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세제 사과축제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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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디언 작성일14-10-15 10:52 조회1,990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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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이다. 이 가을날 어딘가 떠나고 싶던 참에 10.11부터~10.26일까지 열리는 문경 사과 축제를 가보기로 했다.
동서울터미널서 요금11.900을 내고 10.11일 오전9시20분 고속버스에 몸을 실고 2시간 걸려 문경터미널에 도착했다 거기서 차비1.500에 시내버스를 타고 15분 걸려 종점인 관문에 내리니 바로 문경세제다.
도립공원 문경세제 사과축제 장터는 백두대간 소백산맥 줄기에 동쪽은 주흘산 서쪽은 조령산 사이 분지에 터를 잡고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는 현대판 말인 승용차들이 가득했다.
하늘은 무한정 푸르고 높은데 하얀 구름 몇 조각이 둥실 떠있는 상쾌한 날씨다. 사과 축제에는 토요일 휴일이기도해 구경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문경세제를 가로지르는 노상에는 백색천막이 50여개 쳐져있고 사과농원 주인들이 자기가 키운 사과를 천막 안에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자기가 키운 사과에 대한 자부심들이 대단했다.
지금은 계절상【감홍】이란 사과 품종이 주를 이뤘고 직경13~14㎝ 크기의 감홍사과 10개가 4만원이었다. 가격은 쌓지 않았으나 시식으로 내놓은 사과 당도가 높고 맛도 훌륭했으나 수출경쟁력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누가 한 개 40딸라 하는 사과를 사먹겠는가?
그나마 물량이 딸려 내수 대기도 모자란단 말에 사과 농원들의 영세성을 말해 줬다. 사과가 이렀게 비싼 건 열매가 자라면서 수해가 많아 상품이 될 것은 얼마 안 되기 때문이란다. 이는 정부책임으로 보인다. 그런 걸 예방. 지도하기 위해 정부가 필요하고 대통령이 있는 게 아닌가.
농촌연구소의 사과 품종개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과학적으로 수목 키우는 지도가 부족한 탓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 농촌의 제대로 된 농가인 경우 1년 수입이 10억 쯤 되는 과수 및 채소농가가 흔하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원래는 문경세제서 하루 숙박하는 1박2일을 계획했으나 동서울터미널서의 시간상 거리와 버스요금도 그곳 현지 숙박비에 비해 저렴해 그날은 그걸로 탐색전을 마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이튼 날 주일은 쉬고 월요일 다시 동서울터미널서 오전8시 버스로 출발. 이번엔 점촌터미널서 내렸다.
점촌터미널 앞 시내버스 승강장서 문경세제까진 50여분 걸렸다.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문경세제의 역사적인 면을 고찰하기로 했다.
문경세제는 영남의 관문이다. 지금도 내륙고속도로가 문경세제를 넘기 위해 긴 터널을 5개나 지나는 첩첩산중이니 그 옛날 보부상들과 영남선비들이 과거 길은 험난했다.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세제를 넘기 위해 숫한 고생들을 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문경세제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왜군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문경세제 험준한 주흘산을 버리고 충주 달천 강가에 배수진을 쳐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패배하여 조선군사 8천을 희생시킨 역사적인 연고가 있는 장소이다.
고대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조선의 국운이 걸린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의 달천강가(탄금대)에 친 배수진에 대해 나름대로의 소견을 간략하게나마 피력하고자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패장 신립은 1567(선조 즉위년)에 무과에 급제, 무관으로서의 기본은 있었던 장수다.
온성부사 때인 1583북변에 침입한 이 탕개를 격퇴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제수 받았다.
1587. 우방어사로 흥 양 왜구를 토벌하려 출정 갔다가 왜구가 물러간 뒤라 빈손으로 돌아오다 양가 처녀를 첩으로 들여 탄핵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그 후 함경남도 절도사로 재임용 받으나 이번엔 장졸 참살 죄로 한직에 쫓겨났으니 용맹은 있으나 공사에 사리분별에 문제가 있었던 재목으로 보인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1590 임용됐다. 임진왜란 당시인1592년 막장 김 여문 등이 문경 주흘산 산세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 왜적을 방어하자는 제안을 물리치고 충주 달천강가에 배수진을 쳐 대패하고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부하병사8.000을 몰살시킨 자신의 무능한 처사가 스스로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우둔한 패장이었다.
달천 강은 지금도 충주시민의 상수도원이며 남한강 상류로 괴산군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는 강이라 당시에는 수량이 더 풍부했던 모양이다.
왜 신립은 결정적인 순간에 당시 전쟁판에는 보기 힘든 달천 강(탄금대) 배수진이란 하책을 선택. 조선의 국운을 해트렸을까?
전쟁에는 방어할 때와 공격할 시기가 있다. 특히 국가의 흥망이 걸린 중요 전쟁판은【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말라】병법에 나와 있다. 무조건 사 즉 생(死 卽 生) 즉, 죽기 살기로 덤빈다고만 되는 게 아니라 이길 시기를 기다리란 뜻이다.
전쟁에는 첩보도 중요하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노련한 장수로 양산-밀양을 거쳐 승승장구 북상중이였다. 기병으로 무조건 돌격하기엔 왜군에게는 조총이란 신무기가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조선군은 정예병 8.000이었고 고니시의 왜병은 15.000명 대부분 100년 내전에 숙달된 병사였다.
전투에는 지형지물은 이용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다. 의병장 김천일. 곽재우 장군 등은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갑자기 나타나 치고 빠지는 수법을 썼다. 거기에 왜군은 숙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총에 불을 당 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럴 경우 조선군이 소유한 활보다도 조총은 못했다.
만약 신립의 군대가 문경세제 주흘산에 잠복하고 지형을 이용하여 활로서 대적했다면 고니시의 왜군을 격파하고 전쟁서 이겼을 것이다. 그러면 임진란의 전쟁은 일찍 끝났으며 한양이 함락되는 수많은 백성들 희생이 없었어도 될 뻔했다.
결론적으로 신립은 용맹은 있으나 지략이 부족한 하급 장수에 불과, 국운이 걸린 전쟁터에 내보낼 수 있는 총대장 감이 못되는 인물이었다.
국가흥망이 걸린 전쟁터의 총대장을 선택하는 건 어느 때고 최고지도자의 인재 보는 안목에 달려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선조 치세를 보면 반쪽짜리 왕이었다.
미치광이 비슷한 자질을 갖은 임금선조가 신립의 군사적인 자질을 어찌 꿰뚫어 볼 수가 있었겠는가? 과거 소규모 전투의 공적만을 가지고 국운이 걸린 전쟁터에 책임 장수로 내보냈으니 애 궂은 백성만 전란에 희생시켰다.
지도자의 치세가 현명함은 등용한 고관 및 장군의 면모를 보면 안다. 나라에 공을 세운 공과를 따질 때도 피난길에 동행한 환관. 내시를 일등공신으로 채운 사이코 패스 같은 지도자를 만나면 민생이 당하는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한반도는 척박한 땅이다. 풍부한 자원적인 부가 없는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간을 지배층에 착취당하는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가운데 요행이 재능을 인정받아 출세하면 자기 뱃속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 때문에 항시 나라전제 부정부패가 하늘을 찌르나 민생은 그저 체념하고 산다.
아무리 전직고관이라고 하나 재임기간 급여만으론 수십억. 수백억을 모을 수 없다. 전직고위직 중에 재산형성이 설명되지 않은 재산은 몰수 처분하여 국가의 빛 을 갚는 지도자가 나와야 이 나라가 사는 길이다.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신 립'장군은 젊은 시절에 자길 좋아하는 처녀의 짝사랑을 무시하여 그 처녀는 크게 절망, 자살했는데,,.
그 처녀가 꿈에 나타나 남한강 '충주강 - 달래강'으로 가라'고 하여 ,,. 남녀 관계도 좀 크게 생각함이 ,,. {전설의 고장} 朝廷으로의 狀況 報告書에 '신 립'장군의 서명이 없어 이 보고서의 진위 여부를 믿어야 하느냐로 또 소란 떨고,,. 얼마나도 전황이 다급했었으면 보고서에 야전사령관 서명도 누락하고 전령을 급파했었겠는 지, '신 립'장군의 운명을 '유 성룡'은 걱정했다죠. '징비록'에서의 내용.,,.
只今 우리 상황과 너무나도 일치! 땅굴이 있다 없다!? ,,. 있다고 보고 절개하면서 대국민 경각심을 고취해야거늘 - - - 일본이 않 쳐들어 오리라,,. 한심한 정권! ,,. 빠드~득!
★ 却說코요;
사과는 반드시 아침에 기상하여 조반 전에 1개를 먹으면 그토록 좋지만! ,,.
저녁,.야간에 사과를 먹으면 아주 해롭! ∴ 꼭 아침에만 먹되 저녁엔 먹지 마시오길! /// 여불비례,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