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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득(金文得) 이등중사의 백마고지 전투 영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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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東素河 작성일11-04-20 12:08 조회9,67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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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득(金文得) 이등중사의 백마고지 전투 영웅담

1. 김문득 이등중사 인적사항

○ 주소 :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덕법마을 1344 - 3 ○ 나이 : 84세, 무진 ○ 군별 : 육군 ○ 군번 : 0664172 ○ 계급 : 이등중사 ○ 전역 : 1953년 4월 봄 ○ 훈장수여시 소속 : 육군 제9사단 제29연대 ○ 본인증언(소속) : 9사단 30연대 2대대 7중대 ○ 훈장수상 일자 : 1954년 9월 30일 ○ “무공훈장증서” 발행 일자 : 1998년 6월 25일

2011년 4월 12일

나는 마을탐방을 위해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덕법마을을 찾았다. 탐방할 때마다 마을 사람을 만나 사람사는 이야기를 하고, “동남권(영남권)신공항” 백지화가 아닌, 밀양에 신공항 건설 각오를 새롭게 하고 “밀양에 신공항을 건설해야 하는데 모두가 힘을 모으자”고 강조한다. 공항건설 당위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마을을 둘러보다 산쪽을 바라보니 덕법마을 뒷산 아래에 재실이 하나 보였다. 자전거를 몰고 마을 골목길을 가다가 어떤 집앞에 “거대한 돌비석이 4개”나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한적한 농촌마을 허름한 농가주택 대문 앞 공간에 거대한 돌비석이 한 개도 아닌, 네 개가 서 있는 것에 정말로 놀랐다.

대체 저 돌비석이 무엇일까? 다가가서 돌에 새겨진 글귀를 보니.. 국가로부터 유공자로 훈장을 2개나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새겨진 글의 문장을 보니 연로한 어떤 분이 자의(自意)로 글을 새긴 것 같았다. 즉, 단어와 문구의 표현 방법과 맞춤법 등이 요즘 세대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나이 많은 분이 국가에서 유공자로 훈장을 받았다는 것을 보니, 6.25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내용일 것이라는 것이 머리에 선뜻 떠올랐다. 대문 앞에는 노인 한 분이 남루한 작업복에 웅크려 불편한 몸으로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다가가서

- 어르신 이 집 주인 되십니까?
: 그렇습니다.

- 이 돌비문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세웠습니까?
: 내가 6.25 전쟁 때 공을 세워서 이렇게 세웠습니다.

- 그 내용을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 그러면 우리집 방안으로 좀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다.

- (일정이 급해서) 아닙니다, 여기서 그냥 이야기 해 주시면 됩니다.
: 아닙니다. 내가 몸이 불편해서 여기에 그냥 서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방안으로 들어가서 앉아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내가 전쟁 때 일을 간증을 하겠습니다.

- 어르신 혹시 교회에 다니십니까?
: 아닙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방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가 보니 노인이 사는 전형적인 시골방 모습이었습니다. 벽에는 액자가 몇 개 걸려 있었고, 자세히 보니 김문득 노인께서 6.25한국전쟁 때 무공훈장을 받은 훈장증 액자와 당시 군복에 훈장 2개가 걸려 있는 사진이 있었다.

먹지 않으려는 나에게 노인께서 음료수 한 개를 기어이 내놓으셨다. 마시지 않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 마시면서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먼저 공책을 한 권 주시면서 간증하시는 것을 모두 적어라고 하셨다. 나는 작은 수첩을 항상 휴대하고 있으므로 작은 수첩을 내어 근 1시간 동안 어르신의 백마고지전투 영웅담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모두 적었다. 더 자세한 것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서 하시는 말씀만 듣고 기록했다.

어르신은 한창 젊은 나이에 6.25한국전쟁에 참전하셔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 조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우신 것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으로, 엄청난 자랑으로 여기고 계셨고, 또 이러한 조국을 위한 백마고지전투 영웅담을 여러 사람이 아니, 전 국민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하시는 말씀 마디마디에 진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즉, 노인께서 국가로부터 무엇을 바래서 조국을 위한 백마고지전투 영웅담을 전파하려는 것이 결코 아닌 진정한 조국 사랑에서 전투에 참여한 것을 모두가 진심으로 알아주었으면 하는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많이 변하여 노인분의 그런 조국을 위한 목숨을 건 전쟁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노인 분들의 피끓는 젊은 날의 조국애가 없었다면 우리의 현재 세대의 행복과 부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거대한 돌비석 4개는 가난한 노인분에게는 일생의 전 재산으로 보였다. 자녀분이 객지에서 살고 있다 하셨으나 가족 어느 누구로부터도 돌비문을 세우는데 지원을 받은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는 돌비문의 문구로 보아서 자녀분이 돌비문 문구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현재 세대에 어울리지 않는 문구와 문장 작성법”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구와 문장은 그 당시 노인 세대에서는 오리지날 문장 이었다. 즉, 돌비문을 새긴 석공은 김문득 노인이 주는 문구 그대로 글자를 돌에 새긴 것으로 보였다. 돌비문을 세우는데 들인 돈은 적어도 몇천만원 들었을 것으로 보였다.

이 돈으로 노인은 맛있는 것 사 먹고 병원비 쓰고 했으면 현실적으로 더 유용했을 것 같았으나 노인은 그가 젊음을 다 바쳐 조국을 풍전등화로부터 구한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일이 정말로 자랑스러워 만인에게 알리고 싶어 기어이 이 돌비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김문득 노병은 84세로 밀양에서도 오지인 청도면의 농촌마을인 덕법에 살고 있었으며 연세만큼이나 연로하시고, 무릎 관절염으로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매우 고통스러운 몸이었으며 가난한 살림으로 쪼달리고 있는 듯한 형편이었습니다. 가족 분을 물어보니 할머니께서도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참고로, 이 글을 작성하는 데, 김문득 노인의 염원인 “국가에 충성한 그의 백마고지 영웅담을 이 세상에 좀 더 많이 전파”하기 위해서 호칭을 “김문득 노병”이라고 합니다.

김문득 노병은 나이 23세가 되던 1950년(단기4283년)에 북한 공산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쳐 내려와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되었을 때인 1950년 9월경에 징집영장을 받고 육군에 입대를 했다. 김 노병은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철원의 육군 제9사단에 배치를 받았다.

북한 공산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미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미군 등 국제연합군과 아군의 합동작전으로 아군측은 압록강 전선까지 북한 공산군을 격퇴시켜 조국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 당시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우리 아군측은 다시 수도서울을 적군의 수중에 남겨두고 경기도 평택 이남까지 퇴각했다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북한공산군과 아군측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전쟁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중에 휴전협상이 전개되려 하던 때여서 북한 공산군측과 아군측은 한 치의 땅도 더 점령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그러한 전선의 전투 중에서도 백마고지전투는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김문득 노병으로부터 방안에서 백마고지전투 이야기를 대강 듣고 난후(시간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더 자세하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돌비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자고 권해드렸더니, 쾌히 승낙을 하셨다

김문득 노병은 “사진을 찍을려면 양복을 갈아 입어야 한다”고 하셨다. 헤어진 작업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 입어셨다. 양복이래야 부잣집 사람들 잡업복보다 못한 오래된 옷이었다. 몸이 불편하니 행동도 느리고 옷을 갈아 입어시는 데도 매우 불편했다

젊은 날 60여년 전 백마고지전투 당시 훈장을 받았을 때 입은 군복 정장의 사진액자를 안고 사진을 찍어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드니, 그렇게 하셨다. 사진속의 김문득 이등중사의 모습은 혈기왕성한 대한남아 피끓는 청년이었다.

6.25한국전쟁 백마고지전투의 전사(戰史) 기록들에 의하면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6일 밤 7시15분에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 예하 제340연대의 2개 대대가 395고지(백마고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당시 국군 제9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395고지는 철원 효성산 기슭에 395m 밖에 되지 않는 이름 없는 작은 고지였다. 역곡천 계곡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철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 있었다. 미 제8군은 이 길을 주보급로로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됐다. 때문에 국군 제9사단은 제30연대 2개 대대를 배치하는 등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전투는 15일까지 진행된다.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고지를 지켜냈다. 10일간 수십 차례의 백병전이 있었고 일곱 번이나 고지를 뺏고 빼앗는 싸움이 있었다. 양측 모두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했다.

그 중에서 전사자 8,234명을 비롯해 1만4389명의 병력 손실이 있었다. 또 아군도 3,416명을 잃었다. 전투 간 발사된 포탄 수만 보더라도 치열한 전투 양상을 알 수 있다. 중공군은 5만 5000발, 아군은 21만 9,954발을 쏟아 부었다. 미 제5공군과 동해의 함재기 편대가 754회 출격해 중공군 보병을 무력화시켰다.

이 작은 고지에 이토록 많은 포탄이 퍼부어진 것이다. 이로써 395고지는 벗겨질 대로 벗겨져 하얀 말처럼 보인다고 해서 백마고지라고 불리게 됐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9일 동안에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에서 아군과 미군이 북한 공산군을 조력하는 중공군과의 전투였으며,

결과는 국군과 미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으나, 피아간에 참담한 피해가 있었으며 아군측 전투 지휘관은 제9사단장 김종오 소장 휘하에 제30보병연대장 임익순 대령, 제1대대장 김영선과 제29보병연대장 김봉철 대령, 제1대대장 이대철 소령, 제2대대장 김경진 소령 제28보병연대장 이주일 대령, 제3대대 최창용 중령 제51보병연대장 전부일 대령이었으며, 적군의 지휘관은 중공군 대장 “장융후이”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 29, 30연대 병력 2만명과 제51, 52, 53 포병대대, 제53전차중대가 참전했으며 미군은 제213자주포병대대, 제955중포병대대, 제73전차대대가 참전했으며 중공군은 제38군단 6개 연대 지원부대 병력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으로 아군에 대항했으며

백마고지전투로 아군측은 4,000명이 사상되었으며, 당시 중공군측은 9,400 명을 사상시켰다고 주장했고, 북한 공산군측(중공군측)은 6,700명이 사상되었으며 당시 남한측 추측으로는 중공군 14,322명 사상되었다고 전사(戰史)는 기록하고 있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10일동안에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였으나 양측 군사상의 피해는 엄청났다.

백마고지전투의 배경은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로서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아군 제9보병사단은 강원도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 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삼각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이때 아군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중공군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아군 9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고,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 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위와 같이 피아는 “철원-금화-평강의 철의삼각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군사.지정학적인 중요 고지인 백마고지(395고지)를 사수하기 위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즉, 1952년 10월 6일 저녁 중국 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고, 아군 제3대대가 중공군을 395고지로 맹렬히 돌격하고, 또 아군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군대는 3차례나 전투를 치러 중공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의 전초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고지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의 걸친 전투 끝에 395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952년 10월 8일 중공군은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고지 정상을 빼앗겼으나, 아군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며, 아군인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952년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아군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성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952년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아군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952년 10월 11일 오전 아군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아군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아군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내 이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이 백마고지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고, 미 공군이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다. 특히 이 전투로 UN이 휴전협상에서 우위에 서게 된다.

당시 회담에서는 포로 교환을 놓고 대립이 진행중이었는데, 전선 상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서면서 정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제9보병사단은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현재 차량화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다시 "백마고지전투 영웅 김문득 노병"의 이야기로 이어간다

당시(0000년)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아군에게 불리해지고 있었고 북한군을 무찔러서 조국을 지키려면 북한측인 중공군의 정보수집이 제일 중요했다. 우리 9사단 예하 부대에서는 군사정보수집 목적으로 중공군 적진 침투요원 선발에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가민히 생각해 보니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고, 전쟁 중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니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길을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중공군 적진에 침투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여 아군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중공군 적진 침투병으로 자원을 했다.

즉, 조국을 위해 한 번 가서 전공을 세워보려고 굳은 각오를 했다. 수류탄 3발, 권총 1정 휴대하고 중공군의 군사비밀을 얻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적진에 침투했다. 당시 우리 사단 등에서 6명이 침투요원으로 결정되어 각각 적진에 침투했다.

때는 1952년 양력 9월경이었다. 풀속에 숨어서 숨을 죽이면서 활동하면서 군사비밀을 알려면 적을 생포해야 했다. 나는 혼자이고 적군이 여러 명이라서 생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3일동안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매복을 하면서 기회를 보았다

4일째 되던 날, 중공군의 생포가 어려워져서 철수할려고 생각했는데, 각오가 바뀌었다. 즉, “나는 적진에서 죽거나, 아니면 철수하더라도 전투에서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드시 적군을 생포해서 귀대하리라 마음을 굳혔다”

순간 바로 눈 앞에 건장한 적군 1명이 총을 벗어놓고 소변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함을 못 지르게 하고, 실신을 시키기 위해 뒤에서 비호같이 달려들어 재빨리 적의 목을 조우고, 10분 정도 있으니까 적은 얼굴색이 변했고, 목이 쳐졌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권총으로 생포한 적을 위협하면서 살펴보니까 보니까, 생포한 적군은 중공군이었다.

나는 적과 말이 안통하니까, 생포한 중공군에게 몸짓으로 남으로 가자고 했다. 사로잡힌 적은 순순히 나의 명령에 따랐다. 생포한 중공군을 아군측 중대본부로 데려왔다. 중대본부에서는 중공군 생포 사실을 대대본부를 거쳐서 연대본부, 사단으로 보고를 했다 연대장이 급히 내려왔다.

중대에서는 적군을 생포한 나를 특별대우를 했다. 맛있는 별식까지 챙겨주었고 군복과 군장 일체를 새 것으로 교환해 주었고 당분간 보초도 면제해 주었다. 이렇게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나는 1주일 정도를 중대에서 보냈다. 일주일 후에 새 군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짚차를 타고 9사단으로 인솔되어 갔다.

사단에 가 보니 나처럼 중공군 적진에 침투하여 적군을 생포해 온 사람 몇 명이 먼저 와 있었다. 사단 군악대가 승전 축하 연주를 하고, 사단 장병들이 우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도열해 있었다. 사단장은 중공군 적진에서 적을 생포해 온 나를 포함한 동료들에게 등을 두드려 주면서 위로하고, 극진히 환영해 주었고 보상금과 함께 15일간의 휴가를 보내준다 했다

이러한 우리들의 정보 수집전과 더불어 철원의 백마고지에는 계속해서 밤낮없이 10일간 전투가 벌어졌고 우리 9사단이 참전하여 연전연승을 했다. 이 전투에는 미군이 제주도에서 훈련받은 아군을 수송해 와서 전투에 참여케 했다. 연이어 적군과 치열한 전투가 또 벌어졌다. 나를 포함한 아군은 3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전투를 했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백마산고지에서 적군이 아군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슈류탄 공격을 하여 아군이 고지를 점령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부대에서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자진해서 소대장에게 건의하기를 “허리에 수류탄을 두르고 적이 있는 고지에 올라가서 적의 호속에 던져 넣으면 적군이 몰살할 것이라고 하며, 보내달라“고 했다

소대장이 “몇 명이 같이 가라”고 했으나, 아무도 갈려는 사람이 없어, 나 혼자 가기로 작정했다. 바로 적이 있는 고지의 앞쪽으로 올라가면 적군이 바로 내려다보고 있으므로 적을 속이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위험한 적진으로 침투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적의 호 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못 올라가서, 고지에 있는 적군이 내려다보고 나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적의 진지 쪽으로 기어올라 비호같이 적의 호(조그마한 구멍) 속에 수류탄 6발을 전부 까 넣었다. 슈류탄 굉음과 함께 적의 머리와 다리, 팔, 살점 등이 공중으로 솟구치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호속에 적군이 몇 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호 속에 들어 있었던 적군은 전멸했고, 나는 슈류탄 화력에 튀어오르는 흙속에 묻혀 의식을 잃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고지의 적군 호가 폭파되고 적군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대장과 중대장 등이 이제 적은 전멸했다고 생각하고 김문득 일병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서 고지로 올라갔다.

이 때 소대장과 중대장은 “김문득 일병이 2번이나 큰 공을 세웠으나 이제 죽고 없으니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면서 폭파된 중공군 호 진지인 고지로 올라갔다 한다. 소대장이 고지를 둘러보니 아래로 슈류탄을 던지면서 저항하고, 총을 수없이 발사하던 적들의 시체가 나뒹굴었고 적군의 호는 무참히 파괴되었으나 김문득 일병은 보이지 않았다.

적군의 폭파된 호 주변을 살피던 소대장의 눈에 흙속에 파묻히고, 발가락쪽 군화만 조금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야전삽으로 흙속을 파헤치니 김문득 일병이 흙속에 묻혀 있었다. 소대장 일원은 의식을 잃은 김문득 일병을 업고 내려왔다. 김문득 일병은 전방 중대 의무대에 실려 갔다가 연대 의무대로 응급치료를 받다가 다시 사단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서야 정신이 깨어났다.

이러한 김문득 중대의 연전전승으로 인하여 우리 9사단은 백마부대로 부대 명칭이 정해졌다. 철모에 사단 마크가 백마로 새겨졌다. 나(김문득 노병)는 백마고지전투 공로로 강원도의 안전한 한 부대에서 한 달간 휴식명령을 받아 1주일 정도 쉬고 있던 중에 인근 철의삼각지대인 강원도 금화의 오성산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군의 전세가 위급해지자. 오성산전투 지원요청이 우리부대로 왔다. 당시 내가 소속된 9사단 30연대 2대대 7중대가 최고의 전공을 세우고 있던 중이었다. 즉, 7중대의 전공이 인근 부대에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이는 김문득 일병의 목숨을 건 영웅적 전투 활동때문이었다.

오성산전투 부대에서 지원요청이 오자 상급부대에서는 “김문득 일병이 속한 7중대”가 제일 용감하고 전공이 혁혁하므로 내가 속한 우리 7중대를 오성산전투 지원부대로 차출되어 갔다. 미리 받아 두었던 휴식은 오성산전투 지원으로 로 취소되었다. 오성산 일대는 인민군과 중공군이 혼성되어 아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적군은 우리 부대(7중대)가 온다는 것을 미리 정보를 수집하여 마이크로 우리에게 선무전을 전개했다.

적군은 우리에게 마이크로  “9사단 7중대 중대원 너희들이 용감무상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너희들이 우리한테로 귀순하면 후방으로 데려가서 호의호식시켜주고 남한을 통일하면 고향으로 휴가도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들이 한 시라도 빨리 우리한테로 넘어 오너라" 라고 방송을 했고

우리들은 전투에 너무나 시달리고 또 인민군의 전술에 기가 죽기도 하면서 호 속에서 이틀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대소변도 호속에 해결을 하면서 적과 대치했다. 오성산전투 3일째 되는 밤 10시경에 중공군과 인민군이 아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60미리포로 사격을 해왔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은 육박전이 벌어졌다. 사격을 하는 도중에 팔에 힘이 자꾸 떨어지고 해서 팔을 만져보니 팔에 물이 흥건하고, 물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그게 물이 아니고, 적탄에 팔이 맞아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밤중이므로 피가 보이지 않았고, 팔에서 흐르던 액체가 물로 여겼던 것이었다.

이 밤중에 소대장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부축해 줄 사람이 아무도 사람도 없으니, 너 스스로 의무대로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밤중에 겨우 중대 의무대로 찾아서 기어가니 마침 경주 출신으로 아는 사람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농담삼아 “김문득 일병 너는 이제 100만원 벌었다. 병원가면 제대가 되니까 100만원 벌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했다.

김문득 노병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당시 100만원만 주면, 군 입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 그런 비리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팔에 심한 중상으로 인하여 사단 의무대로 후송되었고 다시 춘천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또 서울의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마지막으로 대구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6개월의 치료 끝에 26세가 되던 해인 1953년 봄인 4월경에 제대를 하여 고향 밀양으로 돌아왔다. 부상병으로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 온 김문득 노병은 농사를 천직으로 가난한 농민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이 나고 60년이 넘게 흘렀다.  가난의 멍에는 김문득 노병의 주변에서 일생을 괴롭혔고 병마로 평생을 시달려 왔다. 그러나 노병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조국을 구한 백마고지전투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내 몸이 언제 적의 총탄과 포탄에 없어질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조국을 위해 싸운 백마고지전투 영웅담을 그의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영웅담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노병은 살림의 큰 부분인 몇 천만원을 떼 내어 집 대문 앞에 돌비석을 세우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남들은, 이웃들은 마음속으로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그런 일을 한다” 라고 말들을 하기도 하겠지만.. 사선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온 노인에게는 가난의 어려운 굴레보다,

살아 돌아온 그 심정, 조국을 위해 적을 무찔렀던 백마고지의 영웅담을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가난의 굴레 속에 요즘 세상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잊혀진 전쟁인 “6.25 한국전쟁 백마고지전투 영웅담이 새겨진 돌비문"을 거금을 들여 고향집 대문 앞에 세웠다

자랑스러운 노병 김문득 이등중사! 님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북한에 점령당하지 않았고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없는 돈을 들여 거대한 돌비문을 세운 김문득 노병에게 우리는 용기를 북돋아 드리고, 존경을 해야 하며 “1950년 6.25 한국전쟁,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문득 노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김문득 노병의 돌비문에 새겨진 인생론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
단군 건국 정신과 인간 중시사상
대자연에 귀의하는 자연친화적 삶
국가에 대한 충성심 등입니다


김문득 노병의 집 앞에 세워진 거대한 돌비문

 

김문득 노병의 집

  


6.25 한국전쟁 백마고지 전투 무공훈장증

  


김문득 노병의 백마고지전투 전공과
인생론이 기록된 거대한 돌비문이 노병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 단군선조의 인간중시와 나라 세움을 믿고,
국가가 태평해야 하고, 대자연에 순응한다는 인생론을 펼치고 있다  


김문득 노병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이 거대한 돌비문을 만들었다
오른쪽에 있는 슬라브 집은 김문득 노병의 집이 아닌, 이웃집 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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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님의 댓글

애국자 작성일

영화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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