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폭동과 무등산의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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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의신 작성일21-05-29 16:57 조회2,2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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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 일 광주폭동을 일으킨 북괴군은 5월 21일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밤중에 광주 교도소를 5차례 공격하다 430명 정도가 떼죽음을 당했다.
이때 떼죽음 당한 북괴군을 추모하는 노래가 무등산의 진달래 인데 이 노래가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북한 당국이 확성기를 통해서 들려 주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가 1980년대에 북한 전역
에서 들려 주던 노래는 아니다.
내가 탈북민이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 실시간 방송 할때 북한에 있을 당시에 무등산의 진달래 노래 들어본적 있냐고 물어 봤는데 아무도 들어밨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5 ~ 6군데 물어 봤는데 그 중에 무등산의 진달래 노래 들어 봤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래서 무등산의 진달래는 북한 전역에서 확성기를 통해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들려 주던 노래가 아니고 일부 지역 에서만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들려 주던 노래다.
그러면 무등산의 진달래 노래를 들려주던 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아주 특별한 곳으로 볼수있다.
무등산 진달래 노래를 들려주던 곳은 북괴 특수군이 가장 많이 파견돼서 떼죽음 당하고 돌아오지 못한 지역으로 볼수있다. 그래서 다른 지역과 달리 가장 많이 떼죽음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지역의 북한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북한 당국이 확성기를 통해서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들려 주었다고 볼수 있다.
북한이 교도소 및 주요 건물을 습격하고 대혼란을 유도해서 반정부 폭동으로 한국정부를 타도 하고 적화 통일 하려는 계획은 1980년 5.18 광주폭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1965년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남한에 무장게릴라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됐던 김일성, 그 후로는 차츰 대담하게 특수군을 수만 명 단위로 양성하여 대남침투 및 해외수출에 사용해왔다(2008.7.4.연합뉴스).
1968년에는 33명을 김신조 사건에, 120명을 울진삼척 민간학살 사건에 보내 게릴라 작전을 수행케 함으로써 사회혼란을 주도했다.
김신조 일당은 원래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대통령을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암살, 국방부 공격 및 요인암살 , 서울 교도소 공격후 죄수 석방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한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를 꾸민 다는 대규모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9일 뒤인 1월 30일에 베트남 에서 일어나는 테트 대공세와 같은 작전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서 31여명을 침투 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난것이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 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사흘뒤인 24일밤 김신조 일당 1 ~ 2 명이 미군 관할인 서부전선 철책을 뚫고 월북 했다는 사실이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1968년 김신조 사건과 1980년 5.18 광주폭동은 교도소 및 주요 건물을 습격하고 사회혼란을 일으켜서 반 정부 폭동으로 확대해서 적화 통일 하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사건후 삐라 유포 계획 까지 같다. 여러가지 면에서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사건과 비슷한 5.18 광주폭동은 대통령 암살사건도 북괴가 개입된 사건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1979년 10.26 사건도 정치권과 군 내부 간첩들에 의해 매수된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 이 살해 되었을 것이다.
10.26 사건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었던 정승화가 궁정동 안가에서 총소리가 나고 피에 묻은 채로 정승화 차에 타는 김재규를 보고도 체포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고 김재규의 부하 2명 역시 총소리가 나는 즉시 대통령 경호원을 살해 하라는 지시를 따른 것으로 봐서 당시 정치권과 군 내부 간첩들과 반 박정희 세력들이 연합해서 일어난 사건이 김재규에 의한 대통령 피살 사건일 것이다.
정치권과 군 내부 간첩들이 반 박정희 세력중 한명인 김재규를 설득 매수해서 부추긴 사건이 김재규에 의한 대통령 피살 사건인 것이다.
김재규의 대통령 암살사건은 평소 갈등을 빚던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 속에서 부마 사건으로 더욱 충돌하게 되고 그 과정에 평소 차지철을 편들던 대통령과 함께 차지철 까지 살해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김재규는 10ㆍ26 전에도 세 차례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10ㆍ26 이후 열린 군사재판에서 이같이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JTBC가 군 관계자로부터 입수한 10·26 군사재판의 녹취 자료에 따르면 김 전 부장은 1974년 9월 건설부장관 임명식, 1975년 1월 건설부 순시, 1979년 4월 궁정동 안가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암살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장관 임명식 때 몸에 권총을 휴대한 채 사령장을 받으러 갔고, 박 전 대통령 순시 때도 태극기 안에 권총을 숨겨뒀다고 한다. 그러면서 “각하(박 전 대통령)하고 동시에 없어진다(는 각오를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모두 무위에 그쳤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보수 정권은 항상 좌익과 정권을 잡으려는 세력들이 정치권과 군내부 , 사회 곳곳에서 정권을 타도 하려 했다.
민주 노동당 대표였던 권영길씨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박정희 암살 계획을 세웠고 일본 조총련 간첩 문세광도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 하려 했고 박정희 대통령 최측근 으로 알려진 김재규도 대통령을 암살하기 전에도 3번이나 암살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그 당시 좌익과 정부에 불만 세력들이 사회 곳곳에서 대통령을 암살하고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볼수 있다.
어느 한 탈북민은 5.18 광주 폭동 당시와 폭동이 진압된후 2주 동안 북한 전역 에서는 5.18 광주폭동 전개 상황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고 북괴군이 광주에 가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5.18 광주 폭동 당시 찍힌 사진 분석에 따르면 군인 광수는 20명 정도 이고 4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한인 들 이다. 그래서 5.18 광주폭동에 참여한 북한인은 수사기록에 나타난 600명과 사진분석에 의해 드러난 460 여명 그리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민간인 위장 북한인 500 여명 정도로 추산하면 모두 1600 명 정도 일 것이다.
그러면 1600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광주 폭동에 참여하기 위해 소규모로 조금씩 온다 해도 한국군에들키지 않고 NLL 이나 휴전선을 넘어서 오기는 사실상 불가능 하다.
그러면 1600 여명의 북한인들이 들키지 않고 짧은 시간에 대규모로 광주에 올수 있는 방법은 중국을 통해서 오는 방법이 있다.
1965년 모택동이 김일성 에게 남한에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는 강요를 받은 김일성이
그 후로 차츰 대담하게 특수군을 수만 명 단위로 양성하여 대남침투 및 해외수출에 사용해왔다(2008.7.4.연합뉴스).
모택동의 무장 게릴라 봉기를 실천 하기로 한 김일성이 남한에 짧은 시간에 들키지 않고 대규모 북한인을 침투 시키기 위해 중국 모택동에게 장소 제공을 요청 했을 것이고 그 동안 오랫동안 남한의 정치권과 군 내부에 구축해 놓은 간첩들을 활용해서 북한인들이 전라도 해안에 도착하기 직전 한국군을 전라도 변산 반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 시키라는 지령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와 가장 가깝고 중국 불법 어선의 출발지인 산둥반도의 스다오항 에서 1600 여명 가량의 북한인을 중국 국적의 큰 배와 중간 정도 크기의 배를 이용해서 단시간에 전라도 해안에 침투 시키고 한국군은 북한인들이 전라도 해안에 도착할 시점에 전라도 변산 반도를 비워서 대규모 북한인들이 광주 사태에 개입할수 있게 도왔을 것이다.
북한인의 광주 침투를 돕기 위해 변산반도를 지키던 한국군을 다른곳으로 이동 시킬 정도면 5.18 광주 폭동에 참전했다가 잡힌 사람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풀어줬을 것이고 5월 21일 밤 광주 교도소를 습격하다 죽은 북한군 시신도 안전하게 숨길수 있도록 돕거나 눈감아 줬을 것이다.
1968 년 김신조 일당이 북한에서 당초 계획했던 것과 1980년 5. 18 광주 폭동이 거의 같다고 볼수 있다 . 한가지 다른점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은 북한군 주도로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지 않고
교도소 및 주요건물 , 대통령 ,요인 암살을 계획하고 사회혼란을 유도해서 정부를 무너뜨리고 적화통일을 계획했던 것과 달리 1980년 5.18 광주폭동은 북한군의 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긴채 대통령 암살 ,교도소 및 주요건물 파괴, 요인 암살, 반정부 폭동, 적화통일을 실천 및 계획 했다는 점이다
그 후 광주 사태가 종료되고 모두 중국 국적으로 위장한 큰 배에 태워서 중국 산둥반도의 스다오항을 거쳐서 백령도 인근의 북한 평안도 장산곶으로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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