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멸망 (상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가디언 작성일14-06-01 18:20 조회2,054회 댓글1건관련링크
본문
1453년 5.29. 천년의 영화를 누린 비잔티움 제국(콘스탄티노플)의 文明이 야만인 투르크 족(오스만 터키)침략으로 멸망했다. 한 제국이 멸망을 초래하기까진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 작당으로 나라를 망친 건 어느시대나 같았다.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멸망 할 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제국의 終末이 가까우면 그 나라 국민. 지도자 모두 하나 같이 부패하고 무기력해져 국가 안보가 군사력으로 지켜지는 것은 잊어 버리고 상대국에 경제 원조로 매달리지만 결국은 적국의 군비확장만 도와주게 돼 더 빨리 침략당하는 결과만 낳는다. 동로마의 멸망도 이런 수순을 밟으며 투르크술탄 메메드 2世에 정복됐다.
AD324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內亂에서 정적들을 쳐부수고 권력투쟁에 승리하나 그 과정서 장인 막시미아누스황제. 처남 막센티우스정제. 매부 리키리우스황제 등을 차례로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는 제위를 위해 군사적 재능이 월등한 장남 크리스푸스를 계모황후와 밀통했다는 죄목으로 죽였다.
이 모든 사실을 아는 로마인의 따거운 눈을 피해 동방에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 보스포루스해협 연안이며 그리스의 옛 도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324年착공~330년 5.11일 준공. 6년 공사 끝에 완공했다. 건설한 새 수도는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Constantinople은 세모꼴의 해양 도시로 군사적으로 천연의 요새였다. 동쪽은 마르마라 해로 북풍과 센 조류가 흘러 전함의 접근이 어렵고 서쪽은 황금 각 灣에 접해 한面만 육지로 이어지는 위치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삼중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은 지중海와 에게海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내 성벽은 높이 17M× 너비 5M에 40M마다 높이 20M× 너비10M의 사각형 탑이 연결되어 있고, 外성벽은 높이 10M× 너비3M에 역시 40M 간격의 높이15M× 너비6M 탑들이 내 성벽 탑과 엇갈리게 서 있다. 외성벽 밖에 깊이10M ×너비 20M의 목재 호를 가로 놓아 그야말로 난공불락 성채다.
Constantinople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누스11세로 팔라이온러구스였다. 성실하고 깨끗한 인품에 평화 시의 황제로는 흠 잡을 곳 없는 인물이나 국가위급 전란時는 과단성이 없고 머리회전 늦어 침략자에 야욕의 제물이 된 황제였다.
재상 루카스 노타리스는 재물을 중요시한 인간으로 공무는 뒷전에 돈벌이 치중하여 自由무역한 콘스탄티노플리(Constantinople)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는 적국 투르크 술탄과도 연결 라인을 가져 그쪽 부탁도 들어주며 나중대비도 하는 이중행보의 반역者였다.
재상 노타리스는 황제에게 Constantinople을 포기하고 망명했다, 재기하라 꼬이나 황재는 그럴 바엔 죽는 게 낳다 고 노타리스 말을 듣지 않았다. 잘 키운 반역자 한 명이 적국에는 백만 대군보다 낮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나중 城이 함락되자 제일먼저 금은보화(金銀寶貨)를 바쳐 들고 정복자가 된 술탄 앞에 나가, 잠시 동안은 후대를 받는다.
그러나 두 달후에 동성애자인 술탄이 노타리스의 12살 아들을 놀이 상대로 궁전에 보내라 명령하자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어 술탄의 병사들이 두 아들+ 노타리스의 목을 베여갔다. 백성의 원성을 산자를 살려두면 민심안정(民心安定)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과 기존의 지배층단절(斷絶)을 위한 정책서다.
반역자는 일신 영화를 위해 조국을 배반하나 도움준 상대도 믿질않아 결국은" 적국과 내통했다는 죄목"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역사에는 태반사다.
재상 노타리스도 평소에 이점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벌려놓은 사업체가 많아 딸하나만 돈과 함께 유럽으로 도피시켰으나. 그 딸 마저도 동로마의 멸망이 노타리스의 반역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는 애국지사의 분노에 역사적 심판을 받아 병원서 암살당했다.
반역자가 거만의 재산(財産)과 따르는 패거리가 많으면 퍼준 공로는 잊고 무리와 함께 일괄처형이 정복자의 새정치의 민심안정 정책(政策) 1호다.
노타리스의 총리시절, 헝가리 무기제조기술자 우르반이 궁전에 찾아와 자기가 개발한 대포는 Constantinople 城, 3중 성벽(三중城壁)을 파괴할 수 있으니 新발명품을 사줄 것, 을 제안하나 재상은 우르반의 설명조차 듣지 않고 문전박대했다.
신무기 개발로 적국의 신경을 건드리면 전쟁발발로 이어진다는 판단에서다. 궁전에서 쫓겨나 무기발명자 소문이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 귀에 들어갔다. 즉시 사람을 보내 수도 아드리아노플 리 술탄궁전으로 불렀다.
설계도(設計圖)를 한 아름 안고 온 무기발명자(우르반)의 말에 귀을 기울이던 술탄은 무기기술자가 요구하는 금액 3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길이 8m 포탄무게600K, 30마리의 소가 끄는 대포생산이 시작됐다. 우르반의 8대 대포가 Constantinople성벽 함락의 일등공신( 一等功臣)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대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투르크의 술탄은 콘스탄티노플과 상호불가침조약(相互 不可侵條約)을 체결한다.
Constantinople에서 북쪽 300K지점의 유목민족 투르크족의 수도 아드리아노플 리 는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술탄 메메드 2세는 21세 약관의 젊은이로 냉혹한 전략가(戰略家)였다.
戰略이란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하는 전쟁기술로 터키의 젊은 술탄은 인간심리를 보는데 정통했다. 어떤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조용하며 열정적인 성품이나 결단성에 있어 한번 결심하면 대담한 방법으로 이루어내는 자질의 소유자였다.
부친술탄 무라드와 노예출신 어머니 사이에 셋째아들로 두兄이 사고로 죽자 중신들 농간에 술탄 눈 밖에 나 수도서 멀리 떨어진 마니사서 칩거 중 부왕 죽음을 사흘 만에 알았다.
소식을 접하자 왕궁서 사신들이 올 것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말을 타고 “나를 따를 자 오라” 이 말만 던지고 수도로 전력 질주했다, 1451. 2.18일 19살 나이로 술탄이 됐다. 즉위 날 경쟁상대 이복동생은 욕조서 죽어 투르크 제국의 즉위직후(卽位直後) 동생살해 관습이 됐다.
농간하던 간신들은 2년 후Constantinople 성을 정복하고 한 달 뒤 적과 내통 죄로 처형시킨 정략적 인물이었다. 역사는 가정할 수 없으나 똑같은 조건에 콘스탄티노플 황제와 뒤바뀌었다면 결코 오스만 터키는 Constantinople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통치자 한사람의 자질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바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차대하다.
콘스탄티노플 전성기는 인구100만이 넘었으나 전쟁소문으로 상류층은 거의 국외로 빠져나가 주민35.000명 정도였고 군대는 용병포함7.500명이었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황제는 투르크의 침략을 예감하고 유럽국에 지원을 요청하나 기독교와 이슬람 대결에도 불구하고 유럽군주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대성당 수도사들이 보낸 “이단의 도움을 받기보다 이슬람통치를 받겠다.”는 교리분쟁 편지질에 이견이 생겼다.
1453년 4. 2. 술탄 메메드 2세는 서유럽 국가들이 아무도 콘스탄티노플을 돕지 않는다는 정보를 최종 점검하고 친위대 에니젤리 군단 15.000명 포함. 총16만 군대를 끌고 거포 8대를 수백 마리 소에 끌려 동로마수도로 진격했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연방 사신을 보네 조공금을 받치겠단 조건으로 평화회담을 애걸하나 술탄 대답은 한결같은 제위서 물러나고 나라를 바친다면 백성은 살려준다는 대답이었다.
상호불가침조약(條約)이나 평화회담. 신뢰 프린세스는 국가 방위체제가 작동할 때만 지켜지는 것으로 사실상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Constantinople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국민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라며 전쟁을 선포하나 심중으로는 난공불락의 성벽을 믿었다. 아무리 각오가 대단해도 측근을 입으로만 강골인 위인들로 안보체제를 만들면 모든 게 허사라는 걸 세상 물정 모르는 통치자는 몰랐다.
1453. 4.12일 우르반이 만든 거포 탄환이 성벽에 부딪쳐 파괴되는 성벽을 보자 성안사람들은 흔들린다. 투르크 용병이 콘스탄티 성벽을 향해 공격하고 정규병은 용병들 뒤서 후퇴하는 병사들 목을 사정없이 베는 게 성벽에서 보였다.
백병전이 벌어지고 일진일퇴가 50日 동안 반복됐다.Constantinople성안 병사들은 모두 용감히 싸웠다. 황제도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을 칼로 후려치면 분전하나 성당과 왕궁 창고에 쌓인 보화로 용병을 모집하는 작업은 하지 않고 어떻게나 서 유렵서 자기를 보고 구원병을 보낼 것이라 외교적인 생각만 했다.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천년 제국 - - - 동 로마 제국{비잔틴 제국, 콘스탄티노플 제국}! 안타깝죠! 또 아주 잘 망해버렸다는 비정한 생각도 병행되고요! ,,. '터키'는 '투르크', '돌궐'의 가차식 영어 발음. ,,. '돌궐'은 우리와 같은 고구려의 하층부를 형성키도 했었다는 바, 몽고의 한 갈래. 우리 한국을 동포.형제의 나라로 규정 1950.6.25 때 1개 여단을 참전시켰죠. 그러자 GREECE도 우리도 참전시커야 전쟁 경험을 얻는다면서,,. 도도히 흐르는 문장! 잘 읽었읍니다. 'ISTANBUL 이라는 터키 민요를 들어 봅니다. ↔ ♪ http://wsm.ezsitedesigner.com/share/scrapbook/27/274741/Four_Lads_-_Istanbul_Not_Constantinople_.mp3 ↔ 미국 가수 'The Four Lads' 의 노래. 국민학교 6학년이던 1957년도에는 강원도 춘천 시내 극장에서는 이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 ,,. ISTANBUL {가수 The Four Lads}
ISTANBUL was CONSTANTINOPLE!
Now it's ISTANBUL, not CONSTANTINOPLE!
Been a long time gone, old CONSTANTINOPLE, still it's Turkish de light!
On no a moon-lit night!
Ev'-ry gal in CONSTANTINOPLE lives in ISTANBUL,
not CONSTANTINOPLE!
So if you've a date in CONSTANTINOPLE,
she'll be wait'-in in ISTANBUL!
↘ Repeat ↙
Even old NEW-YORK was once NEW-AMSTERDAM!
Why they changed it I can't say!
'People just liked it better that way!'
≪'Take me back to CONSTANTINOPLE!'≫
"No! You can't go back to CONSTANTINOPLE!"
"Now it's ISTANBUL, not CONSTANTINOPLE!"
≪'Why did CONSTANTINOPLE get the works?'≫
"That's nobody's business, but TURKS!"
ISTANBUL! - - - - - - - - - - ISTANBul! - - - - - - - - - - ISTANbul! - - - - - - - - - - ISTAnbul!
↘ ↘ Repeat ↙ ↙
Even old NEW-YORK was once NEW-AMSTERDAM!
Why they changed it I can't say!
'People just liked it better that way!'
≪'Take me back to CONSTANTINOPLE!'≫
"No! You can't go back to CONSTANTINOPLE!"
"Now it's ISTANBUL, not CONSTANTINOPLE!"
≪'Why did CONSTANTINOPLE get the works?'≫
"That's nobody's business, but TURKS!"
ISTANBUL~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