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유신독재 때문이라는 사기꾼들에 고함
페이지 정보
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4-05-11 06:35 조회1,89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5.18이 維新獨裁 때문이냐, 이 몹쓸 인간들아?
1. 남한의 서울에서: 김대중의 음모
그날 5월15일 시위대 버스에 순경들이 깔려 죽는
사고 발생 직후,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서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서남동, 이해동
등을 불러모아 이른 바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을 작성하고
다음날 5월16일 각 언론사와 대학에 배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비상계엄 즉각 해제,
신현확 총리의 퇴진, 개헌심의위원회의 해체'등에
대해 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시에는 이른바 '국민연합'이 5월 22일부터 국민과 함께 행동에 들어갈 것임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경우 모든 책임이 정부에게 있음을 경고하면서 '최후통첩'임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의 성격을 규정한다. 광주사태 당시 서남부지역
에서 나돌던 유언비어 중 하나가 광주 민중봉기가 성공하면 김대중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시장 군수를 할 수 있다는 유언비어였다. 5월 17일 김대중 연행사건 당시 김대중의 경호원이었던 함윤식씨도
광주사태 이전에 이미 감투가 미리 배분되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하다: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전복 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 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 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 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
2. 북한에서: 대남게릴라전 획책
1980년 3월28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 보냈다.
“북한은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틈타 금년 봄에 대량의 무장간첩을 남파, 지방도시의 방송국을 점령하는 등 본격적은 대남게릴라 활동을 벌일 계획으로 있으며 지난 23일 한강에서의 무장공비 수중침투사건과 25일 포항 앞바다에서 발각된 무장간첩선 사건은 이 간첩 작전의 일환이라고 동경에서 발행되는 통일일보가 북한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23일 보도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이와 같은 “대남특수군사작전” 계획을 작년 가을에 수립, 인민군 제1부 총 참모장이자 로동당 정치위원후보인 인민군 상장 김철만을 이 계획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김은 1.21사태와 울진 삼척공비사건에 동원했던 124군부대와 제7정찰여단을 통합한 “특수군단”과 “청년돌격독립여단”이라 불리는 특공게릴라 부대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3. 남한의 광주에서: 국민연합-민주청년협의회-카톨릭농민회
민주청년협의회(약칭, 민청협, 김대중의 국민연합이 지배한 광주운동권) 회의에서 결의한 그대로 따르기로 12일에 결정한 국민연합은 16일에 최규하 대통령께 최후통첩을 보냈다.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국무총리의 퇴진, 정부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 등에 대해 5월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의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국민연합은 5월22일부터 이 요구를 관철하는 민주화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이 경우에 발생되는 모든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5월 22일부터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20일부터 일으키겠다던 민중봉기가 이날 이틀 연기되었다.
국민연합 편에서 너무 시간이 촉박하였기 때문에 김대중이 이틀 늦추었다. 따라서, 22일부터의 전국적 민중봉기는 공개적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주운동권 윤상원과 전라도 운동권 서경원이 비밀리에 추진하였으며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거사계획이
있었다.
그 무장봉기 거사계획이 5.18 비밀문건 "자유노트" 13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농촌 파급효과를 위해 공용 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14시부터 18시 사이에 “카농”조직을 이용하여 죽창, 밧데리 등을 준비해서 폭동을 일으킨 후 방송국과 공공건물 및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한다." 여기서 [카농]이란 서경원이 당시 회장이던 카톨릭농민회의 약칭이다. 함평에서 농민운동 하던 서경원이 1988년 김대중의 평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의 동지들이 남민전 간부들이었는데, 그해 12월 그의 동지들이 출옥하고 광주청문회가 김일성 입맛대로 진행되자 김일성이 문익환 목사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문익환 그는 1980년 5월 8일 조성우에게 폭력시위 방법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던 인물이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기 앞서 서경원이 방북하여 김일성이 주는 만 불 단위의 거액 하사금 혹은 공작금을 받아 일부 김대중에게 전달하였다. 서경원은 1980년 5월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준비를 지휘하던 자다. 어째서 1980년 5월의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의 두 당사자였던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을 김일성이 광주청문회 직전과 직후 1988과 1989년에 평양으로 불러 들였는지 짐작 갈 것이다.
4. 5.18측의 뻔뻔스러운 거짓말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미군의 지휘를 받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항쟁 기간 중 22~27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세계사에서 그 유래가 드문 자치공동체를 실현하기도 했습니다. (5.18기념재단, “기억해야 할 5.18민주화운동”에서)
5.18기념재단은 5.18이 단순히 계엄군의 시위진압 때문에 발생했다는 듯이, 김대중을 정점으로 한 광주운동권의 사전 계획을 감추고, 밑도 끝도 없이 계엄군의 진압 운운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10여 일 동안 광주를 그들이 말하는 해방구로 만들어 놓은 엄청난 반란행위가 사전에 아무 계획도 없이, 전라도 지역 무기고를 대부분 탈취하여 대한민국 국군과 전투를 벌이고, 도청을 점령하며, 광주교도소를 수 차례 습격하였다면, 대체 어느 바보 멍청이가 그 말을 믿겠는가? 제발 뻔뻔스런 거짓말 이제는 그만 하고 그 무겁고 음산한 어둠의 굴레를 벗어 버리기 바란다.
이상.
2014. 5. 11. 만토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