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0대 불가사의와 천안함 격침( '불가사의', 앞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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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강 작성일14-03-25 21:02 조회1,7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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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근 대장과 6.25전쟁 10대 불가사의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형근 대장은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회고록에서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열거하면서 이 불가사의가 풀려야만 국가의 백년대계가 보장될 것이란 기록을 남기셨는데, 노동신문 특집보도가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특집보도를 읽게 되면 서울이 남침 3일 만에 함락된 배경에 성시백이 있었고 그 공로로 인민공화국 영웅 1호가 되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형근 장군의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일선부대의 남침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
2. 6.25발발 2주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3. 6월 13-20일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4. 6월 11일부터 발령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이 6월 24일 0시에 해제.
5.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외출외박을 허용
6. 6월 24일 저녁에 개최된 육군 장교 클럽에서의 고급장교 댄스 파티
7. 서울 북방으로의 축차적 병력투입으로 불필요한 희생 발생초래
8. 6월 25-27일간의 국군후퇴를 반격, 북진 중으로 허위 보도한 중앙방송
9. 한강교의 조기 폭파단행
10.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
국가의 백년대계가 걸려있는 중차대한 의미의 북한 노동신문 특별보도가 1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사회에 공론화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의 극치입니다. 4.3위원으로 활동했던 필자의 의문은 ‘50년의 6.25남침도, 87년의 KAL기 폭파도 모두 남쪽의 자작극으로 오리발을 내밀던 북한이 왜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97년 5월에는 남침직전까지의 대남공작을 공식인정하고 찬양했나? 이며 김, 노 두 전직 대통령은 어찌하여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그가 공식인정한 대남공작의 중단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는가에 있어 왔습니다.
노동신문 특집보도의 존재에 대한 보고가 없었던지 보고를 받은 대통령이 이를 무시했던지 간에 이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대남공작을 묵인한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대남공작은 집요하게 계속되는데도 우리는 일방적으로 대북 심리전 방송과 비무장 지대에서의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던 것이며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는 대통령의 발언까지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특집보도 1년 전, 영삼 대통령시절에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가 북송되었고 3년 후인 김대중 정권 시절엔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집단으로 북송되어 모두 성시백의 뒤를 잇는 공화국 영웅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 남쪽과 북쪽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남쪽에서 암약하던 북한 간첩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들을 체포하고 수사했던 대한민국 대공수사 요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짐으로서 우리의 국가보안법은 산송장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97.5.26 노동신문 특집보도의 공론화가 구국의 길
성시백의 정체를 알면 문제의 심각성이 보입니다.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장개석 총통의 ‘수도경비사령관’에 해당되는 胡宗南 장군의 유능한 참모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18세 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골수당원으로 대 국민당 공작원으로 활약한 중국공산혁명의 공로자로서 중국 사람들도 그가 조선 사람임을 몰랐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대남공작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 그가 조선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던 것입니다. 북한공작원으로서의 임무를 부여받은 성시백은 일본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여 대북 무역회사 대표로 위장하여 대남 공작활동을 하다가 50년 5월에 검거되어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태윤기 저 ‘회상(回想)의 황하(黃河)’ 제5장 중공의 서울 연안은 어떤 곳인가와 기무사의 “남파간첩 성시백 특집보도 활용관련 참고자료”에서 필자가 정리)
남과 북은 동일화폐를 사용하다가 북한이 47년 12월 1일, 화폐개혁을 비밀리에 단행했고 남한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48년 4월 16일부로 화폐를 개혁함으로서, 대북 무역회사 대표인 성시백에게는 무한대의 공작금이 가용한 데다 장개석 휘하 ‘수도경비사령관’의 명 참모였다는 명성까지 이용하여 이승만 정부의 요인들을 자유롭게 만나며 10개의 신문사를 운영했다고 하니 그의 영향력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 집니다.
4.3폭동 초기에 인민 해방군들에겐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이상 3만원, 그리고 경찰 유력자에게는 100만원(당시 쌀 한가마니가 3백원)의 살해 현상금을 걸고 “목포까지 김일성 군이 내도하였으니 안심하라”는 선전 선동으로 살인을 독려했다(동아일보, 48.5.8)는 보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폭동 진압임무를 수행했던 국군과 경찰의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필자는 97.5.26 노동신문의 특집보도가 성시백의 유령을 살려내는 총동원령이었다고 보면서 오늘 현재에는 김정일의 비밀 특사가 어떤 직함으로 어떤 규모의 공작금으로 어디서 누구를 만나며 몇 개의 신문 혹은 방송을 운영하고 있을 것인가에 온 국민의 관심이 생겨나서 각자의 주변을 살펴보는 경계심으로 무장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북한의 집요한 대남공작도 문제지만 대남공작이 통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여건이 더 큰 문제입니다. 많이 배우고 가진 사람들부터 매사에 모범을 보이며 공무원들이 공무집행이 정확하고 공정하며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잘 한 사람들이 박수를 받는 분위기가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북한의 대남공작에 눈감은 채 정당 간에, 지역 간에, 노사 간에, 머리 터지는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모두 함께 공멸하고 우리의 후손들까지도 부자 세습독재 체제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최악의 가능성에도 눈을 뜬다면 우리가 모두 함께 이룩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영원무궁한 발전은 튼튼히 보장되리라 확신하며 여기서 줄입니다.
2010.6.25.
예 (육)소장 한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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