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특집] 백선엽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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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碧波郞 작성일13-12-19 15:53 조회3,605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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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에서 내리지 않았던 71세의 노장 맥아더
미군이 시키는대로 했던 국군, 이젠 독자 생존 찾아야
(3) 압록강 물 떠오기
맥아더는 그 때 이미 ‘신’이었다
1945년 도쿄 비행장에 커다란 C-54 전용기를 타고 모습을 드러낼 때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미 ‘신(神)’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결사항전을 벌이던 일본군의 막바지 공세를 모두 꺾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에 도착할 때 그의 그림자는 아시아의 모든 지역을 덮고도 남았다.
5년 뒤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전쟁의 초반 10개 월 동안 그는 유엔총사령관으로 도쿄에 머물며 연합군과 국군의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내가 본 군인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큰 사람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이미 고령이었다는 점이다.
6.25전쟁 초반에 그는 북한군의 허리를 끊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역량을 다시 선보였으나, 어쩌면 그것은 석양의 막바지 광휘(光輝)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뒤에 몇 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우선 ①중공군의 참전에 관한 여러 정보를 간과했다. 아울러 ②한반도에 올라선 미군의 지휘권을 통합해 운영하지 않는 실수를 보였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있다. 이 점은 맥아더 사령관을 별도로 회고할 때 다시 언급할 작정이다. 우리 국군은 어쨌든 그의 지휘를 받아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해 압록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50년 10월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유엔군을 모두 이끄는 최고 사령관이었고, 한국의 미군은 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중장, 미 10군단장이었던 에드워드 아몬드(Edward M. Almond)가 나눠서 지휘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맥아더의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세계가 주목할 만한 작전이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인천 앞바다에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상륙작전을 벌임으로써 김일성 군대의 보급선을 일거에 끊어버리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 점은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상륙작전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는 ‘점프(jump)’를 즐겨 사용했다. 일본군에 밀려 오스트레일리아에 쫓겨 간 뒤 다시 뉴기니 등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건너뛰면서 결국 필리핀을 수복했고, 급기야 막바지 공세로 막강한 일본까지 함락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상륙작전의 명수였다. 태평양 뉴기니 섬 등을 수복할 때 여러 차례의 상륙작전을 벌이면서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의 군대가 벌인 전쟁의 국면은 급격히 뒤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겠으나, 그는 인천 상륙 뒤 1개 해병 사단을 빼서 원산으로 상륙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 점은 아주 커다란 실수였다.
원산은 동해안 북녘의 가장 큰 항구다. 그러나 동부전선은 그렇게 시급히 해병 사단을 상륙시킬 만큼 격전장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주전장(主戰場)은 신의주와 서울, 이어 부산을 잇는 선이다. 이곳에 집중해야 할 병력을 동해안으로 빼서 상륙시킨 점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작전이었다.
그러나 국군의 힘은 보잘 것 없었다. 미군의 작전에 “감 놔라, 배 놔라”할 자격이 아예 없었고, 심지어는 토씨 하나 달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 당시의 국군은 ‘미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그런 군대에 불과했다. 모든 작전 지휘권은 이미 유엔사령관에 넘어가 있었고, 미 8군 사령관이 그를 받아 지휘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전쟁 와중에 그 맥아더 장군을 가까이서 몇 번인가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북진이 끝난 뒤 우리가 중공군에 밀려 다시 남하했던 ‘1.4 후퇴’ 뒤였다. 안성까지 밀렸던 아군은 가까스로 중공군 공세를 막아낸 뒤 서울까지 수복한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국군 1사단장으로 프랭크 밀번(Frank W. Milburn) 소장이 이끄는 미 1군단에 배속해 있었다.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우리 1사단은 만리동의 한 초등학교에 CP(전투지휘부)를 차려두고 있었다. 갑자기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전갈이 왔다. 1사단장인 나와 참모들,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이 모두 CP 앞에 도열해 있었다. 흙먼지를 날리며 맥아더 장군 일행이 교문을 들어섰다.
맥아더의 후의(厚意)…그러나
선두에 섰던 호위 차량 뒤로 맥아더 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프 앞자리에 타고 있었다. 그의 차량이 사단장인 내 앞에 멈춰 섰다. 군례(軍禮)에 따라 우리는 맥아더에게 경례를 했다. 그는 앉아서 우리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상했다. 지프 앞자리에 앉은 맥아더 장군이 도통 차에서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그냥 자리에 앉아 내게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전황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맥아더는 내게 “장병들의 급양(給養) 상황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으나 나는 “쌀은 나름대로 잘 공급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감미품(甘味品)이 모자라 애를 먹고 있다”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곧 행렬을 몰고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1사단 선두를 이끌고 다시 북상하던 나는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맥아더 장군이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감미품을 후방의 우리 국군에게 보내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미품이라는 게 요즘 말로 하자면 ‘단 식품’이다. 당시 국군의 형편으로서는 쌀과 된장을 구해 콩나물 등 야채로 국을 끓여 식사를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다보니 열량이 높은 단 식품을 먹는 것은 언간생심이었다. 그를 단번에 해결한 사람이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는 도쿄 유엔사령부에 지시해 사탕과 통조림, 말린 오징어 등을 산더미처럼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런 맥아더의 후의를 즐기지 못했다. 전선을 관리하느라 일본에서 공수해 온 그 감미품을 즐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모든 분야에 걸쳐 미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 몸뚱이만 빼놓고 입는 것과 먹는 것, 적과 맞붙어 싸울 때 필요한 총과 탄약 등 모든 것을 미군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미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국군의 당시 진짜 모습이었다.
맥아더는 전성기가 지난 늙은 장군
내가 1.4 후퇴 뒤 서울을 다시 수복했을 때 맥아더 장군과 만난 일화를 소개하려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그가 당시 매우 늙어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1880년생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비해 다섯 살 아래다. 전선의 험한 풍상을 거친 뒤 1945년 도쿄 공항에 내릴 때 이미 ‘신’이었기는 하지만, 그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미 71세의 고령에 접어들었던 당시의 맥아더는 지프에서 내려 전선의 지휘관과 얘기를 나누기가 귀찮을 만큼의 상태였다. 아울러 일선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체크하고, 그곳 지휘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대의 사기를 직접 확인하는 일 등은 이미 그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맥아더는 미군 역사에서도 손으로 꼽을 만큼 위대한 장군이다. 그러나 65세에 도쿄에 도착했고,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이끌 때는 70세에 이른 상태였다. 1.4후퇴 직후 서울에서 잠깐 만났던 그로부터 나는 맥아더가 왜 위대한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 뒤에 몇 가지 패착을 둘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영광과 자신감에 도취해 있었고, 늙은 나이는 그 점을 가속화시켰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보는 일, 즉 성찰(省察)에 게을러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장의 여러 정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장수는 패착에 직면할 수 있다. 맥아더는 1950년 말에 이미 그런 여러 가지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듯하다.
문제는 우리 국군이었다. 미군은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국군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다. 물자와 화력은 물론이고, 갑자기 닥치는 전선의 상황을 타개할 전기(戰技)와 전술(戰術), 나아가 전략(戰略) 등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아 움직여야 했던 국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까? 우리 앞에는 많은 시련이 버티고 있었다. 1950년 북진 때의 상황이 특히 그랬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맥아더는 그 때 이미 ‘신’이었다
1945년 도쿄 비행장에 커다란 C-54 전용기를 타고 모습을 드러낼 때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미 ‘신(神)’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결사항전을 벌이던 일본군의 막바지 공세를 모두 꺾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에 도착할 때 그의 그림자는 아시아의 모든 지역을 덮고도 남았다.
5년 뒤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전쟁의 초반 10개 월 동안 그는 유엔총사령관으로 도쿄에 머물며 연합군과 국군의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내가 본 군인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큰 사람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이미 고령이었다는 점이다.
6.25전쟁 초반에 그는 북한군의 허리를 끊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역량을 다시 선보였으나, 어쩌면 그것은 석양의 막바지 광휘(光輝)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뒤에 몇 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우선 ①중공군의 참전에 관한 여러 정보를 간과했다. 아울러 ②한반도에 올라선 미군의 지휘권을 통합해 운영하지 않는 실수를 보였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있다. 이 점은 맥아더 사령관을 별도로 회고할 때 다시 언급할 작정이다. 우리 국군은 어쨌든 그의 지휘를 받아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해 압록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50년 10월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유엔군을 모두 이끄는 최고 사령관이었고, 한국의 미군은 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중장, 미 10군단장이었던 에드워드 아몬드(Edward M. Almond)가 나눠서 지휘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맥아더의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세계가 주목할 만한 작전이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인천 앞바다에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상륙작전을 벌임으로써 김일성 군대의 보급선을 일거에 끊어버리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 점은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상륙작전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는 ‘점프(jump)’를 즐겨 사용했다. 일본군에 밀려 오스트레일리아에 쫓겨 간 뒤 다시 뉴기니 등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건너뛰면서 결국 필리핀을 수복했고, 급기야 막바지 공세로 막강한 일본까지 함락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상륙작전의 명수였다. 태평양 뉴기니 섬 등을 수복할 때 여러 차례의 상륙작전을 벌이면서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의 군대가 벌인 전쟁의 국면은 급격히 뒤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겠으나, 그는 인천 상륙 뒤 1개 해병 사단을 빼서 원산으로 상륙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 점은 아주 커다란 실수였다.
원산은 동해안 북녘의 가장 큰 항구다. 그러나 동부전선은 그렇게 시급히 해병 사단을 상륙시킬 만큼 격전장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주전장(主戰場)은 신의주와 서울, 이어 부산을 잇는 선이다. 이곳에 집중해야 할 병력을 동해안으로 빼서 상륙시킨 점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작전이었다.
그러나 국군의 힘은 보잘 것 없었다. 미군의 작전에 “감 놔라, 배 놔라”할 자격이 아예 없었고, 심지어는 토씨 하나 달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 당시의 국군은 ‘미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그런 군대에 불과했다. 모든 작전 지휘권은 이미 유엔사령관에 넘어가 있었고, 미 8군 사령관이 그를 받아 지휘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전쟁 와중에 그 맥아더 장군을 가까이서 몇 번인가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북진이 끝난 뒤 우리가 중공군에 밀려 다시 남하했던 ‘1.4 후퇴’ 뒤였다. 안성까지 밀렸던 아군은 가까스로 중공군 공세를 막아낸 뒤 서울까지 수복한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국군 1사단장으로 프랭크 밀번(Frank W. Milburn) 소장이 이끄는 미 1군단에 배속해 있었다.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우리 1사단은 만리동의 한 초등학교에 CP(전투지휘부)를 차려두고 있었다. 갑자기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전갈이 왔다. 1사단장인 나와 참모들,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이 모두 CP 앞에 도열해 있었다. 흙먼지를 날리며 맥아더 장군 일행이 교문을 들어섰다.
맥아더의 후의(厚意)…그러나
선두에 섰던 호위 차량 뒤로 맥아더 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프 앞자리에 타고 있었다. 그의 차량이 사단장인 내 앞에 멈춰 섰다. 군례(軍禮)에 따라 우리는 맥아더에게 경례를 했다. 그는 앉아서 우리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상했다. 지프 앞자리에 앉은 맥아더 장군이 도통 차에서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그냥 자리에 앉아 내게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전황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맥아더는 내게 “장병들의 급양(給養) 상황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으나 나는 “쌀은 나름대로 잘 공급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감미품(甘味品)이 모자라 애를 먹고 있다”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곧 행렬을 몰고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1사단 선두를 이끌고 다시 북상하던 나는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맥아더 장군이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감미품을 후방의 우리 국군에게 보내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미품이라는 게 요즘 말로 하자면 ‘단 식품’이다. 당시 국군의 형편으로서는 쌀과 된장을 구해 콩나물 등 야채로 국을 끓여 식사를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다보니 열량이 높은 단 식품을 먹는 것은 언간생심이었다. 그를 단번에 해결한 사람이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는 도쿄 유엔사령부에 지시해 사탕과 통조림, 말린 오징어 등을 산더미처럼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런 맥아더의 후의를 즐기지 못했다. 전선을 관리하느라 일본에서 공수해 온 그 감미품을 즐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모든 분야에 걸쳐 미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 몸뚱이만 빼놓고 입는 것과 먹는 것, 적과 맞붙어 싸울 때 필요한 총과 탄약 등 모든 것을 미군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미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국군의 당시 진짜 모습이었다.
맥아더는 전성기가 지난 늙은 장군
내가 1.4 후퇴 뒤 서울을 다시 수복했을 때 맥아더 장군과 만난 일화를 소개하려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그가 당시 매우 늙어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1880년생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비해 다섯 살 아래다. 전선의 험한 풍상을 거친 뒤 1945년 도쿄 공항에 내릴 때 이미 ‘신’이었기는 하지만, 그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미 71세의 고령에 접어들었던 당시의 맥아더는 지프에서 내려 전선의 지휘관과 얘기를 나누기가 귀찮을 만큼의 상태였다. 아울러 일선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체크하고, 그곳 지휘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대의 사기를 직접 확인하는 일 등은 이미 그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맥아더는 미군 역사에서도 손으로 꼽을 만큼 위대한 장군이다. 그러나 65세에 도쿄에 도착했고,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이끌 때는 70세에 이른 상태였다. 1.4후퇴 직후 서울에서 잠깐 만났던 그로부터 나는 맥아더가 왜 위대한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 뒤에 몇 가지 패착을 둘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영광과 자신감에 도취해 있었고, 늙은 나이는 그 점을 가속화시켰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보는 일, 즉 성찰(省察)에 게을러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장의 여러 정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장수는 패착에 직면할 수 있다. 맥아더는 1950년 말에 이미 그런 여러 가지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듯하다.
문제는 우리 국군이었다. 미군은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국군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다. 물자와 화력은 물론이고, 갑자기 닥치는 전선의 상황을 타개할 전기(戰技)와 전술(戰術), 나아가 전략(戰略) 등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아 움직여야 했던 국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까? 우리 앞에는 많은 시련이 버티고 있었다. 1950년 북진 때의 상황이 특히 그랬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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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님의 댓글
korea 작성일
백선엽 장군의 자서전에 보면, 맥아더의 원산상륙은 인천 상륙작전의 기만전술로써 적을 혼동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광종은 백장군의 수기조차 숙독하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