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34주년에 새로 밝혀진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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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사논객 작성일14-05-17 22:47 조회2,091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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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참사의 비극은 선장의 일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영영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할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타까운 사건이 우리가 영영 놓쳐버릴 뻔 했던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 45분 사건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복원시켰습니다. 지난 4월 16일 선체가 기울기 시작하였을 때 구조작업을 하기 위하여 최초로 도착한 UH-1H 헬기가 바로 34년 전 5월 21일 오후 2시 45분 20사단 61연대를 교대 병력으로 투입하는 것이 가능한지 살펴보려고 전남도청 상공을 정찰비행하다가 시민군의 대공사격으로 6발을 맞고 격추될 뻔하였던 바로 그 헬기이며, 그 사연이 1995년도 검찰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첨부 문서에 사고해역을 굽어보는 동거차도 해안에 대기중이던 이 헬기 모습이 있습니다. 진도군에서 구조작전 지역권 섬들을 운항하던 배의 항해사기 이 헬기를 보는 순간 34년 전 백승목 중령이 조종하고 자신이 탑승했던 그 헬기와 똑같은 헬기라 반가와서 뒷날개 일렬번호를 확인해 보니 바로 그 헬기였습니다. 여기서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미스테리가 부분적으로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 때 금남로에서 울리던 총성은 공수부대가 쏜 것이 아니라, 광주MBC 방송국 철탑 위의 복면시민군이 쏜 총에서 울려나온 총성이었으며, 복면시민군 총탄 6발이 명중하였을 때 등에 입었던 관통상 흉터가 그 증거입니다.
광주MBC 방송국 철탑 위 복면시민군의 대공사격이 있기 한 시간 반 전인 오후 1시에 금남로에 울린 최초의 총성은 가톨릭센터 옥상 위 시민군 저격수가 쏜 총에서 나온 총성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광주대교구 사무국장으로 가톨릭센터를 관리하던 유팔동 형제의 증언 등으로 분명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기록의 맛보기 글을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794693123877265&l=55bc0eff1e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5월 23일 광주에 도착하시어 5월 19일 사건 현장 목격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날 생긴 유언비어를 들으신 조갑제 기자께서 잘못 알고 있는 사실도 있었습니다. 19일 오후 1시경에 시위군중이 가톨릭센터에 불을 지르려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층에 입주해 있던 임정하씨는 시위군중이 불붙은 솜방망이를 가지고 센터 건물에 들어오는 순간 센터 건물에 불 지르면 안된다고 외치며 발로 불방망이를 걷어차 불을 끄자 쇠파이프를 든 청년들에게 머리를 맞아 실신하였습니다. 조선대 임시막사에서 점심식사 중이던 11공수여단은 가톨릭센터 7층에서 기독교방송국을 경비하던 6명의 31사 병력을 구출하라는 지시를 받고 센터로 들어오는 순간 임정하씨가 쓰러진 것을 발견하여 전남대학병원으로 후송하였습니다. 시위군중 쇠파이프에 뇌손상을 크게 입은 임정하씨는 일 년간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의식회복을 하였습니다.
공수대원들은 그 날 좋은 일을 했던 것입니다. 시위군중이 가톨릭센터 건물 방화를 하는 것을 막은 것도 좋은 일이었으며, 임정하씨 생명을 구해준 것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생긴 악성 유언비어는 공수대원이 가톨릭센터 건물 안에서 시민 50 여명을 죽여 시체를 트럭에 던져 어디론가 실어갔다는 것입니다.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가 사실 확인을 안하고 상경하여 이 유언비어로 김수환 추기경을 속였으나, 나중에 추기경은 광주를 방문하여 그것이 유언비어라는 것을 알고 구술 증언을 남겼습니다. 이런 진실 기록의 맛보기 글을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796408997039011&l=2be30df88f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19일 사망자는 없다는 과학적인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갑제 기자도 여전히 유언비어의 영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시며, 황석영이 그 악성 유언비어를 그대로 자기 책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계엄군이 좋은 일을 하고도 괴담같은 유언비어로 인하여 억울한 누명을 썼던 것입니다.
세월호 침몰 참사의 슬픔은 한 번 잃어버린 구조 기회를 나중에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광주사태 34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이제라도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성 유언비어들을 걷어내고, 광주사태의 참 이야기를 되찾아 회복하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34주년에 새로 밝혀진 사실들이 아주 많이 있으며 그 중 몇 개의 맛보기 글들을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770977502915494.1073741863.100000097536812&type=1&l=4261d9d1ff 에서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2014년 5월 18일 역사학도
댓글목록
차기대통령님의 댓글
차기대통령 작성일
댓글에 감사하며, 질문과 제안을 드립니다.
1. 첨부 문서를 일어보니, 두 번째 문단의 "관통상 흉터"는 당시의 탑승병이었던 항해사가 당한 부상인지요? 만약에 그러하다면 문맥의 정확성을 위하여 "자신의 관통상" 혹은 "항해사의 관통상"으로 표기되면 더욱 정확하겠습니다.
2. 헬기 사진이 수록된 첨부 문서는 세월호 사건 이후의 내용이 언급되어있는데, 이미 책자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서는 제목이 무엇이며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저자는 누구인지요?
3. 본 글 제목에서 "새로 밝혀진 사실들"이라고 하며 "여기서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미스테리가 부분적으로 풀리기 시작합니다"라고 했는데, 어떤 미스테리가 풀어지는지는 정확히 언급되어있지 않군요.
참고: 시간이 없어서 링크된 페북 관련 기사는 아직 읽지 않은 상태입니다.
브라보영영님의 댓글
브라보영영 작성일
노사모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면,
http://www.nosamo.org/center/center_view.asp?PNUMBER=08280700000427202554
"...80년 5월 당시 천주교 광주교구 윤공희 대주교께서 카톨릭 회관 8층에서 숨죽이며 금남로 8차선 한복판에서, 충정 진압봉으로 작전명 화려한 외출을 명받은 공수특전사에 의해,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오유월 개패듯이, 대가리가 터지고 난도질 당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겁이나고 오금이 저려 창문 커텐을 움켜 잡은체 벌벌 떨며 서 계셨다고 후에 명동성당에서 고백하는것을 들었다..."
라고 나옵니다. 임정하씨 사건을 윤공희 대주교가 모를리 없을텐데, 노사모 홈페이지에 나오는 증언은 의심쩍은 부분이 있군요.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차기대통령님, <5.18사관의 대전환>이란 제목으로 현재 만들고 있는 책 원고입니다.
브라보영영님, 임정하씨 사건 가해자가 시위군중이었다는 사실은 목격자의 유팔동과 피해자의 임정하의 최근 공식 구술 증언이므로 윤공희 대주교가 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관계자들 중에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조직이 있어서 유언비어가 천주교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가 광주사태 공작을 한 남파간첩 손성모를 오랫동안 후원하고 있어서 새 책에서는 그런 사실을 부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