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전 김대중이 남만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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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석 작성일14-02-05 14:56 조회2,01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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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 그러니까 1945년 8월 이전 김대중이 남만주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김대중이 목포상고를 졸업한 것은 1943년 12원 23일 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졸업연도가 그 다음해인 1944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틀린 주장인 것 같다. 그 이유는 김대중이 목포상고를 입학한 해는 1939년으로서 정상적으로는 1944년 졸업이 맞지만 당시에는 전시라서 5년제 상고를 4년에 졸업시키도록 특별 조치가 내려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의 상고 졸업 년도는 1943년이 더 신방성이 있어 보이고 이는 그의 나이 20세 때로 추측된다. 김대중은 같은 동급생 보다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하기 몇달 전 김대중은 자신의 성씨를 도요다(豊田)로 창씨하였는 바 흔이 알려진 대로 이름을 다이쭈로 했다는 주장은 신방성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도요다로 창씨 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드시 그는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기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이는 바, 이름도 일본식으로 철저하게 바꾸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름을 바꾸었다면 철저한 일본식 이름, 예를 들면 “이찌로” 정도가 되지 않을가 추측해 본다. 또한 1943년 7월 8일, 김대중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4년 1월 16일에서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실제 생년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1923년이 맞는 것 같다.
1943년 상고 졸업후부터 1945년 8월의 해방 직전까지의 대략1년 8개월여의 기간동안
김대중의 행방이 묘연하다.
혹자는 김대중이 만주에 있는 만주건국대학에 합격하였으나, 어쩐일인지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를 하였고 입사 후 해방이 이루어졌는데, 김대중이 속한 회사의 경영진들은 회사를 그냥 둔 채로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그 후 이 회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계속해서 그해 11월, 김대중이 목포상선회사의 정식 대표가 되었고 사업이 승승장구면서 김대중이 엄청난 부를 손에 쥐게 되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다.
김대중이 1989년 5월 중앙정보부에 남긴 자술서에 의하면 김대중은 1944년 6~7월 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 회사인 전남기선주식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했다하며 해방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유일한 사무직원으로 남게 되어일시 총무대표로 추대되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은 1946년 2월경 상경하여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海司局)에 들려서 알아보니
서울 거주 손모씨에게 회사 관리권이 넘어갔다는 것을 인지하고 손씨로 부터 현 종업원을 계속해서 고용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했는데 종업원들의 반대에 접하여 1946년 말까지 이름만 걸어둔채 관여하지 않다가 회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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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님의 댓글
일석 작성일
(올리는 중 에러가 생겨 전문을 다시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해방 직전, 그러니까 1945년 8월 이전 김대중이 남만주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김대중이 목포상고를 졸업한 것은 1943년 12원 23일 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졸업연도가 그 다음해인 1944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틀린 주장인 것 같다. 그 이유는 김대중이 목포상고를 입학한 해는 1939년으로서 정상적으로는 1944년 졸업이 맞지만 당시에는 전시라서 5년제 상고를 4년에 졸업시키도록 특별 조치가 내려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의 상고 졸업 년도는 1943년이 더 신방성이 있어 보이고 이는 그의 나이 20세 때로 추측된다. 김대중은 같은 동급생 보다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하기 몇달 전 김대중은 자신의 성씨를 도요다(豊田)로 창씨하였는 바 흔이 알려진 대로 이름을 다이쭈로 했다는 주장은 신방성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도요다로 창씨 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드시 그는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기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이는 바, 이름도 일본식으로 철저하게 바꾸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름을 바꾸었다면 철저한 일본식 이름, 예를 들면 “이찌로” 정도가 되지 않을가 추측해 본다. 또한 1943년 7월 8일, 김대중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4년 1월 16일에서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실제 생년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1923년이 맞는 것 같다.
1943년 상고 졸업후부터 1945년 8월의 해방 직전까지의 대략1년 8개월여의 기간동안
김대중의 행방이 묘연하다.
혹자는 김대중이 만주에 있는 만주건국대학에 합격하였으나, 어쩐일인지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를 하였고 입사 후 해방이 이루어졌는데, 김대중이 속한 회사의 경영진들은 회사를 그냥 둔 채로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그 후 이 회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계속해서 그해 11월, 김대중이 목포상선회사의 정식 대표가 되었고 사업이 승승장구면서 김대중이 엄청난 부를 손에 쥐게 되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다.
김대중이 1989년 5월 중앙정보부에 남긴 자술서에 의하면 김대중은 1944년 6~7월 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 회사인 전남기선주식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했다하며 해방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유일한 사무직원으로 남게 되어일시 총무대표로 추대되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은 1946년 2월경 상경하여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海司局)에 들려서 알아보니
서울 거주 손모씨에게 회사 관리권이 넘어갔다는 것을 인지하고 손씨로 부터 현 종업원을 계속해서 고용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했는데 종업원들의 반대에 접하여 1946년 말까지 이름만 걸어둔채 관여하지 않다가 회사와 결별하였다고 자술하고 있다.
그러니 사업에 성공하여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혹자의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김대중 자신의 진술대로1944년 6~7월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남기선 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있었다고 주장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하더라도
1943년 말 상고 졸업이후 44년 6,7월 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아있고 또한 이 기간중
그가 도요타로서 만주의 여순군항에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으니만큼 반년여의 공백기간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김대중의 소학교 동창으로 재일교포인 김종충(金鐘忠)은 김대중이 이 당시 만주 여순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일본인 하라다 시게오(原田重雄)도 김대중이 해방직전까지 만주 여순에 있었다는 내용의 증언을 하고 있다. 하라다씨는 김대중을 여순출신 일본인들의 모임에서 만났다고 증언한다. 하라다씨는 1932년 생으로 김대중 보다는 나이가 어리며 그는 동경 신주쿠에 있는 하라다 맨션의 소유주로 대단한 재산가다.
김대중은 자신의 학력에 대해 6대 국회때부터 건국대학 졸업이라고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니 한국의 건국대학이 아니고 만주의 건국대학이라고 말을 바꾼 적이 있었고 그 이후 김대중은 국회 수첩등에 기록된 자신의 이력에서 건국대학 부분은 빼버렸다 한다.
자, 정황이 이렇다면 김대중이 상고 졸업후 해방 직전까지 만주 여순에 있었을 개연성이 농후한 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대중은 만주 여순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본 제국의 엘리드 양성기관인 만주 건국대학에 재학하고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당시 건국대학은 실업계 학교 졸업생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외가 있었다 하더라도 김대중의 졸업성적으로는 입학허가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건국 대학 출신들도 김대중이 건국대학에 재학했었다는 증언은 없다. 결국 김대중 자신도 자신이 건국대학 출신이라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한편 주목할 것은 당시 만주 여순은 군항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는데 김대중은 어떻게 그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흔히 조선인 밀정들이 출몰했다는 설도 있는데 김대중이 그 일원일 가능성은?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누군가 이 문제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