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 들 - 이래도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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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막사리 작성일10-09-14 04:07 조회5,4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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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정사회" 이런 말들이 요즈음 한국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시사 용어 같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꿈꾸어야하는 의의 나라, 정의의 나라, 공정사회의 나라.... 참 좋은 생각이고, 복된 말들이고, 아름다운 꿈입니다.
그러나,
말은 반지르하지만, 영글것이 영글지 못한 막 돼먹은 몰 인격자들이 그런 말들을 함부로 떠들어 대는 통에 점잖은 사자들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포효하고 있다는 것을 "떠드는 자들"은 인식하여야 합니다.
"공정사회" 의 성취는 "정의"혹은 "의" ("justice", 혹은 "righteousness")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 의미에 진정한 감동을 받을 때 비로소 조금씩 "되어지는" 것 이며, 거기에는 "삶"이 곁들여 질 때 참된 "사회"는 조금씩 이루어 지는 것일 것 입니다. 그 "삶"은 "행동"과 동행하는 것 임으로 공정사회는 "공정한 행동 공동체"여야만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로운 행위가 뒤 따르지 않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들은 효과없는 '그저 해 보는 소리' 일 뿐 입니다.
공정사회, 정의, 의라는 말들은 모두 "공의"적인 의미로, 그 기준이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의라는 개념입니다.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미국은 개척되었습니다. 미국의 헌법 (The Constitution)은 그러한 정신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는 신국을 원하는 바로서, 신정(Theocracy 하나님의 의가 나라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통치개념을 말 합니다. 사람들은 무요 공이요, 신의 의로운 말씀에 기초한 통치만이 미국을 살려나가는 공정사회의 의가 된다고 천명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된 존재로서, 조물하신 절대자의 창조주와 주 되심 (Creatorship, Lordship)을 높이는 신분일 뿐 입니다. 신을 바라보며 높여드리는 자들에게 번영과 치료와 행복을 주시마 하신 신의 약속, 그 분의 계약 (Promise, Covenant)을 신뢰하는 신 의지 사상에 철저하게 기인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의, 공의, 정의, 그 공의롭고 정의로운 사회 - 공정한 사회 정신인 것 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그 사상에 의존하는 그 정신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사상을 들어내는 백성들의 삶의 공동체적 문화여야 한다는 귀결입니다. 그것이 공정사회의 내용 액기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그러한 "생각"들이 바로 공정과 정의를 논하는 축이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pivotal factors)이 되어야 할 것은 두 말할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떠들고 시끄럽게 뭐 아는척 하지만, 제 자신들 부터 무슨 그러한 사상에 무엇인가 되어가려하지 않으면서, 입 바르게 "떠 든다"면, 이것은 공 염불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것들 - 이래도 좋은 것 입니까?
허 준이 구안와사를 고치려다가 반위(위암) 있음을 알고 그 원인치료부터 하니까 구안와사 같은 잡증들이 더불어 치료하게 되는것을 필자의 바로 전의 글에서 보았습니다. 나라 문제의 원인, 근원 - 그 밑둥치를 바로 알고 고치면 잡스럽고 허접스러운 증세들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쓰잘데 없는 다수들의 설왕설래가 중요한 컨센서스가 아니라 깨달은 전문인들의 한결같은 정의롭고 진리에 선 말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리멸렬하게 떠드는 "다수의 사람들"이 떠드는 말은 "반위보다는 입돌아간것만 싸 바르면 된다는 이념없는 실용을 구하였습니다. 나타난 종기에 붙이는 고약들 보다는 원인을 바로잡아주면 고약보다 더 원천적인 근원을 치료하게 됨으로 그와 같은 종기들은 근원부터 정리되어 없어지는 것이 참된 대한민국의 이념이 되어야 쓰잘데 없는 허접스런 말들과 정책들은 단순 간결하게 정리 될 것 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생명걸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근원인 반위(위암)을 치료하려, 허 준 같이, 정진하게 될 것 입니다. 이것이 구국, 애국의 공정하고도 의로운 기초가 되는 것, 바로 살리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문제 원인을 알았으면, 근원을 치료하여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이념이요, 철학이요, 나라와 민족 열방이 살되 복을 받게 되는 것 이어야 공정한 의를 세울 수 있는 근본을 아는 것이리라 봅니다. 말로만 하여서는 안되고, 그 위에 "실천하는" 헌신이 있어야 되겠지요. 여기에서 애인, 애국, 애족 그 중심에 허 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사람이 잡다한 이념없는 실용주의 여러 사람들의 간청을 이길 수 있었던 것 입니다. 허 준의 그 뚝심은 똥 뱃짱이 아니고 의료과학과 확실한 의원됨의 기본이 익혀진 것에서 발원한 결정적인 수 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안와사만 지금 고쳐놓아라 하는 임기응변들을 물리치고 원리와 의료 시술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함으로, 잡다한 싸움거리들을 일거에 정돈한 것 입니다. 공정사회, 정의라는 것의 틀은 이러한 기본에서 움직여 져야 합니다.
생명을 거는 그 한 사람만 있으면 멸망케하시겠다던 예루살렘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사연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떠들어 대는 소리들은 모두 잡소리 들입니다.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허 준 옆에는 그 얼마나 "입으로 간드러지게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그 실(reality)은 허 준 한사람을 통한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의를 세우는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여타 사람들의 것은, 다시 말 하거니와, 공 염불 그 자체일 뿐 입니다. "그냥 해보는 소리"라고 하신 지 박사님의 표현은 너무나 신사적인 묘사입니다.
천암함이 폭침 당함으로 조국을 위하여 던진 애국 장병들의 넋은 지금도 혼곤하게 우는데... 헷가닥 거리며 북괴에 창녀웃음 떨치며 간드러지게 구는 요즈음의 정치 잡배들 같은 것들 가지고서는 감히도 공정이네, 정의에 떠 들 수 없는 것 입니다. 가소로울 뿐입니다. 뜻있는 애국 백성들의 오장만 뒤집을 뿐 입니다. 백성들, 애국자 가슴들의 한을 이처럼 만져주지 못하는 쫄때기, 종제기 새가슴들 되어가지고서야 감히, 어찌, 공정을 말하고, 공의, 정의, 의를 말하느냐? 이겁니다.
애국은 바른 의의 잣대, 그리고 그것을 시행하는 "행동적 삶"을 산출시키는 action입니다. 이를 위하여는 정의, 혹은 의, 사회적 바른가치, 예절도덕적인 잣대, 기준 (justice, righteousness, social right and its value, moralistic norm) ... 뭐 이런것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서 이해를 촉구하고 있긴 합니다.
"정의 (justice)가 무엇인가?" 하바드의 샌덜 교수의 강의를 정리한 책의 이름입니다. 정의를 생각하기 전에 사람이 정의를 바로 정의하기가 썩 곤란한 말세에 우리는 살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정의는, 위에서 보았듯이, 두 말할 것도 없이, 절대자, 그 분의 의 (Divine Justice, Righteousness)에서 기원해야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가지로 그 의가 누더기 같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 그 자체일 뿐이기 때문에 - 절대자의 의의 개념이 우리를 거룩하게 삼켜 줄 때에만, 간신히, 그 기준에 힘 입어 우리는 일어 날 수 있는 "그 손의 주물럭 그릇들", 아니면, "서로 잘났다 키재기하는 도토리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절대적인 정의의 기준 (norm)을 가져야 한다는 이해에는 반론이 없습니다. 양심에 흐르는 사회공익과 협력을 불러일으키는 기준으로서의 원리 (The Principles of Social Cooperation)가 절대자의 기준에 의하여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 저런 정의에 대한 말들은 모두 온전치 못한 파편조각 같은 이바구, 입싸게 떠들어 제끼는, 상대적인 의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Harvard가 세우는 정의 (justice)의 개념은 사실상 좌경화된 대중들이 말하는 것 까지도 모두 "사회 공익"이라는 전제에서 수용하는 정의이기 때문에 절대기준 (Absolute Norm)이 되는 "정의"를 정의하지 못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Harvard가, 실제로, 좌경에 이른지 오래이고,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지극한 조각에 불과한 정의일 뿐 입니다. Harvard라고 하여 모두 절대 무흠한 학문의 전당은 아니고, 특별히 신학이나, 삶에 대한 norm에 대한 한, 대단히 진보적이어서, 우리로 말하면, 보수 우익다운 학문이 아니고, 삐딱선 기준의, 제 나름대로 정의해 버리는 좌파 학원이 된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상에 제일 떠들어 대는 진보 떠벌이 전당 같은 곳이 된 것 입니다. 돈이 일년에만도 270억 달러가 더 들어돈다나 뭐 그러니가 - 배출 된 알룸나이 회원들이 혁혁하게 지원하여 주니까, 흥청망청, 이제는 "이념없는 중도" 같은 꼴을 추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배고프오 울며 나댈때가 더욱 신령할 수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저들의 정의란, 오늘날의 사회적이고, 도덕 윤리적인, 상황 전개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이 뽑아다가 조각처럼 붙인 (fragmentary), 수다떠는 상대적 정의일 뿐 입니다.
그러면... , 우리와 실제 연관된 우리 공동체, 씨스템 클럽에 - 이러한 절대적인 정의, 의를 세워나가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하바드의 "정의론" - 모호하고. 황당한 이바구 정도에 불과할 수 밖에 없는 상대적인 인간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헌법과 양심과, 조국 대한민국과, 그를 위한 헌신 행동에서 정신적인 귀족이 되어 조국에 끝내토록 충성하자는 애국적인 입장에서의 의를 세우는 일에 힘을 쏟는다는 의미에서, 그나마, 지 박사님과 애국 동지들을 존경하는 것 입니다. 나라의 안보를 제 1의 가치로 두는 그것, 한국적 보안, 한국적 민주주의 - 이런 말이 더 한국적 시사 정의에 합당한 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대안은 우리나라 사회 속에 별로 없는, 그러나 제헌 건국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으로 이어온 반공, 멸공, 그리고 자유 시장경제, 민주주의 이념이 우리 씨스쳄 클럽의 고유한 자산이요 자원적인 이해,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것입니다.
정의 (justice)는 공법 (justice roll)과 같이 가며, 정의는 의 (righteousness)와 함께 흐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와 같이 흘릴지로다" 암 5:24). 의로움은 절대적인 기준에서 모자람이거나, 빗 나감이거나, 과 충성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것들은 모두 사악할 것 (문자적으로 "죄"된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뿐이어서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모자라기 때문에 절대적이 될 수 없다는 말 입니다. 단지 깨달은 대로, 배운대로, 그리고 은혜 얻는 대로 충성 스럽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익혀 나가느냐 인 것입니다. 무당에게 배우면 무당짓하고, 사이비에게 붙으면 사깃군되는 것 입니다. 이럴때, 그래도 비리를 쳑결하며, 인간이 인간다운 최하 존엄이라도 지킬 수 있는 조국을 지탱하여야 하겠다는 우리, 이곳의 의지가 엿보이고 느껴지니, 씨스템 가족으로서는,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따르며, 무엇을 기준하여, 어떻게 이 정의를 세우며, 그 잣대 위에 정의롭과 공정한 사회를 구현 할 수 있을까 - 그것이 문제요, 질문입니다.
말하고 떼지어 떠드는 것에 진실은 있지 않고, 정의는 흐르지 않습니다. 강물처럼 삶이 흘러 넘치는 무리없는 은혜의 삶이 정의, 의, 진리, 생명에 가까울 뿐 입니다. 그러므로 공정, 의,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짓는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종교인들이 말로만 떠들고 행위는 빨갱이 짓하며, 미꾸라지 처럼 반지리, 미끄리... 이처럼 살아서는 딱 질색인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고 행위가 없는 그런 믿음은 하나님도 거절하는 가짜 입니다 (약 2:17).
단지,
새벽 세시의 거사 처럼 별 둘 단 "그 한사람"의 용단이 있어주기를 고대할 뿐 입니다.
바른 조국관과, 애국관이 서서 나라를 위하여 죽기살기로 헌신하는 장군 - "그 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 바로 떠드는 애국자들보다, 장군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공정하심을 들어내시는 (fairness and love) 절대자의 역사는 바로 이 한 사람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살릴 것 입니다. 어떤이들은 그러한 혁명은 다시 있을 수 없다고 보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늘 그러한, "흑두건"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엎을 것은 엎었던 나라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준비시키시고 계실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 "저울에 달아보고 저울에 달아보니 근량이 부족하다" 하나님은 이미 "의미없고 행동을 구체화하지 못하며... 국민의 진솔한 정서를 챙기지 못하면서, 입으로 떠드는 '공정한 사회 구현' 그것은 염불일 뿐이다" 판정하신 줄 감각합니다.
확성기 소리처럼 조국에 퍼지는 이 진실의 외침을 청와대와 조국의 산하는 각별히 분별하여 들을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나오는대로 식자연하고 떠들지 말고, 양심에 미말의 죄책이 있거든, 돌이켜 새 사람 되는게 정의요, 정의과 공정 사회를 이루는 초석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을 볼 수도, 들어갈수도, 누리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들 - 그것은 "나오는 대로 해보는 말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의미가 있으되, 허공을 치는 믿음과 충성 신실이 결여된 쓰잘데 없는 인생들의 말들은 천하 미물들이 내는 소리의 의미보다 더 미미한 가련한 인생들의 외마디 일 뿐 입니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들 - 그래도 좋은 것입니까?
오막사리
우리 대한민국이 꿈꾸어야하는 의의 나라, 정의의 나라, 공정사회의 나라.... 참 좋은 생각이고, 복된 말들이고, 아름다운 꿈입니다.
그러나,
말은 반지르하지만, 영글것이 영글지 못한 막 돼먹은 몰 인격자들이 그런 말들을 함부로 떠들어 대는 통에 점잖은 사자들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포효하고 있다는 것을 "떠드는 자들"은 인식하여야 합니다.
"공정사회" 의 성취는 "정의"혹은 "의" ("justice", 혹은 "righteousness")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 의미에 진정한 감동을 받을 때 비로소 조금씩 "되어지는" 것 이며, 거기에는 "삶"이 곁들여 질 때 참된 "사회"는 조금씩 이루어 지는 것일 것 입니다. 그 "삶"은 "행동"과 동행하는 것 임으로 공정사회는 "공정한 행동 공동체"여야만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로운 행위가 뒤 따르지 않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들은 효과없는 '그저 해 보는 소리' 일 뿐 입니다.
공정사회, 정의, 의라는 말들은 모두 "공의"적인 의미로, 그 기준이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의라는 개념입니다.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미국은 개척되었습니다. 미국의 헌법 (The Constitution)은 그러한 정신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는 신국을 원하는 바로서, 신정(Theocracy 하나님의 의가 나라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통치개념을 말 합니다. 사람들은 무요 공이요, 신의 의로운 말씀에 기초한 통치만이 미국을 살려나가는 공정사회의 의가 된다고 천명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된 존재로서, 조물하신 절대자의 창조주와 주 되심 (Creatorship, Lordship)을 높이는 신분일 뿐 입니다. 신을 바라보며 높여드리는 자들에게 번영과 치료와 행복을 주시마 하신 신의 약속, 그 분의 계약 (Promise, Covenant)을 신뢰하는 신 의지 사상에 철저하게 기인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의, 공의, 정의, 그 공의롭고 정의로운 사회 - 공정한 사회 정신인 것 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그 사상에 의존하는 그 정신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사상을 들어내는 백성들의 삶의 공동체적 문화여야 한다는 귀결입니다. 그것이 공정사회의 내용 액기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그러한 "생각"들이 바로 공정과 정의를 논하는 축이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pivotal factors)이 되어야 할 것은 두 말할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떠들고 시끄럽게 뭐 아는척 하지만, 제 자신들 부터 무슨 그러한 사상에 무엇인가 되어가려하지 않으면서, 입 바르게 "떠 든다"면, 이것은 공 염불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것들 - 이래도 좋은 것 입니까?
허 준이 구안와사를 고치려다가 반위(위암) 있음을 알고 그 원인치료부터 하니까 구안와사 같은 잡증들이 더불어 치료하게 되는것을 필자의 바로 전의 글에서 보았습니다. 나라 문제의 원인, 근원 - 그 밑둥치를 바로 알고 고치면 잡스럽고 허접스러운 증세들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쓰잘데 없는 다수들의 설왕설래가 중요한 컨센서스가 아니라 깨달은 전문인들의 한결같은 정의롭고 진리에 선 말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리멸렬하게 떠드는 "다수의 사람들"이 떠드는 말은 "반위보다는 입돌아간것만 싸 바르면 된다는 이념없는 실용을 구하였습니다. 나타난 종기에 붙이는 고약들 보다는 원인을 바로잡아주면 고약보다 더 원천적인 근원을 치료하게 됨으로 그와 같은 종기들은 근원부터 정리되어 없어지는 것이 참된 대한민국의 이념이 되어야 쓰잘데 없는 허접스런 말들과 정책들은 단순 간결하게 정리 될 것 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생명걸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근원인 반위(위암)을 치료하려, 허 준 같이, 정진하게 될 것 입니다. 이것이 구국, 애국의 공정하고도 의로운 기초가 되는 것, 바로 살리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문제 원인을 알았으면, 근원을 치료하여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이념이요, 철학이요, 나라와 민족 열방이 살되 복을 받게 되는 것 이어야 공정한 의를 세울 수 있는 근본을 아는 것이리라 봅니다. 말로만 하여서는 안되고, 그 위에 "실천하는" 헌신이 있어야 되겠지요. 여기에서 애인, 애국, 애족 그 중심에 허 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사람이 잡다한 이념없는 실용주의 여러 사람들의 간청을 이길 수 있었던 것 입니다. 허 준의 그 뚝심은 똥 뱃짱이 아니고 의료과학과 확실한 의원됨의 기본이 익혀진 것에서 발원한 결정적인 수 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안와사만 지금 고쳐놓아라 하는 임기응변들을 물리치고 원리와 의료 시술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함으로, 잡다한 싸움거리들을 일거에 정돈한 것 입니다. 공정사회, 정의라는 것의 틀은 이러한 기본에서 움직여 져야 합니다.
생명을 거는 그 한 사람만 있으면 멸망케하시겠다던 예루살렘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사연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떠들어 대는 소리들은 모두 잡소리 들입니다.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허 준 옆에는 그 얼마나 "입으로 간드러지게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그 실(reality)은 허 준 한사람을 통한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의를 세우는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여타 사람들의 것은, 다시 말 하거니와, 공 염불 그 자체일 뿐 입니다. "그냥 해보는 소리"라고 하신 지 박사님의 표현은 너무나 신사적인 묘사입니다.
천암함이 폭침 당함으로 조국을 위하여 던진 애국 장병들의 넋은 지금도 혼곤하게 우는데... 헷가닥 거리며 북괴에 창녀웃음 떨치며 간드러지게 구는 요즈음의 정치 잡배들 같은 것들 가지고서는 감히도 공정이네, 정의에 떠 들 수 없는 것 입니다. 가소로울 뿐입니다. 뜻있는 애국 백성들의 오장만 뒤집을 뿐 입니다. 백성들, 애국자 가슴들의 한을 이처럼 만져주지 못하는 쫄때기, 종제기 새가슴들 되어가지고서야 감히, 어찌, 공정을 말하고, 공의, 정의, 의를 말하느냐? 이겁니다.
애국은 바른 의의 잣대, 그리고 그것을 시행하는 "행동적 삶"을 산출시키는 action입니다. 이를 위하여는 정의, 혹은 의, 사회적 바른가치, 예절도덕적인 잣대, 기준 (justice, righteousness, social right and its value, moralistic norm) ... 뭐 이런것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서 이해를 촉구하고 있긴 합니다.
"정의 (justice)가 무엇인가?" 하바드의 샌덜 교수의 강의를 정리한 책의 이름입니다. 정의를 생각하기 전에 사람이 정의를 바로 정의하기가 썩 곤란한 말세에 우리는 살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정의는, 위에서 보았듯이, 두 말할 것도 없이, 절대자, 그 분의 의 (Divine Justice, Righteousness)에서 기원해야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가지로 그 의가 누더기 같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 그 자체일 뿐이기 때문에 - 절대자의 의의 개념이 우리를 거룩하게 삼켜 줄 때에만, 간신히, 그 기준에 힘 입어 우리는 일어 날 수 있는 "그 손의 주물럭 그릇들", 아니면, "서로 잘났다 키재기하는 도토리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절대적인 정의의 기준 (norm)을 가져야 한다는 이해에는 반론이 없습니다. 양심에 흐르는 사회공익과 협력을 불러일으키는 기준으로서의 원리 (The Principles of Social Cooperation)가 절대자의 기준에 의하여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 저런 정의에 대한 말들은 모두 온전치 못한 파편조각 같은 이바구, 입싸게 떠들어 제끼는, 상대적인 의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Harvard가 세우는 정의 (justice)의 개념은 사실상 좌경화된 대중들이 말하는 것 까지도 모두 "사회 공익"이라는 전제에서 수용하는 정의이기 때문에 절대기준 (Absolute Norm)이 되는 "정의"를 정의하지 못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Harvard가, 실제로, 좌경에 이른지 오래이고,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지극한 조각에 불과한 정의일 뿐 입니다. Harvard라고 하여 모두 절대 무흠한 학문의 전당은 아니고, 특별히 신학이나, 삶에 대한 norm에 대한 한, 대단히 진보적이어서, 우리로 말하면, 보수 우익다운 학문이 아니고, 삐딱선 기준의, 제 나름대로 정의해 버리는 좌파 학원이 된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상에 제일 떠들어 대는 진보 떠벌이 전당 같은 곳이 된 것 입니다. 돈이 일년에만도 270억 달러가 더 들어돈다나 뭐 그러니가 - 배출 된 알룸나이 회원들이 혁혁하게 지원하여 주니까, 흥청망청, 이제는 "이념없는 중도" 같은 꼴을 추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배고프오 울며 나댈때가 더욱 신령할 수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저들의 정의란, 오늘날의 사회적이고, 도덕 윤리적인, 상황 전개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이 뽑아다가 조각처럼 붙인 (fragmentary), 수다떠는 상대적 정의일 뿐 입니다.
그러면... , 우리와 실제 연관된 우리 공동체, 씨스템 클럽에 - 이러한 절대적인 정의, 의를 세워나가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하바드의 "정의론" - 모호하고. 황당한 이바구 정도에 불과할 수 밖에 없는 상대적인 인간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헌법과 양심과, 조국 대한민국과, 그를 위한 헌신 행동에서 정신적인 귀족이 되어 조국에 끝내토록 충성하자는 애국적인 입장에서의 의를 세우는 일에 힘을 쏟는다는 의미에서, 그나마, 지 박사님과 애국 동지들을 존경하는 것 입니다. 나라의 안보를 제 1의 가치로 두는 그것, 한국적 보안, 한국적 민주주의 - 이런 말이 더 한국적 시사 정의에 합당한 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대안은 우리나라 사회 속에 별로 없는, 그러나 제헌 건국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으로 이어온 반공, 멸공, 그리고 자유 시장경제, 민주주의 이념이 우리 씨스쳄 클럽의 고유한 자산이요 자원적인 이해,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것입니다.
정의 (justice)는 공법 (justice roll)과 같이 가며, 정의는 의 (righteousness)와 함께 흐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와 같이 흘릴지로다" 암 5:24). 의로움은 절대적인 기준에서 모자람이거나, 빗 나감이거나, 과 충성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것들은 모두 사악할 것 (문자적으로 "죄"된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뿐이어서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모자라기 때문에 절대적이 될 수 없다는 말 입니다. 단지 깨달은 대로, 배운대로, 그리고 은혜 얻는 대로 충성 스럽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익혀 나가느냐 인 것입니다. 무당에게 배우면 무당짓하고, 사이비에게 붙으면 사깃군되는 것 입니다. 이럴때, 그래도 비리를 쳑결하며, 인간이 인간다운 최하 존엄이라도 지킬 수 있는 조국을 지탱하여야 하겠다는 우리, 이곳의 의지가 엿보이고 느껴지니, 씨스템 가족으로서는,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따르며, 무엇을 기준하여, 어떻게 이 정의를 세우며, 그 잣대 위에 정의롭과 공정한 사회를 구현 할 수 있을까 - 그것이 문제요, 질문입니다.
말하고 떼지어 떠드는 것에 진실은 있지 않고, 정의는 흐르지 않습니다. 강물처럼 삶이 흘러 넘치는 무리없는 은혜의 삶이 정의, 의, 진리, 생명에 가까울 뿐 입니다. 그러므로 공정, 의,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짓는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종교인들이 말로만 떠들고 행위는 빨갱이 짓하며, 미꾸라지 처럼 반지리, 미끄리... 이처럼 살아서는 딱 질색인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고 행위가 없는 그런 믿음은 하나님도 거절하는 가짜 입니다 (약 2:17).
단지,
새벽 세시의 거사 처럼 별 둘 단 "그 한사람"의 용단이 있어주기를 고대할 뿐 입니다.
바른 조국관과, 애국관이 서서 나라를 위하여 죽기살기로 헌신하는 장군 - "그 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 바로 떠드는 애국자들보다, 장군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공정하심을 들어내시는 (fairness and love) 절대자의 역사는 바로 이 한 사람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살릴 것 입니다. 어떤이들은 그러한 혁명은 다시 있을 수 없다고 보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늘 그러한, "흑두건"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엎을 것은 엎었던 나라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준비시키시고 계실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 "저울에 달아보고 저울에 달아보니 근량이 부족하다" 하나님은 이미 "의미없고 행동을 구체화하지 못하며... 국민의 진솔한 정서를 챙기지 못하면서, 입으로 떠드는 '공정한 사회 구현' 그것은 염불일 뿐이다" 판정하신 줄 감각합니다.
확성기 소리처럼 조국에 퍼지는 이 진실의 외침을 청와대와 조국의 산하는 각별히 분별하여 들을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나오는대로 식자연하고 떠들지 말고, 양심에 미말의 죄책이 있거든, 돌이켜 새 사람 되는게 정의요, 정의과 공정 사회를 이루는 초석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을 볼 수도, 들어갈수도, 누리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들 - 그것은 "나오는 대로 해보는 말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의미가 있으되, 허공을 치는 믿음과 충성 신실이 결여된 쓰잘데 없는 인생들의 말들은 천하 미물들이 내는 소리의 의미보다 더 미미한 가련한 인생들의 외마디 일 뿐 입니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들 - 그래도 좋은 것입니까?
오막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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