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거] 1893년, 일본 무사가 본 조선의 풍경 (by ‘만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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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碧波郞 작성일14-03-11 15:01 조회3,05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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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무대로 청국과 일본이 충돌한 청일전쟁 기운이 한창 무르익던 1894년 7월1일, 일본에서는 조선잡기라는 책이 나왔다. 혼마 규스케(1869-1919). 천우협이라는 우익단체 회원이자 나중에 그 기관지 니로쿠신보 특파원을 역임하게 되는 혼마는 1893년 처음으로 조선을 찾았다.
부산에 체재하다가 경성으로 옮겨 남대문 인근 약방을 거점으로 매약 행상을 가장하면서 경기도, 황해도와 경기도 및 충청도 일대를 정탐한 뒤 도쿄로 돌아가 그 여행담을 1894년 4월17일자부터 6월16일자까지 니로쿠신보에 연재했다. 조선잡기는 바로 이 연재물을 154편으로 정리한 단행본이었다.
그는 왜 하필 이 때 조선을 찾았을까?
당시는 청나라의 보호 아래 일본, 러시아가 조선을 넘보고 있었다.
책 내용은 조선의 부패, 불결, 낙후, 무능한 모습들이
너무나도 ?적나라 하게 묘사 되었으며 이책은 나중에
일본인들 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특히 이 책은 일본에서 문명개화를 이룬 일본이 타자의 시선으로
‘미개화’된 조선을 바라보는 ‘야만과 문명’의 교차점을 읽을 수 있는 사료로 자주 인용된다.
그렇다면 조선잡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1.화폐
당시 통용되는 화폐는 상편전과 당오전 두 종류가 있었다
이전만 하더라도 상평전 5개의 가치를 지녔던 당오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 똑같은 엽전으로 취급되어 당오전은 이름만 있을 뿐 엽전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화폐로는 동전인 엽전 외에는 통화가 없는 조선인들에게 지폐를 보여주었으나 그 효용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평하는 모습을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평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했다.
당시 엽전의 무게는 상상초월이었다. 이것으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구한말 서양선교사가 쓴 글들을 보면 은전 1달러가 엽전 2,000에서 25,000개로 거래 되었으며 1달러의 은전 하나에 상평통보 무게는 15kg의 엽전 무게와 비슷했다.
2.민둥산
조선의민둥산을 보고 혼마는 “당신의 나라의 산에는 왜 수목을 심지 않는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호랑이의 피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것이다.”
ㅜㅜ 현실에 문제를 보고도 애써 정신승리만 했던 조선이었다
산에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만 가뭄이 와도 논농사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여름철만 되면 홍수로 온나라가 물난리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민둥산에 있던 부유물이 논으로 계속 떠내려 와서 논을 형성하는 뻘에 영양분이 떠내려가고 부유물 침범으로 인해 쌀생산량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급감한다. 아마 혼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뭄이나 홍수만 나면 온나라 백성들이 굶주려야 했다.
3. 불결함
(碧波郞 註 : 우리 시대 사람들 중에 아무리 비위가 좋다 해도 조선 시대 길거리 풍경을 접했을 때, 구역질 하지 않을 사람 없을 줄로 확신합니다. 그만큼 우리네 조상들 모습은 미개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요.)
거리에는 가축의 배설물과 인분이 가득 차 있고, 그 불결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시장의 중앙에는 공동변소를 설치했지만 그것은 거적을 두른 조잡한 것인데 그 똥을 받아먹으려 개와 돼지를 길러, 사람이 들어가면 옆에서 기다렸다가 인분이 나오면 받아먹는데, 그 모습을 보면 거의 구토를 하게 된다.
시골에서 똥개라는 단어가 왜 생겨 났는지 몰랐다 똥+개 였다. 똥을 먹고 사는 개라는 뜻이다 ㅡㅡ
4. 주거
지붕 밑에 진흙을 바른 천정은 낮아서 하품을 하면 목이 지붕에 닿을 정도다.
넓은 방이라고 해도 크기는 3평 정도며, 좁은 방은 0.5평에도 미치지 못한다.
방 안에 앉아있는 손님들은 만일 가래 뱉을 때는, 앉아 있던 멍석을 들고
그 아래에 뱉고, 콧물이 떨어질 때는 손을 비비고 바로 벽에 바른다.
5. 도로
어느날 경성의 길을 조선인에게 필담으로 물었더니 조선인이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내가 찾아가려던 구포는 경성에서 큰 길과 접한 곳이었다. 그러데 목적지 근처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작은 길 외에 큰 길은 보이지가 않았다. 혹시 잘못 들어왔나 싶어 샅샅이 뒤져보아도 결국 큰 길은 아무 데도 없엇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조선인이 말한 큰 길이란 어쩌면 이 작은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과연 내 생각이 옳았다. 조선의 도로가 형편 없다는 사실에 몹시도 놀라는 순간이었다. 일본의 역사서에서는, 흔히 신라시대에 이미 백성에게 우차법을 가르쳤다고 나와 있지만, 어떻게 이런 논두렁 같은 도로를 어떻게 우차가 통행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경성까지의 도로는 모두 이와 비슷하다.
일본의 마을 길보다도 심하게 울퉁불퉁하여, 군대는 일렬로 가지 않으면 통행하기도 어렵다. 오직 의주 ~ 경성에 이르는 길만
(의주 경성 도로가 어느정도 넓은 이유를 조선이 중국에 사대를 잘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혼마)
도로가 다소 정돈되고 사이즈도 넓어져, 군대의 2열 행군이 가능할 정도였다
6.정저지와(井底之蛙) : 우물 안의 개구리
경성에 있는 영국영사관의 고용인 최모씨가 일찍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은 하루 50냥 씩의 담배를 피우더라. 50냥이면 일가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밑천인데.. 그 교만과 사치를 생각하면 영국이라는 나라는 곧 망하게 될 것 같해.”
그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서 거친 식사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형편의 조선인이
지금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계수나무를 장작으로 때고, 옥으로 밥을 짓고 있는 부자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하루 50냥의 담배 값을 가지고 교만과 사치의 극치라니... 우물 안의 어리석인 개구리는 참으로 막막하다.’
7. 양반의 소중화사상
조선 역사를 보아도 상고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다른 나라에 속박되고 사대하지 않았던 시절이 드물다. 진정으로 독립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조선의 선비는 중국을 항상 ‘중화(中華)’라고 말하고 스스로는 ‘소화(小華)’라고 부른다. 그런 조선 양반들은 나에게도 묻는다.
“일본은 어떻게 부르는지?”
“대화(大和 : 야마토)”
이렇게 말하면 곧 나를 꾸짖는다.
“이런 오만방자한 지고!!”
하지만 오만하여 자랑하는 것과 비루하여 주눅든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그들은 이렇게 박식한 척 하면서 설명한다.
“중국을 중화라고 칭하는 것은 대중소의 뜻이 아니라, 가운데 위치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임.”
이렇게 책망하면 나도 한 마디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소화를 칭하는가?”
그러면 조선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못한다.
ㅡㅡ 마지막 혼마의 논리적인 일침 ㅡㅡ
http://blog.naver.com/alsn76/40205654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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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사진들이 않 뜨누나,,. 각설코요; "菊超 '이 인직(李 人稙)'" 저! 銀世界(은세계)! 이걸 읽으면 '한일합방'된 건 참으로 잘 된 것이었음. ,,. 맨 마지막 장면! ,,. 하루 일당받고 나온 '義兵(의병)'이란 不汗黨 놈들이 주인공 남매를 강제로 법당에서 끌어내 불법 연행해 나가는 걸 보면서도, 어머니는 속수무책, 부처님에게 염불만 ,,.,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7&docId=107958818&qb=7J2A7IS46rOEIOykhOqxsOumr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xJA1spySoGssu//EUKssssssto-173829&sid=Ux7i1ApyVo4AAC--fGw '은세계' 줄거리 요약(2번째)것 ↘ http://blog.naver.com/heomi92?Redirect=Log&logNo=60163318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