신, 육군총장까지 오른 분이 빨갱이 이리라는 생각은 당시로는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歸無 假說(귀무가설, Null Hypothesis)' 적인 판단.주장.설임은 내종에 판명되었죠! ,,. '박'통도 당시로는 자신을 믿고 키워주던 '장 도영' 총장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거사가 불가능하리라는 판단을 했을 것임에 확연! ,,.
내종에는 '박'통과 '장 도영'과는 도무지 혁명에 관한 종결 문제 및 정국 수습 장기 방책에 관해 너무니도 큰 괴리가 있었기에 함께 처신하기에는 불가능! ,,.
하여간, 민주당은 빨갱이黨이었으므로 군부 창설 원로이시던 육.해.공군.해병대 헌병 총사령관 '원 용덕' 중장님을 1950.6.25 동란 기간 중 빨갱이 고등 간첩을 헌병이 수사 도중 죽여버린 사건을 트집 잡혀, 민주당 집권 후, 살인 혐의로 군법회의에 억지 기소, '장'총장이 재판장으로 임명! ,,. 재판을 진행키기는 하되 흐지부지성 시간만 질질 끌다가 급기야 5.16 발발로,,.
각설코요; '장 도영'총장님의 유해는 반드시 고국인 대한민국 서울 동작동 국군 모이에 안장시켜야 함이 마땅타고 사료되어 구구한 말을 했읍니다. ,,. 소식 주심에 거듭 고맙읍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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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장 도영'총장님께서 제6사단장 시절에 치루신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전투'는 산악 방어 교리로 채택되어 미군 교리사령부에서 산악 방어 교리로 적용 중이며, 육군 고등군사반 OAC 과정에서는 '방어시 보병 대대'라는 과목이 끝나면, '定常 防禦(정상 방어)'에 1가지가 더 추가되여; '하천선 방어' 아니면, '후사면 방어', 또는 '산악 방어'의 3가지 가온 데 1이 선택되어져; 2가지가 시험에 나오죠. '산악 방어'는 적의 공격 접근로를 도식할 때 '해바라기{Sun Flower}' 처럼 도식되어진다고 해서 '해바라기'가 요번에 출제될 가능성이 많다'는 둥,
'정감록'처럼 예언하면서 시험 대비하던 대위 때 생각이 납니다. 북한강 ' 破虜湖(파로호)' 전투는 제6사단이 중공군 똥 뙤 虜(로) 롬들 6개 사단을, '경기도 양평 용문산 ~ 강원도 춘천 ~ 강원도 화천'을 경유하면서, 쓸어버린 전무 후무한 전공! '파로호' 전적비가 지금도 북한강 구만리 발전소 '破虜湖(파로호)' 위 도로 변에 '이 승만'대통령 친필로 陰刻(음각)되어진 게 설치! ,,.
餘 不備 禮. 재 悤悤.
김피터님의 댓글
김피터 작성일
inf247661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의 장도영장군, 국립묘지에 모셔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런데 L.A. 에 있는 고인의 친족들이, L. A. 에 있는 ROREST LAWN 묘소에 모시기로 하여, 그것도 그저 가족장으로 조용히 하는것 같습니다. (토요일)
저도 관계된 분에게, 국립묘지로 모시던지, 또 L.A. 에서 모시더라도 PUBLIC으로 널리 광고하여 추도식이라도 하는것이 좋지 않겠는냐고 말씀드렸는데, 직계 가족들이 조용히 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미, 전에 기고 했습니다만, 5 16때 해병대 소대장으로 한강 저지선을 돌파하고 서울에 입성했던 혁명군의 한사람이였습니다.
비록 말단 장교로 참가했지만, 5 16은 구국의 혁명이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고, 또한 제자신이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데 대하여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댓글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하기님의 댓글
하기 작성일두분글 잘읽었습니다....저는 선생님들의 한참 후배가 되겠군요...박통이 대통취임 했던해에 태어낫으니까요... 요즘 박근혜님의 대권도전에 악재가 많이 나오므로해서 그녀의 대권행보가 심이 우려됩니다...반대세력들의 저항이 만만치않습니다...국운이 다할려는건지?.......순국선열의 보살핌과 현재 생존하고잇는 애국세력들이 합심해야 한다고 보고있습니다..그래야 뒤 틀어졌던 역사를 바로세우고 다시 이나라 대한민국이 다시한번의중흥기를 맞이 할수있을 테니까요....근혜의 좌경화?....우려할 문제는아니라봅니다...호랑이가 강아지를 낳을수는 없으니까요.....많은 격려와..조언부탁합니다..저는 음지에서 응원하는 필부에 불과합니다... 두분의 건승을빕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하기】님! '장 도영' 총장님께서 동란 기간 중에 이루신 전공은 혁혁합니다! 최초 제6사단 사단장을 복무하시면서 제6사단이 강원도 화천 '사창리'에서 참패하고 경기도 양평 용문까지 후퇴했다가; '용문산 방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반격; 경기도 가평 ~ 강원도 춘천 ~ 강원도 화천 파로호까지! 무려 6개의 중공군을 궤멸시킨 혁혁한 전공! ,,.
아군 제6사단의 그 전투 이후로 중공군들은 제6사단과는 아예 접촉을 극력 회피, 아군 제6사단과 접촉케 되면 스스로 전선을 이탈, 맡았던 정면을 북괴군에게 인계하고, 멀리 타 사단 지역으로 이동해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53.7.27 휴전 협정 체결까지 제6사단은 단 1번도 중공군과 전투를 치루지 않.못했다 합니다. 따라서, 중공군들이 제6사단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 ,,.
각설코요; '장 도영'장군님을 고국에 모셔와 정중히 서울 동작동에 모심이 시급하며 마땅한 조치로 봅니다. 신문 여론은 너무 무심합니다. 그리고 국방부 장관과 보훈처 장관은 뭘하며 재향군인회에서는 뭘하고 있는가? ,,. 빠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