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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상세한 5.18북한군 증언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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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6-07-09 10:33 조회2,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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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상세한 5.18북한군 증언이 또 있을까?

 

 

다음에 게시한 글은 어느 탈북 여교사의 5.18북한군에 대한 생생하고 상세한 증언이다.

 

 

이 내용은 내가 탈북하기 전에 살던 함경남도 장진군 군당교육부의 대학모집과장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들은 이야기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과정은 그가 우리집안 5형제 중에 둘째인 맏 오빠와 막연한 친구 사이로 지내면서부터이다. 그는 내가 북한의 교육부분에서 일할 수 있도록 특별히 힘을 써준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유년기시절 가장 큰 희망은 교육부문에서 최고의 전당이라고 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과 같은 큰 대학에 가려면 하늘의 별 따기라고도 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남한과는 달리 공부 잘해서 실력이 좋다고 무조건 자기가 희망하는 대학에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공부도 우선 잘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집안 배경이다. 전교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학과실력이 좋았던 나는 김정일이한테 개인적으로 편지를 써서라도(써본들 부질없는 짓이지만) 무조건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만큼 김일성종합대학에 가려는 나의 결심은 그 어느 누구보다 확고했었다. 그러는 나를 두고 학교 측에서도 이번만은 우리학교에서 김대 입학생이 꼭 나올 것이라고 지지해주었고 군당교육부에 나를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생으로 추천하였다.

 

학교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게 되었다고 들떠있던 1986 8, 군당교육부로부터 내려온 통지서에는 군적으로 단 한 명을 뽑는 김일성종합대학 대상자를 우리학교의 내가 아닌 읍 중학교의 교장선생님의 아들로 확정 지었다고 적혀있었다. 하늘이 왈카닥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교무실로 달려가서 내가 무엇이 딸리고 모자라서 평생 꿈꾸던 종합대학에 못 가느냐고 선생님들께 따져 물었다. 본인 이상으로 많은 기대를 했던 선생님들도 실망한 듯 맥을 놓고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한 참 동안 울면서 서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교장선생님께서 나에게 이왕 이렇게 됐으니 김대는 포기하고 다른 대학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시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김대를 못 가면 다른 대학을 가지 않고 인민군대에 나가겠다고 내 뱉듯 한마디 남기고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우리 집안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큰 인물은 없어도 성분도 빈농이기 때문에 토대에서 걸리는 것이 없고 당시 우리 맏 오빠는 군당 선전부에 근무하고 있었던 터라 별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는 실정이었다. 교장선생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밀려 나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한테 기회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니까 비록 어린 마음이지만 억울하고 분하기 짝이 없었다. 인민군대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군에서 1차 신체검사를 마치고 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했는데 군 당선전부에 다니는 오빠가 한쪽 다리를 저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와서 군당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라고 소개했다. 오빠는 데리고 온 친구 분한테 나를 인사시키면서 자랑 삼아 말했다. “너 지금까지 공화국영웅칭호 받은 사람을 직접 본적이 없지? 이 사람이 바로 5년 전에 김정일 동지를 직접 만나 뵙고 그분 앞에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야. 

 

나는 다소곳이 머리 숙여 친구 분한테 인사를 했다. 공화국영웅이라는 훌륭한 분을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우리 집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한쪽 다리를 많이 절룩거리는 사람이 어떤 장한 일을 해서 영웅이 되었는지 많이 궁금했다. 어머님은 오빠의 친구 분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서 푸짐하게 저녁상을 차리셨다. 맏 오빠는 별로 농담을 잘하지 않는 성격인데 그날은 왜서인지 느닷없이 싱글거리면서 나를 놀리는 말투로 군대에 나갈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고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밥상이 차려지고 남자들과 여자들이 서로 다른 밥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남자들 상에서 술이 몇 잔 도는 것 같더니 얼근히 취한 오빠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데 하늘에서 운 좋게 도와주면 아무리 김일성종합대학이라도 못 간다는 법이 있겠느냐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해보는 소리겠지 하고 그냥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내 귀에 대고 가만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입학통지서가 내 이름까지 밝혀서 직접 내려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오빠의 친구 분이 중앙당에 힘을 써서 일이 성사됐다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잠시 후 오빠의 친구 분도 나를 향해서 눈길을 보내면서 어렵게 성사된 일인 것만큼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해서 학교와 고향사람들의 기대에 꼭 보답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졸업하면 자기한테도 오늘 신세를 꼭 갚아야 한다고 농담을 건넸다. 중앙당에 든든한 줄이 있었던 오빠친구의 도움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나의 꿈이 그렇게 실현되었고 그때부터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한 달이 멀다하게 그분한테서 편지가 자주 왔고 나도 매 번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고맙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본인은 나에게 말을 안 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 온지 1년이 지난 뒤에 오빠로부터 그 사람이 총상으로 부상당했던 다리에 골수염이 생겨서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었다.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로 황해남도 연안군 풍천리에 나가 있던 어느 날, 온다는 기별도 없이 오빠의 친구 분이 의족을 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내가 생활하는 숙소에 문득 나타났다. 황해남도 연안지역에 군당간부들의 신원조회 문제가 제기되어 출장을 왔다가 내가 그쪽지방에서 소조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잠깐 보고 가려고 들렀다는 것이었다. 18살에 본 이후에 6년 만에 보는 사람이지만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도와주신 분이라 너무도 반가웠다. 그 분도 내가 그렇게 희망하고 바라던 김일성종합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어엿한 3대혁명소조로 성장한 모습이 대견했던지 나를 와락 껴안고 한 참 동안 어루만져 주면서 말이 없었다.  

당시는 김일성이 죽기 전이여서 김정일 정권에 비하면 식량사정이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형편이었지만 농촌의 살림은 전국의 어디를 가나 찢어질 정도로 모두가 가난했고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에서 파견되어 하부 당 기관들과 공장, 농촌의 생산라인을 감독하는 3대혁명소조라고 해도 우대라는 것은 특별히 없었고 합숙에서 주는 식사도 쌀 몇 알이 드문드문 섞인 누런 강냉이 밥 한 그릇에 시래기 된장국 한 사발이 전부였다. 귀인이 찾아 왔어도 나라 형편이 가난하다 보니까 외지생활을 하는 처지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혼자서 궁리하다가 할 수 없이 한개 리 전반의 살림을 책임지는 창고 장에게 달려가서 은인과도 같은 귀한 손님이 왔는데 대책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몇 마디 했더니 창고 한구석에 간부들 접대용으로 몰래 감춰놓은 돼지고기가 조금 있다면서 두 키로 정도를 떼어 주었다. 오는 길에 리 당부비서 집에 들러서 소주 두병을 얻어가지고서야 그날 저녁 손님식사를 그래도 대충 대접할 수 있었다

 

내가 혼자서 생활하는 작은 방에서 식사를 끝내고 우리 두 사람은 15년이라는 나이차이도 꽤 컷 지만 마치 오래 동안 떨어져 있던 사랑을 만난 것처럼 서로가 부담감이 없이 한자리에 누웠다. 지금까지 없었던 남자와의 첫 잠자리에 드는 순간이어서 긴장하기도 하고 애가 둘이 있는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생각에 머리가 착잡했지만 내가 그만큼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둘도 없는 은인이라는 고마움에 한 순간의 두려움이 씻은 듯이 모두 사라져 버렸고 결국은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도 아니고 의족을 하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먼 길을 힘들게 찾아왔다는 동기가 정에 약하고 마음이 여린 처녀의 순진한 마음을 감동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지만 그날 밤이 24년 동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남 여 간의 연정의 세계를 내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는 첫 순간이었다. 요즘은 북한사정이 워낙 어렵다 보니까 이전과는 반대로 생활방식이라던가 인생 자체에 대한 생존개념이 많이 달라져서 성에 대한 문제가 도덕적인 차원에서 많이 도외시 되고 있는 것이 지당한 현실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학력이 출중하고 인물이 좋아도 남 여 관계와 같은 사생활문제에서 소문이 나면 남자 쪽은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아도 여자는 그 동네에서 절대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되어 있었던 것이 봉건적인 색체가 가득한 북한이었다.

 

어느 여자가 누구와 하룻밤을 잤소, 얼굴이 반반한 뉘 집 딸이 당 기관의 어떤 늙은 간부와 좋아하다가 임신을 했소, 라고 소문이 나면 그 동네에서 그 여자는 쓰지 못할 인간이라고 단번에 도장이 찍혀야 되는 형편이었다. 하늘이 준 벌이었는지 내가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었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바로 그런 수치스러운 ‘변’을 당한 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세상은 내가 응당한 사생활이라고 여겼던 은인과의 첫 하룻밤을 숨겨주지 못하고 당시까지 힘들게 노력하였던 인생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하였다.  

 

학부에서 최고의 영어실력을 인정받았던 터라 3대혁명소조생활을 끝마치면 중앙기관의 교사로 배치 받게 되어있지만 나는 그날 밤의 잠자리 실수로 원치 않던 임신을 하게 되었고 5개월 후에 사생활문란으로 대학으로부터 3대혁명소조활동을 중지 당하고 불명예스럽게도 고향인 함경남도 장진군으로 6 7개월 만에 쓸쓸한 귀경을 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내려 온지 얼마 후에 태어난 아기의 신분을 헤어진 약혼 남의 자식으로 숨기었고 영어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터라 오빠의 친구인 실지 아기아빠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이웃 군인 함경남도 영광군의 시골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2년 뒤에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를 낳으면서 나의 결혼은 영원히 물건 너 갔고 남편 없이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북한에서 최고의 대학과 최고의 목표를 꿈꾸었던 내 인생의 흔적이고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한바 있지만 남조선에 와서 새로운 생활을 위해서도 분명히 꺼내지 말아야 할 아름답지 못한 개인비밀을 누구의 권유도 없이 스스로 꺼내는 것은 광주사건의 실체에 대해서 보다 진실하게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독자들이 지루해할 것 같아서 더 길게 설명을 안 하겠지만 고등학교졸업시절에 은인으로 나타나서 나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두 아이의 아빠가 바로 5.18광주사건 때 북한의 임무를 받고 남조선에 내려왔다가 부상당한 몸으로 북한으로 돌아가서 영웅칭호를 받은 당사자이다.

 

합법적으로는 남편이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가 낳은 두 아이의 아빠이면서 평생에 한번 만나서 첫 정을 바친 남자이기도 한 사람이다. 황해남도 연안군 풍천리에서 3대혁명소조생활을 할 때나 첫 아이를 낳을 때만 해도 나는 그 사람이 광주사건에 직접 참가한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전에 오빠한테서도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정도로만 말을 들었지 광주사건에 참가하고 영웅칭호를 받았다는데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질을 받은 바가 없었다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면서도 군사복무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하다가 다쳤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해산달이 다되어 휴가를 놀고 있던 설명 절이 가까운 어느 날, 그 사람이 오빠와 함께 동태 몇 마리를 사들고 딸애와 둘이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왔다. 손을 휘저어도 거미줄도 안 잡히는 집안 살림이라는 것을 알고 그래도 설 명절이라고 걱정돼서 찾아온 것이 분명하였다. 만삭의 몸으로 누워있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오빠가 부엌에 나가서 덜거덕거리면서 사들고 온 명태로 국을 끓이고 저녁상을 차렸다.

 

그런데 그날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애기아빠인 그 사람의 얼굴기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들어서면서 추운 겨울에 임신한 몸으로 혼자서 고생이 많겠다는 말 한마디 정도가 고작이었지 살뜰하고 다정했던 이전에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울먹한 분위기로 오빠가 차려준 저녁밥을 몇 숟갈 뜨는 시늉을 하다가 앉아 있기 힘들어서 작은방에 들어가 누우려고 일어서는데 오빠가 나를 불러 앉혔다. 오빠는 신문종이로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저 양반이 아버지가 명절 지나 평양에 올라가서 병원에 입원해. 몇 년 전에 수술한 다리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고 군 병원에서 진단이 나왔어. 의사들의 말이 이전에 절단하고 남은 허벅지부분을 마저 자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누만. 장진에 있는 자기 마누라도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집에 들어설 때부터 시름이 많아 보였던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예감은 했었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소식이라 순식간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전에도 집에 올 때 마다 다리가 아픈 것을 숨기고 억지로 웃으면서 애하고 놀아주는 것을 보면서 맘속으로 많이 불안해했었는데 그날은 드디어 올 것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부부 정을 나누면서 한집에서 한 이불을 같이 쓰고 사는 내 사람은 아니었지만 엮여있는 정이 하도 기구해서 나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날 밤에 비로써 그 사람이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다리부상에 대한 정체를 오빠와 함께 본인의 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남조선에 와서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기억해 둘 수도 있었겠는데 그냥 재미있는 전투일화처럼 듣고 스쳐 보내다 보니 참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10년을 훨씬 넘기는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 오랜 시간의 경과 속에서도 내가 직접 그 사람으로부터 들은 5.18광주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머릿속에 대부분 남아있다.

 

그러나 필자가 광주사건에 참가했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반적인 내용파악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경험자 이상으로 여기에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며 독자들은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1968 1 21일 남조선청와대 습격사건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사건의 내용이 남조선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테러로 국제사회에 여론이 확산되자 북한은 황해북도 연산주둔 124군부대를 해산하고 1970대 초에 북한 함경남도 덕성과 량강도 후치령인근에다가 해산된 기존의 124부대의 기능을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비밀부대를 극비리에 조직하였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는 평안북도 정주, 동림 일대에 남조선 종심에 대한 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정예특수부대인 일명 자살부대라고도 불리던 ‘당원사단’이라는 최정예부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인 1966년 가을에 조국을 위해 아들을 바친다는 부모의 서약과 함께 조국을 위해서 죽어야 되는 기구한 운명이 되여 자살부대나 다름없는 국가보위부소속 첩보훈련소에 모집되어갔다. 그가 간곳은 서해바닷가의 어느 이름 없는 섬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백여 명의 같은 또래 어린 동료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당사자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은폐되어 있는 생체실험장도 있다고 한다. 정신훈련교육은 처음부터 조국을 위해서는 필요하면 부모와 처자식도 죽여야 하고 친구도 무조건 죽여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생전처음 보는 코가 큰 사람들이 와서 미국 말을 가르치고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과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의 말들을 어린 훈련병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후에 소문이 났지만)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당할 때까지 근 2년 동안 대원들에게 살인적인 훈련을 가르쳤다.

 

박정희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전부대가 비상대기상태에 돌입해 있던 때인 1979 11월 중순쯤에 그가 책임지고 있는 타격대에 폭풍명령이 떨어졌다. 준 전시상태에서 소부대기능을 수행하는 타격대를 대상으로 제한적인 폭풍명령이 떨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급히 대원들에게 비상소집명령을 내리고 지휘부에 달려가 보니 부대지휘관이 아닌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전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낮 설은 지휘관이 긴급명령을 하달하기 위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급부대 지휘관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부대의 전투준비상태와 각기 타격대들의 기동성 및 전투임무 수행능력을 점검할 목적으로 임의의 소부대를 예고 없이 지명하여 전투력상태를 판정한다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타격대의 작전구역은 신포시 앞바다에 있는 마양도라는 섬이며 그날 밤중으로 현지로 이동하여 대기상태에 있을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상급지휘관의 명령대로 즉시 타격대를 출발시켜 그날 새벽녘에 신포시 마양도에 전개되어 있는 해군기지에 도착하였다.

 

도착 이후 30분 정도의 시간이 경과될 무렵 사복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 시각부터 타격대는 두 개조로 나뉘어 작전에 임한다는 지시를 전달하면서 미리 작성한 이름을 호출했고, 호출된 사람들은 대로 양쪽으로 나뉘어 섰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 그들보다 인원수가 많은 다른 조는 대기상태에서 차후 명령을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침투훈련을 하면서 남조선육지는 밟아보지 못했어도 해상으로는 남조선 깊숙이 몇 번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실전을 위한 훈련정도로만 생각했고 공해상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북한으로 올라갈 것으로 그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들의 생각이 아주 크게 빗나갔다. 안내요원이 들고 온 지휘부의 명령서에는 소부대인원들을 지휘하여 남조선의 후방에 침투해서 현지에서 차후명령을 전달받고 수행하라는 임무였다지역은 전라남도 일대이고 육지에 상륙하여 도착장소까지의 안내과정은 별도의 인원들이 맡아서 수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어떤 임무가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로써는 아무도 모르고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그들이 남쪽으로 급히 파견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보태면 북한정권은 남조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되고 전두환 군부가 등장하면서 조성되고 있던 복잡한 정세와 정치적 혼란이라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후를 조종하여 국가전복을 시도하려는 구체적인 작전을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다.  

 

오늘에 와서는 그 질과 범위가 아주 대담해지고 폭이 넓게 전개되고 있지만 북한이 남조선에서 가장 허점으로 노렸던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체제에 민주정치라는 한 가지 ‘약점’이었다. 한국의 정치체제가 다양성에 대한 보장과 존중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북한쪽이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영락없는 틈새였고 합법적으로 친북세력을 양산하고 또한 그들을 이용하여 친북정권을 출연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에돌리지 않고 말하면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겼던 5.18광주사건의 서막도 북한의 이와 같이 치밀한 대남전략의 차원에서 서서히 준비되고 무르익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그들 일곱 사람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 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어쨌든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적후에서 만난 그들 모두에게 전라도 지역에서의 새로운 무장폭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공동의 과제가 동일하게 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어떤 어려운 일이 제기된다 해도 목숨을 내놓을 지언정 반드시 수행해야 될 당과 조국 앞에 걸머진 본인들의 임무였다.

 

그들이 남조선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 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째어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 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본주의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돼서 북한사람들의 정신상태 이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북한체제를 위해서 주저 없는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는지 한 순간의 머리판단으로써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가없었다.

 

강원도에서 일어났던 사북탄광사태가 전국적인 규모로 탄력을 받지 못하고 부마사태처럼 속수무책으로 조기에 소멸되자 북한정권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북한정권은 남조선에서 전국형태의 대규모항쟁이라는 사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그 어떤 댓 가를 지불해서라도 실패한 부분들을 무조건 봉창하려고 접어들었다. 결국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는 광주였고 광주폭동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치밀하게 조작하여 부마사태나 사북탄광사태처럼 두 번 다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내부를 조작하여 봉기를 확대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미봉책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한 남조선청년학생들과 특히 전라도지역의 민심이 좋지 않았던 만큼 이런 분위기를 광주사건에 적절히 배합하여 지역감정에 이용하고 항쟁의 질을 자극적인 방향으로 극대화시켜 나가게 되면 예상외로 생각지 못했던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북한은 타산하였다. 특히 1980 5월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적인 규모에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북한정권의 대남작전에 활력을 주고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일어나서 공권력이 흔들리게 되면 인민군대의 남침도발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고 하니 소름이 끼칠 만도 한 일이었다.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났던 5.18광주폭동에 대한 계획은 이런 북한의 끈질긴 도발과 조작의 어두운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준비상태가 마무리되어 갔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광주작전에 참가하기 위해서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요원들의 규모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필요가 없는 철저한 보안 사안이기 때문에 해당 당사자들 외에는 어느 부대에서 몇 명이 내려왔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안창식을 비롯한 일행들도 광주사건이 터지기 대략 1~2개월 전에 배후교란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들에서 적지 않은 인원들이 광주작전을 위해서 전라도지방으로 파견되어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같은 부대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온 인원이 몇 명이고 그들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등 구체적인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광주를 포함해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가 극열해지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북한지휘부는 남조선에 파견된 전투원들에게 일제히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 5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광주에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전라도 내에 잠재해 있는 지하조직들을 간접적으로 동원해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그들이 사전에 일일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광주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질 때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들에게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전면에 섣불리 나서서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라는 지휘부의 엄명이 떨어져 있었고 그들은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자신들의 행동이 의심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들 스스로가 철저히 경계하였다

 

일면식이 전혀 없는 다른 부대에서 파견된 북한전투요원들이 광주시내의 사방에서 각기 자기들이 맡은 임무에 따라 복잡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은 서로의 행동에서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고 우연히 스칠 때마다 간단한 눈인사 정도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남조선진압군과 봉기군들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교전이 치열하던 어느 날 뜻밖의 일 때문에 몇 명의 일행이 노출될 뻔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남조선의 광주 시내가 치안부재상태로 방치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끔찍한 시체들(시민들을 자극할 목적으로 특별히 여성들을 골라서 조작한 시체가 많았다고 하였음)이 광주시내의 골목들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줄줄이 쏟아져 나오자 정보기관들뿐만이 아니라 언론기관과 심지어 봉기군들까지도 그런 작품을 만들어내는 주인공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감시인원들을 동원시켰다

 

지금에 와서 소위 민주화단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광주에서 일어났던 모든 살인행위를 대한민국국군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들과 일명 가공된 “시체작품”들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고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 중 한 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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