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자유통일'임을 선언하고 머저리 장수들을 경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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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전원 작성일14-04-01 00:01 조회1,6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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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3-31 12:04
글쓴이 :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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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7.4성명을 더 이상 인용 말라
2002 방북이후 박근혜가 걸은
길은
박근혜는 7.4성명(1972)을 6.15선언의 원조라며, 6.15선언의 정당성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박정희는 7.4성명 발표 후 불과 3개월 만에 무릎을 치고 “내가 속았다”며 유신을 선포하고 긴급조치들을 쏟아냈다. 7.4성명으로 ‘통일’이라는 단어조차 금기시 됐던 통일의 빗장이 풀리자, 지하에 숨어있던 빨갱이들이 적화통일 활동을 드러내 놓고 실행했다. 모든 간첩활동과 모든 이적활동이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합리화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런 빨갱이들의 노골적인 준동 행태를 보고, 너무 놀래 금방 문을 걸어 잠궜다. 7.4성명의 3대 키워드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단어를 외치는 인간들은 빨갱이이고, 이런 말을 외치는 자들의 행동을 밀착 감시했다. 지하에서 행동하던 빨갱이들이 7.4선언으로 인해 노출되었고, 그 노출된 빨갱이들을 많이 잡아내기 위해 발동된 조치가 긴급조치들이었다.
북한은 7.4성명에 붉은 바이러스를 장입해놓았다. 박정희는 이를 불과 3개월 만에 깨닫고 유신으로 나라를 지켰다. 이러한 내용은 아래에 밝히는 바와 같이, 2012년에 노출된 루마니아 외교문서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가 구국의 결단으로 어렵게 붙잡은 빨갱이들을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이라며 1인 당 수억-수십억 단위의 보상을 해주고 있다. 박정희가 김대중 선생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김대중에 빌었고, 유신과 긴급조치에 대해 좌익과 같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박정희를 가장 괴롭힌 전태일 신화를 숭배하며 전태일 가족을 면담하려 많은 노력을 했다.
4.3반란사건의 역사와 적화통일을 획책한 5.18반란사건을 민주화운동이라며 늘 광주를 찾아 반란자들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광주의 마음과 마주하러왔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이번 목요일인 4월 3일에도 아마 제주도로 날아갈 모양이다. 왜내 하면 박근혜는 4.3사건을 국가가 나서서 추모하기로 결정한 최초의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냥 넘길 일이 절대 아니다. 수도를 분할하여 공무원과 그 가족들에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었고, 행정의 효율을 고갈시켰다. 용산에서 발생한 경찰과 깡패 단체인 전철연과의 대치가 있었을 때 박근혜는 경찰을 나무랬다. 국회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대치했을 때 거의 언제나 민주당 편을 들었다.
2005년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 할 때 미국에 날아가 “김정일은 약속을 잘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니 몰아치지만 말고 북한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들을 해서 미국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언제 김정일과 무슨 약속들을 그리도 많이 했기에 “김정일은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보증을 미국에 서주었는가? 우리는 김대중이 “김정일은 식견 있는 지도자”라는 말을 했을 때 김대중을 얼마나 경계하고 욕했는가? “식견 있는 지도자”라는 김대중의 말과 “약속을 잘 지키는 지도자”라는 박근혜의 말 중 어느 말이 더 욕을 먹어야 하는가?
2002년 5월 14일, 박근혜는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동아일보 기자들과 ‘귀국 인터뷰’를 했다, “6.15공동선언도 7.4공동성명에서 그 뜻이 뿌려진 것이다. 7.4공동성명 채택당시 씨앗이 뿌려졌지만 아직 완성이 안됐는데 우리 세대에 결실을 보아 평화통일을 위해 같이 힘을 합쳐 노력하자는 얘기를 했다. 내가 '약속하셨죠?, 라고 말하자 김 위원장은 '약속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 후 박근혜는 빨갱이들이 벌이는 6.15공동선언 촉구 대회들에 나갔고, 6.15선언과 7.4성명을 지지하고 관철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이런 색깔을 바탕으로 전 동독 지역인 드레스덴에 가서 북한이 유엔제재만 벗어나면 통일 이전에 남한 자금을 북한에 아낌 이 퍼주고, 국제사회로부터 빚을 내고 보증을 서서라도 7.4성명에서 노무현이 약속한 수십조 단위를 훨씬 넘을 경제제원을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남한으로 하여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게 하겠다는 실로 간담이 서늘한 메시지였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해야 할 시기가 따로 있다. 이른바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평소 박근혜가 우익의 길을 걸었다면 나는 그의 드레스덴 연설을 그저 ‘소녀적 발상’이요 나이브해서 한 감성의 표현이겠거니 치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제까지 철저하게 좌익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그가 우익사회 일각으로부터 아직도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박정희의 딸이고, 소속이 새누리당이었다는 오직 이 2개의 사실 때문이었다.
2002년 5월 방북으로부터 지금까지 박근혜가 보여준 행적은 그 어느 빨갱이 행적보다 더 빨갛다. 만일 이런 행적을 남긴 사람이 민주당 소속이었다면 국민은 김대중보다 더 위험한 빨갱이로 인식했을 것이다.
북괴가 설치한 7.4성명의 덫, 유신으로 벗어난 박정희의 결단 박정희는 왜 1972년에 7.4공동성명을 냈을까?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북괴는 한편으로는 평화공세를 다른 한편으로는 김신조 사건, 프에블로호 사건, 130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한 울진-삼척 살육사건을 포함하여 거의 매일 같이 남한의 정세를 뒤흔들어 놓고 여객기 및 어선들을 무자비하게 납치해가고 무고한 국민과 장병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에 박정희는 경제건설과 안보역량 강화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북한의 대화공세에 호응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7.4공동성명이었다.
우리민족끼리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그럴듯한 명분이 담긴 7.4공동성명으로 인해 남북한 사이에는 정부수립 이후 금기시됐던 통일 무드가 불붙기 시작했다. 지하에 숨어 있던 빨갱이들이 민간단체들을 만들어 통일을 한다며 공식적으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섰다. 여기에 박정희가 망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정치 모리배들이 민심을 자극하고 선동했다.
이에 박정희는 7.4성면 3개월 만인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모리배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계엄령을 선포한 후 11월 21일,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붙여 91.9%의 찬성에 의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을 발효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듬해인 1973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하면서 빨갱이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7.4공동성명이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유신을 통해 그에 대한 역대책을 세운 데까지는 불과 3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은 일사불란하게 대남적화통일을 추구하고 있는데, 자기가 정권을 놓으면 국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김대중이나 김영삼에 정권이 가면 국가는 적화통일 될 것이라는 게 당시의 박정희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국민의 92%가 유신헌법에 도장을 찍어 준 것이다. 유신이 국가를 구한 것이다. 이를 부정할 국민은 빨갱이들이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무식꾼들뿐일 것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대에는 자주, 평화,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를 이단시 해왔다. 이런 사실도 아직도 캄캄하게 모르고 박근혜는 7.4공동성명과 6.15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니, 국가장래를 위해 참으로 딱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美우드로윌슨센터가 공개한 루마니아 외교문서(요약) 2012년 7월 3일 수많은 매체들이 매우 중요한 외교문서를 공개했지만 이 내용을 중요하게 다룬 언론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7.4공동성명은 김일성이 박정희를 옭아매기 위해 고안한 덫”이었다는 이 기막힌 사실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언론과 학자들이 없다는 것은 우리 언론-지식인들의 대부분이 역사와 안보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2012.7.4. 연합뉴스는 “북한이 1972년 7월 4일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으로 상징되는 남북대화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흔들어 야당 진영의 집권을 도우려했음을 입증하는 외교문서가 공개됐다.”는 긴 제목의 기사를 냈다. 1973년 3월 8일자의 루마니아 외교문서에는 당시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를 예방한 김동규 북한노동당 비서가, 1971년부터 강화한 북한의 '대화공세'에 대해 설명해준 내용들이 기술돼 있다. 이하 김동규가 차우세스쿠에 설명해준 내용들이다.
"남측과의 대화를 통해 남한 대중들에 혁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울러 남한 괴뢰도당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혼란상항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의 평화공세가 이룩한 또 다른 큰 성과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할 어떤 명분도 없다는 점을 알릴 수 있었다. 7.4공동성명서에서 우리가 남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7.4 공동성명은 '남북의 통일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이뤄야 한다'고 천명했다.” “남한 혁명운동가들이 지하에서 그들의 활동을 전개해나갈 때 솔직히 현재의 상황은 이전에 비해 매우 우호적이다. 남북공동조절위와 남북적십자대화 등의 대화 채널에 남한의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야당세력 등 북한에 동정적인 세력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1973년 3월 1일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도 있다. 이에 의하면 유신체제가 출범한 이후 북한은 오직 박정희만을 상대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박정희가 모든 남북대화의 통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유신을 통해 야당의 남북대화 참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는 내용이 있다. 1973년 3월 9일과 17일 평양주재 루마니아 대사관 보고 전문도 소개됐다. 북한은 1973년 3월 평양에서 개최된 2차 남북조절위원회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사안을 다른 어떤 안건보다 먼저 해결하자"고 요구했다. 북한은 특히 남북 상호 군축을 위한 5개항을 제안했다. 5개항은 남북 모두 병력규모를 10만명 이하로 줄이고, 외국군의 무기의 반입을 중단하고, 한반도에서의 외국군 철수 등을 골자로 한다.
7.4 공동성명 1주년이 되는 1973년 여름, 남한에 대한 공격을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한 남한에 대해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북한은 자신들의 대화공세 전술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알고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직접 체결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지만 미국은 이를 단번에 일축했다. 1975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담긴 공산권의 결의안이 통과되자 북한은 유엔은 물론 비동맹 세계에서 박정희 정권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화공세를 전개했으나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모든 것이 무산됐다.
결 론 7.4공동성명이라는 것은 북한이 남한 빨갱이들의 적화통일 행동을 노골적으로 수행하도로 해주기 위해 놓은 덫이었다. 이 덫으로 인해 남한 빨갱이들이 “이 때다” 싶어 적화통일을 획책했다. 7.4성명은 박정희가 걸린 덫이었고, 박정희는 유신선포와 긴급조치들로 이 덫을 풀었고, 빨갱이들을 잡았다.
‘통일’? 말이 좋아 평화통일이지 이는 오직 적화통일의 길을 활짝
열어주는 위장이다. 이번 드레스덴 선언에는 ‘통일’이라는 단어만 있지 ‘자유통일’이라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대통령이 통일의 빗장을
푼다는 것은 적화통일의 리더십을 행사하겠는 뜻이다. 통일이 제1의 국책사업으로 선포된 이상, 앞으로는 빨갱이들의 온갖 행동들이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미화되고 정당화 될 것이다.
2014.3.31. 지만원
작성일 : 14-03-31 21:46
작성일 : 14-03-3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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