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4.3위원을 사퇴할 수밖에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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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강 작성일14-03-18 08:16 조회1,665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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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4.3위원을 사퇴할 수밖에 없었나?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는 8명의 국무위원급 공무원(국무총리, 5명의 장관, 법제처장과 제주도지사)과 12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도 존재합니다. 이한동 총리시절, 최초 위촉됐던 12명의 민간위원 중에서 경찰(1) 및 국방부(2) 위촉위원 3명은 2003년 10월 15일, 고건 총리 주재 하에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강행 통과될 때에 동반사퇴 하였음을 밝힙니다.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 교수로서 경찰을 대표했던 이황우 교수와 저는 보고서 전면의 결재란에 ‘부동의’ 서명을 하였으며 보고서의 채택이 선언되는 순간 목청 높여 사퇴 선언을 했고 회의장 밖에서 대기하던 15,6명의 기자단 앞에서 보고서 채택의 부당성을 고발했으나 기사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5일 후 노무현 대통령은 군과 경찰위촉위원 3명 전원이 부동의하고 사퇴를 선언했던 왜곡된 보고서를 기초로 제주 4.3사건과 관련한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는데, 이 사실은 대서특필되었던 것입니다.
11년 전에 있었던 4.3사건과 관련한 대통령의 공식사과는 4.3사건의 배경과 본질을 알 수 없는 국민들 특히 많은 젊은이들에게 국군과 경찰을 일방적인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인식케 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까지 부정하게 만드는 도화선이 된 것을 지금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4.3위원을 사퇴한 이후에도 4.3무장 폭동의 배경과 진실이 알려져야만 대한민국이 지켜진다는 생각에서 제 나름의 노력을 했으나 역부족이라 고뇌가 있었는데 오늘 이처럼 ‘제주 4.3사건 바로잡기 대책회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서고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이황우 교수는 4.3 무장폭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갖고 계셨지만 저는 사전 지식 없이 군 전역 후 4.3특별법이 통과되는 시기에, 잠시 재향군인회의 안보정책실장을 맡았던 탓으로 4.3위원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군을 대변하셨던 또 한분은, 박정희 대통령보다도 1기 선배이신 김점곤 장군으로서, 4.3사건 발발 당시의 통위부와 그 후 육군본부의 정보국 작전정보과장을 역임하셔서 4.3사건을 통째로 꿰뚫어 보시는 전문가이신데, 진상조사 보고서의 초안이 검토되는 특별 소위원회(2003.3.24)에서 군과 경찰의 입장과 주장은 완전히 배제된 보고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전혀 관철되지 않자 그 자리에서 사퇴를 선언하고 말았던 사실도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돌이켜 보면, 4.3위원회의 인원구성과 운영 면에서 여러 모순이 있었으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4.3위원회를 지원하는 행자부 공무원들의 역할이 없었습니다.
첫 째 모순은 4.3위원회가 출범(2000.8.28.)되기도 전에 6개월 기간의 희생자 접수신고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그 후 3개월간의 신고기간 연장으로 14,028명의 희생자 신고접수가 완료될 때 까지도 희생자 심의 규정은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50여년 전에 제주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인후 보증으로 확인만 되면 희망자는 누구나 명예회복 신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망국으로 몰아가는 처사였습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 훈장을 이미 받았던 경찰의 유가족까지도 4.3희생자 신고를 했는가 하면 폭동 혹은 반란죄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고 사형이 집행된 수형인들도 명예회복 신고를 마치는 넌센스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광주의 5.18 희생자를 봐라!” 4.3희생자도 5.18처럼, 명예회복만 되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게 된다는 신고 시의 독려가 작용했음을 심사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일단 신고를 마친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폭도가 아닌 국군과 경찰에 의한 살상으로 인정돼야 보상금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대동단결하는 경향도 감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국가로 부터의 보상에 대한 기대가 성실하게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케 했다는 사실처럼 큰 모순은 없는 것이기에 심의의 기준제시도 없이 신고부터 받은 것은 심대한 매국행위가 아닐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두 번째 모순은 4.3위원회와 보고서 작성 기획단의 민간위원들의 구성 비율에 형평성이 없었다는 모순입니다. 하나의 예로, 보고서 작성기획단의 집필 전문인원의 경우만 보더라도 총 5명중 제주 4.3연구소 출신 3명에 군 출신 1명이었는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출신인 나종삼 집필위원의 경우는 고용계약 시 '6.25이후 부분만 집필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어 그의 전문분야인 4.3사건당시의 군 작전분야는 기술할 기회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군의 작전분야까지 제주 4.3연구소 출신들이 좌지우지 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태백산맥’과 같은 소설을 썼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행자부 담당관에게 감사원의 감사필요성 까지를 제기했으나 마이동풍이었으니 대한민국을 위해 봉사하는 공무원의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4.3위원회와 보고서 작성 기획단의 인원 구성의 형평성에 대한 감사가 있게 될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4.3위원으로 활동했던 당시의 에피소드 두 가지만 이야기 합니다. 4.3위원회에 는 전직 4.3희생자 유가족 대표 한분 있었는데, 피해 당사자가 정부측 심사위원이 되는 것도 사실은 모순입니다. 그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북한과도 화해협력을 하는 마당에 한 위원은 4.3사건 당시 군과 경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에게 대하여 동정의 눈물조차 없느냐?”고. 저는 즉석에서 답변을 못했다가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박 위원처럼 제주도에서 태어났다면 친척들이 무장폭도들을 따라 한라산에 입산하여 5.10선거를 거부하며 투쟁하다가 억울한 희생을 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눈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지금 돌이켜 보면, 남로당과 북한의 선전선동에 속았던 측면도 있었으니 국군과 경찰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4.3무장 폭동의 성공으로 남로당 인민유격대가 제주도를 완전히 장악했다면 어떤 일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대한민국 국민과 대통령이 인민 공화국화된 제주도를 포기했을까요?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 탈환을 위한 상륙작전을 명령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어떤 규모의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을까요? 국군과 경찰의 희생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그 후론 그의 시비가 많이 줄어들었답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이 한동 국무총리가 주재한 위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때 “제주 4.3평화공원”명칭에 대한 토의가 있었는데, 저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5.10선거를 반대하며 선거관리위원들과 경찰들에 대한 살생이 시작된 한 날이 평화를 상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진정한 평화를 강조하려면 명칭에서 4.3을 빼서 제주평화공원으로 하든가 4.3을 강조하려면 평화를 빼고 제주4.3위령공원으로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의견에 대부분 동의를 하는 상태로 보였는데 이 때 강만길 위원이 일어나 반대의견을 제기했습니다.
4.3사건은 먼 역사적 관점에서는 최초의 통일시도로 보아야하기 때문에 원안대로 “제주 4.3평화공원”으로 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으며 “여기가 평양입니까?” 하고 고함을 지를 뻔 했으나 참을 忍자로 고비를 넘겼었고 --- 그날 토의는 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데 그 후 언제 어느 총리 시절에 명칭이 결정되었는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군인이 아닌 민간인도 죽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무장폭동도 전쟁과 마찬가지임으로 막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4.3사건으로 제주도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각종의 억울한 희생이 2중 3중으로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비극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만,
한장군님,
답 글이 한참 늦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한 마지막 전투라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목록
비바람님의 댓글
비바람 작성일
언제나 열정적인 활동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제주4.3 바로잡기가 괘도에 오를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강님의 댓글
인강 작성일
제주도에서 활약하시는 비바람이 있어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총총 (구)자유게시판(2012~2014)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