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민족의 운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우주의신 작성일20-12-31 15:48 조회2,85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불교에서는 사람이 죄를 많이 지으면 죽어서 벌레나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이 있다. 그래서 한반도가 분단되고 북한 주민들이 김부자의 노예로 사는 것도 자신들이 전생에 저지른 업보 때문 일것이다. 한민족은 조선시대 까지 30% 정도의 양반이 나머지 70%의 같은민족을 노예로 부리며 살았다.
그래서 30% 정도의 양반이 같은 민족을 착취하고 학대했던 업보 때문에 죽어서 북한 김부자의 노예로 태어난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다행히 탈북에 성공해서 자유 세계에 온 사람들은 전생에 자신이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리며 학대 했던 업보를 북한에 노예로 살면서 모두 갚았기
때문에 자유세계에 올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가 분단되고 4대 강국의 영향으로 남북이 분단 될것임을 미리 예견했던게 바로 태극기의 4괘와 태극문양 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썼던 태극기의 원래 모양은 지금 것과 같이 음양이 위·아래로 누워 있지 않고 좌·우로 세워져 있었다. 묘하게도 한반도가 오늘날 위·아래의 음양 태극선 모양대로 분단된 것은 좌·우로 세워져 있던 태극기가 위·아래로 누운 모양으로 바뀐 다음부터라는 사실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태극기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태극기를 우리나라 국기로 처음 사용한 것은 1882년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갔을 때의 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듬해인 1883년에 고종 임금이 태극 4괘가 그려진 기를 국기로 사용한다고 왕명으로 공포함으로써 태극마크가 우리나라 국기로 확정지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태극의 음양이나 4괘의 위치가 통일되지 않았다 한다.
이후 태극의 음양이 좌우로 세워진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널리 사용됐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에 걸려 있는 태극기는 음양이 좌·우로 서 있다. 뿐만 아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 당시 중앙청에 내건 태극기도 음양이 좌·우로 서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행 태극기(1949년 10월15일 제작 공표)는 임정 당시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쓰던 태극기와 다르게 음양이 위·아래로 누워 있게 된 것이다. 태극기가 바로 이렇게 바뀐 다음해인 1950년에 6·25전쟁이 터졌고 이후 완전 분단이 돼버렸다.
어떤 큰 사건이 있을때는 그 전에 미리 불길하고 이상한 징조가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6.25가 발발하기 직전에도 10가지 미스테리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 북한군 남침 징후를 육군본부가 외면했다.
둘째 전쟁발발을 앞둔 6월 10일 주요 지휘관의 인사 이동 이다. 전쟁 발발을 앞두고 전후방의 사단장급의 장성들이 대거 교체가 됐다는 점이다.
셋째 6월 13일 부터 20일에 걸쳐 전후방 부대의 교대로 인한 지휘관들은 자신이 발령받은 곳의 병사에 신상파악은
물론 지형지물 파악도 못한 상태로 북한군의 침략을 막아야 했다.
넷째 4. 6.25전쟁을 2일 앞둔 시점 비상경계령을 해제
6월 10일 남한내 친북인사들을 체포했는데 이걸 놓고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무력행사로 위협을 합니다.
초반 우리군도 비상경계를 했지만 2일을 앞둔 시점인 6월 23일 비상경계령을 해제 합니다.
5. 비상경계를 해제한 이후 육본은 전장병의 절반에게 외출과 외박을 하게 합니다.
당시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주말이라 장병들이 휴가중이라고 했는데, 이런 위기 상황에서 병사들 절반이 외박을 갔다는건
이해가 안되는 부분 입니다.
6. 육군장교클럽 댄스파티(사교파티, 6월 24일 밤)
장교들은 전쟁이 터지던 25일 새벽까지 술을 마셨기에, 장교들은 술 마시고, 병사들이 휴가를 간 시점에
북한군의 침공은 초반 파죽지세로 서울을 함락 시켰다는 점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죠.
7. 국방부의 이해 안가는 전술
북한군과 전투로 이미 대세가 기울어 패식이 짙은 장소에 병력을 투입하는 바람에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여러 전선에서 화력의 열세로 인해 후퇴를 해야하는 상황임에도 억지로 병력을 투입했고, 북한군의 포위전에 섬멸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8. 국방부의 허위방송
북한군이 코앞까지 진격했음에도 우리 국군이 의정부 등지에서 승리하고 북한군을 역관광해 북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방송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국민들 뿐만 아니라 군부에서도 착각을 했고 정부 내에서도 착각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매번 제기 하는 부분이 이 점인데, "국민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안전합니다." 이렇게 이승만 대통령이 방송 해서 많은 국민이 피난 가지 못하고 죽었다는 부분인데,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 그런 발언을 한적이 없습니다. 실제 방송 내용은 "전황이 현재 불리하지만 우방국들이 도울 것이고, 국군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였다고 합니다.(CIA보고서 내용중)
당시 국방부 장관이 신성모였는데, 우리 군이 이기고 있다고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 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청량리까지 북한군이 오고 나서야 이승만 대통령한테 우리가 지고 있다고 보고 했다고 합니다. 신성모의 기만이 부른 참사였던 것이죠.
9. 한강교의 조기폭파
신성모의 기만으로 정부는 급해졌고, 이승만 대통령과 서울시민들은 서둘러 피난을 갔는데, 한강교를 조기 폭파 시키죠.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적절한 조치는 맞지만, 여전히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과 국민, 군수물자에 대한 해결책 없이 한강교를 폭파한 점은 시급한 결정이였다고 이형근 장군은 의문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고위관리 중 이적 행위자가 상당히 존재했을거라 주장합니다.
10. 최창식 대령의 사형 집행
당시 한강교를 폭파한 사람이 바로 최창식 대령인데, 이 대령을 처형합니다.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말이죠. 사형날짜가 1950년 9월 21일 인걸 감안하면 당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하고 서울 수복을 눈앞에 둔 상황, 즉 불리한 전세가 역전되던 시기에 왜 그 책임을 그때 물어 죽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고 북한 김부자의 노예로 살고 있는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 지원 물자를 보내도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불쌍하게 여긴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이 김씨 정권이나 남한 정부의 도움으로 생활 수준이 나아질수 없는 이유는
전생에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리며 학대했던 30% 정도의 양반들이 북조선의 노예로 태어나서 살면서 자신의 업보를 모두 씻어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의 김부자 정권이 남한 인구의 절반 정도의 북한 주민을 학대하고 착취 하면서도 여전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이유 역시 전생에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리며 학대했던 사람들이 모두 북한 김부자의 노예로 태어나서 자신들의 업보를 씻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만약 앞으로 전생에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리며 살았던 30% 정도의 양반들이 모두 북한에 태어나서 자신의 전생의 업보를 모두 씼어내면 북한 김씨정권도 무너지고 북한 주민들도 노예 상태를 벗어나서 자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수 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전생의 업보를 모두 씻고 노예 상태를 벗어날때가 되면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태극기의 모양도 바뀔 것이다.
하늘이 부여한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수 없다. 아무리 인간의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 한게 있다.
태풍 이나 지진 , 화산 폭발 , 인간에게 부여한 운명은 하늘의 뜻을 거스럴수 없는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