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북괴군의 서울에서의 3일 지체가 한국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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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피터 작성일12-06-26 08:32 조회3,40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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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북괴군은 왜 서울 에서 3일을 지체했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시작한 북의 인민군은, 28일 새벽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물론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고 해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한강을 넘어 남으로 진격해야 하는데, 그들은 서울 진입 후 3일간 지체했었다.
이 북괴군의 서울에서 3일간 머물러 있었던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설자는 이유를 알수없는 ‘미스터리’라고 표현하였다.
6,25당시 국군 지휘관이었던 역전의 노병, 백선엽장군도, 그의 회고록에서 그 이유를 “지금도 자세히 알수 없다. 단지
추측으로는 ‘도시병’에 걸린 것으로 짐작할수 있지 않을까?’’ (내가겪은 6,25와 대한민국, 제127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신무장이 철저한 인민군들이 비록 대도시 서울에 들어 왔다고 해도, '도시병'같은것에 걸리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대체로, 그 이유에 대하여 3가지 ‘설’이 있다.
(1)’제한 전쟁설’: 김일성이 본래 처음 계획한 것은 ‘서울을 점령한후, 당시의 국회의원들을 소집해 이승만 정부를 퇴출시키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3일간 지체하며 본래의 계획을 수행하려 했으나, 계획이 실패하자 남한전체를 점령하는 확전을 감행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6,25 전쟁의 전략을 수립했다는 옛 소련의 문서나 증언에는 없는 주장이므로 신빙성이 없다.
(2)’박헌영’의 ‘남한 내 공산주의 분자들의 민중봉기 주장’을 믿고, 3일간 기다리며, 지체했다는 설이다. 이 주장을 뒷바침 할만한 증거와 ‘증언’들도 다수 있으므로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 (서울 진입때, 최초로 미아리고개를 넘었다는 북한군 탱크 선봉 중대장이었던 인민군 장교가, 그후 귀순하여, 각 교회를 다니며 그 사실을 증언하기도 했다.)
(3)’한강 도하장비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왜 한강 도하 장비를 준비하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부분이다.
(4)‘춘천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적 요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6,25 전날 이상하게도 육군본부는 그 동안 전군에 발령되어 있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었다. 그러나 춘천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 6사단은 ‘경계령’을 해제하지 않고, (장병의 휴가나 외출을 금하며) 비상경계태세를 유지하므로 효과적으로 초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따라서 서울 진주 부대는 남진(南進) 전선(戰線)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3일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가장 많은 설득력을 얻는 설이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는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당사자 김일성만이 정확하게 알 것이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인민군이 서울에 3일간 지체하고 있었것에 대하여 ‘뼈아픈 전략적 패착’이라는 반성과 후회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을뿐이다.
어떤 이유였건, 이 ‘서울 3일간 지체’는, 대한민국 측에게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시간 벌기’를 제공해주었다. 우선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인 김홍일 장군으로 하여금 국군 후퇴부대와 패잔병들을 규합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여 한강 남쪽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도록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 김홍일 장군의 한강방어전으로 늦추어진 5-6일이 그후 낙동강 반격의 시간을 끌어주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미 지상군부대인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교전한 것이 7월 5일이었으므로, 만일 인민군이 서울에서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남진을 계속했다면, 미군의 한반도 투입에도 많은 지장과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서울에서의 지체 3일’, 그 이유는 백선엽장군의 말대로 지금도 ‘자세히 알수 없는 미스터리’이지만, 그 3일이, 망하기 직전의 대한민국을 기사회생케한 중요한 시간들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우연히 된 일일까? 나는 이것도 ‘6,25전쟁에서 있었던 ‘기적’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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