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혁명과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나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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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발해의꿈 작성일13-10-08 12:00 조회3,362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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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혁명과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나 (Ⅲ)
李 秉 華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농경영학ㆍ경제학 박사
(2013. 10. 7.)
● 渤海의 海東盛國을 위하여
1989년 봄, 舊소련 대통령 고르바쵸프가 국제 공모한「국영 유리온실농장 작부 체계도」에 ‘국제농업인력개발원장 이병화’ 이름으로 응모하여 당당히 일등 하였고, 저는 소련정부 초청으로 시베리아 알타이 평원에 있는 비스크市 핵무기연구소가 운영하는 유리온실을 방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고르바초프는 저에게 「극동러시아지역 대통령실 농업경제 자문위원」이라는 직함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소련 전역을 돌아다녔고 고려인들을 만났습니다. 1990년 8월 처음으로 연해주를 갔을 때, 제 인생에 성장 이후 세 번째 은사인 ‘프리모리스키 국립농업아카데미’ 총장인 A.A 데민 박사를 만났습니다.(첫번째 은사는 앞에서 언급한 박진환 박사님이시고, 두번째 은사는
1980년 초 박대통령 서거이후
힘든 시기 야간 대학원인 중앙대 지역개발 대학원 전과정을 무료 수업토록 혜택을 준 김성훈 교수(前농림부장관)입니다.)
데민 박사는 처음 만난 저에게 첫마디가 “연해주가 바로 당신이 찾아 다닌 「한민족 해외식량영토」구축지임을 지적해주었고,
이곳은 옛 발해 땅이고 1937년 이전에는 고려인들이 농사짓는 곳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 테니 우선 내 밑에서 석ㆍ박사과정을 시작하라”고
허가해 주었습니다. 데민 박사는 러시아어를 못하는 저를 위해 일본어와 영어ㆍ고려말(한국어)로 강의를 듣도록 조치해 주었습니다.
연해주 방문 한달 후인
9월30일 한ㆍ소 국교수립이 되어 철의 장막인 소련이 한국인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에 대가로 차관 14억7천만불이
제공되었고, 연이어 15억3천만불이
제공되려는 찰라, 소련은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이 승계하여 이듬해인
1991년 12월7일 한ㆍ러 국교수립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자문위원 직책도 자동 승계되어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러시아 지역의 활동영역이 훨씬 넓혀졌습니다.
1992년 10월 구소련 고르바쵸프 대통령은 러시아 엘친 대통령과
합의된 사항이라면서 한ㆍ소 수교때 빌려준 차관 14억7천만불과
연해주 달레네골스키 지역(제주도 넓이 3배, 광산지역)을 서로 바꾸자는 제의에 따라 제가 현장조사를 하였고, 농지가 없어 거부하고 농지가 있는 다른 지역을 물색과정에서 고르비의 실권(失權)으로 이후로는
거론치 못했으나, 저는 연해주에 차관 상환금 연계나 한국의 투자금으로 식량 안보영토 구축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1993∼94년도 사이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주민 3,800여명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고려인들의 갈등이 심각함을 알았습니다. 내용인즉,
1945년 8월15일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일본영토인 南사할린이 소련에 편입되어 졸지에 소련사람이 된 사할린 동포들과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가 연해주로 다시 이주해 온 고려인, 고향이 공산주의
북한 땅인 고려인과 자유민주주의 남한 땅인 고려인 등 4부류의 고려인들은 물과 기름처럼 화합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을 융합하여 고려인 조직체를 활용한 식량기지 구축은 불가능하여 한국의 영농기업이 진출하는 “3위 일체 공생농업(이것은 한국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 러시아의 지원이 결합하는 것을 말함)”을 추진하여 고려인들을 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것을 논문으로
제출하여 농업경영학박사(칸디닥트) 받았습니다. 이 논문은 러시아 국가정책으로 채택(1999. 5. 20.)되어
다시 경제학박사(독토르) 학위를 받았습니다.
1995년 봄부터 한국의 많은 기업과 단체들을 연해주 농업에 투입시켰으나 외국인 투자에 안전성이 확보되지
못한 러시아 법령과 한국보다 불리한 자연환경, 그리고 가장 큰 문제인 자금력에 고전하고 있을 때 이
소문을 들은 전두환 前대통령은 11월23일 “나도 연해주에 가서 자네를 돕겠다”면서 63억을 투자지원 했으나 송금 직전 김영삼 대통령에게 압류당했습니다. 이듬해 8월 권영해 안기부장은 그 동안의 추진사항을 듣고 안기부가 직접 남북한 식량기지 사업을 하겠다고 저와 약속했으나, 북한의 위조달러 사건으로 우리 측 정보요원 한 명이 10월1일 살해 당하자 사업은 잠정 중지되었습니다. 1997년 가을에 불어
닥친 IMF 한파는 국가위기 상황으로 전개되어 이 사업을 추진하는 저 역시 큰 곤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1998년 3월 국민의 정부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이종찬氏는 다행스럽게도 김대중 대통령을 설득하여 연해주에서 한국 기업이 농사지은 곡물을 수매하여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대통령(DJ) 임기 5년 동안 28차례 러시아 열차에 곡물을 싣고 북한 전지역에 실어
날랐습니다.
1998년 가을 연해주에서 농사지은 쌀 두 가마니를 한국에 가져와 떡을 만들어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내외분께서 잠들고 계신 동작동 국립묘지 영전에 “연해주 쌀로 빚은 떡입니다”라고 글을 써 붙이고 절을 올렸습니다. 현충원 원장과 의장대 및 참배객 모두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날 현충원
관계자 모두가 “당신의 충성심에 지하에 계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기뻐할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 「후천성 획득형질의 법칙」을 정립한 ‘루이센코 학설’을 만나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첫해부터 2000년까지 3년간 KOTRA 및
농수산물유통공사는 러시아 전력의 유명도시에서 개최되는 국제 농ㆍ식약품박람회에 참여가 활발했고, 저는 직ㆍ간접적으로 이 조직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스크바ㆍ바로나울ㆍ하바로브스크ㆍ블라디보스톡ㆍ나홋카 등의
박람회 현장을 저와 함께 안내한 현지 고려인은 먼 일가(13촌)인
조카뻘되는 의사였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 식민지때 사할린으로 징용가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소생이
조카였습니다. 조카는 매우 박식했는데, 박람회 참관때마다
솔제니친의 자서전 「암병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G.J. 멘델 박사의 「선천성 획등형질의 법칙」과는 반대되는 T.D. 루이센코 박사의 「후천성 획득형질의 법칙」은 유전자(DNA) 조작
없이도 형질이 바뀐다는 사례와 이와 관련된 논문들을 추천하고 설명을 열심히 해주었고, 저는 빨갱이들만이
연구한다는 루이센코의 학설에 매료되었습니다. 이후 I.V. 미추린
박사의 한냉농법(일명 미추린농법)과 식물이 금을 캐는 식물의
연금술 원리를 터득했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기록물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1954년 이른 봄. 루이센코가
농장책임자로 있는 봄 파종용 밀종자 창고가 수도관 파이프 동파로 인해 몽땅 물에 담겨 완전히 얼어 터졌고, 남은
일부만 파종했다. 농장 종업원들은 발아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미추린 농법이 생각난
루이센코는 파종을 감행했다. 파종된 밀 종자는 다른 소프호즈(국영농장)보다 싹이 늦게 났다. 차가운 물 속에서 골병이 든 것으로 판단했다. 이즈음 5월 20일 전후 100년만의 꽃샘추위로 시베리아의 모든 작물들, 특히 밀ㆍ보리ㆍ귀리ㆍ옥수수
등이 얼어 죽었다. 그런데 루이센코 농장의 밀은 죽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수확량도 관행농업보다 많았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침체되어 있던 I.V. 미추린 박사의 학설은 날개를
달았다. 이후 루이센코는 이번에는 광물질 흡수를 잘하는 시베리아 귀리(Avana, 흔히
鑛麥, 耳麥
이라고 함)에 극미세 테크놀로지 기법을 응용한 금물(Gold
Water)를 만들어 미추린 농업처럼 귀리 씨앗을 일정기간 담가두었다가 뿌리 싹눈이 나올 때 파종했더니 귀리의 생장에 관계없는
미세 금가루를 토양과 공기 속으로부터 과다 흡수하는 것을 발견하고 금을 캐는 귀리를 탄생시켰다. 바로
식물의 연금술이며, 이것의 이론적 바탕은 초면현상(初面現象)이다. 지구촌 모든 생물들(동ㆍ식물)들, 심지어 미생물까지 포함한 모든 것들은 세상에 태어날 때 맨 처음 만나는 물질을 모계(母係)로 판단하는 인지능력을
보유하는데, 어미잃은 호랑이 새끼가 젖을 물린 진돗개를 어미로 알고, 소녀의 품에서 알을 깨고 나온 기러기가 소녀를 어미로 알고,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탁아소에서 눈을 뜨자마자 본 북한 어린이가 이들 부자를 어버이로 섬기는 것도 바로 초면현상의 원리이다. |
러시아 인들은 체구가 비대하고, 육류(특히
돼지고기) 소비가 매우 많고, 독한 보드카도 많이 마시는
것에 비해, 한국인 보다 위암ㆍ대장암ㆍ유방암ㆍ간암 등의 발병률이 훨씬 적습니다. 저는 그 이유는 살아있는 자작나무에서 발생하는 차가(chaga)버섯을
커피대신 차(茶)처럼
상용하는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찾아내고 조사ㆍ연구하여 3년 만에 책을 발간했습니다.
첫번째 책은 「자작나무의 악성종양, 차가버섯의 모든 것」(2001년 12월), 두번째는
「차가버섯의 실체와 응용」(2003년 2월), 세번째는 「이병화의 차가버섯 이야기」(2008년 11월)을 만들어 전국 서점에 공급했습니다.
책 발간과 병행하여 식물의 태교법을 응용하여 ‘암을 치료하는 기능성 농산물
생산구조’(발명특허 제10-0676132호)외에 또 다른 차가버섯 관련 건으로 발명특허 등록을 했고, 현존하는
지구촌 최고의 위궤양 치료 및 소화기 암 면역력 증진 약제인 「배훈진」을 러시아 당국과 협의하여 상표등록하고 연해주 농산물 29종을 의장특허등록까지 하였습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의
암환자들과 면담 및 전화 상담을 무려 2만3천여명을 한 것
같습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차가버섯 속의 ‘베타글루칸 1-3형’을 축출하여 식물의 태교술과 접합 응용결과 암치료제 농산물을
생산하는 기초 시스템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루이센코 학설을
연구한 덕분이었고, 지금은 ‘후천성 획득형질의 법칙’의 국내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이에 자신감을 가지고 2008년 12월 9일 3억원의 공탁금을 걸고 이명박 대통령과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게 공개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다음은 공개 도전장 내용입니다.
존경하는 이명박 대통령 각하, 그리고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님
대한민국 건국 이후
60년을 회고컨데 지금처럼 농촌ㆍ농민ㆍ농업이 어려움에 봉착된 적은 없었습니다. 농촌은
이미 양로원으로 변했고, 농민은 도시인보다 소득이 무려 22%나
뒤져있고, 농업은 국제경쟁력에 밀려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공개도전장을 제출하는 저는 (재)국제농업개발원 원장 이병화입니다. 저는 30대에 우리나라 대통령을 측근에서 8년간 뫼셔봤고, 이후는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7개 국가의 남의 나라 대통령과 수상을 농정자문위원 자격으로 뫼셔봤기 때문에 나라마다 농정의 판단 비교능력은
남보다 앞선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비록 배불러도 내일의 꿈과 희망이 없으면 그
국민은 망했고, 오늘 배고파도 내일의 꿈과 희망이 있으면 그 국민은 흥했고 행복했습니다.” 두 분 어른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진정 배고프고 고달픈 오늘의 한국 농민에게 내일의 꿈과 희망은 있습니까? YS와 DJ 및 노무현의 참여정부까지 15년 동안 분배와 평등의 정책 속에 한국 농업을 발전시킨다고 융단폭격처럼 퍼부은 정책자금 200여조원(자부담 포함) 돈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한마디로 개똥밭의 참외처럼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였습니다. 오늘날 직불제 사건, 농협비리사건 등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고구마 덩굴처럼 캐면 캘수록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정치인과 농민단체 지도자,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만들었습니다.
배고픈 농민에게 급하다고 고기잡는 그물과 낚시대를 외면하고 고기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집어먹으라고 주었습니다. 지금은 입안에 넣어줍니다. 앞으로는
대신 씹어줄 작정입니까? 이것의 결과 한국 농민들은 세계 최고의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 거액의 상금을 걸고 “쌀 품평회”를 개최하여 玉石을 가려야 합니다. 쌀 생산 농가
100%가 일선 단위농협조합원이고, 이것을 가공ㆍ유통하는 RPC 사업체 85%가 농협소유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나라 쌀(주곡)산업은
농협이 생산하고 가공 및 유통하고 소비자 상대 판매를 하는 일괄시스템으로 농협 독점사업입니다. 뿐만
아니라 농협산하 모든 RPC 사업체는 고유상표를 가지고 지대미(종이포장ㆍ소포장) 생산을 합니다. 예컨데, 황토쌀ㆍ토토미ㆍ청풍명월쌀ㆍ백옥쌀ㆍ철원오대미ㆍ임금님쌀ㆍ메뚜기쌀ㆍ오리쌀ㆍ뜸부기쌀
등 무려 1천여종이 되고 여기에 저농약ㆍ무농약ㆍ친환경유기농 쌀 등 실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의 현실입니다. 최근에는 기능성이 가미된 혈당강하쌀ㆍ비타민쌀ㆍ셀레늄쌀ㆍ인삼쌀
등이 소비자를 유혹합니다. 이 모두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소비자는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의 옥석을 가려내는 전국
대회를 농협이 추진하라고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요청했으나 농협은 외면했고, 지금의 농협구조에서는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이제 대통령과 장관인 두 분 어른께서 추진하여 주십시요. ● “국민에게는 건강을, 농민에게는 높은 소득을, 우리 모두에게는 꿈과 희망을 주는 민족
최고의 축제”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저희가 발명한 암과 당뇨가 치료되는 기능성 쌀을
출품하겠습니다. 제가 출품하는 쌀이 1등하면 두 분 어른께서
저희에게 상금을 3억 원을 주시고 제가 출품한 쌀이 1등을
못하면 제가 3억 원을 1등한 곳에 드리겠습니다. 심사의 기준은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여 (1) 밥
맛이 세계 최고라야 하고 (2) 기능성으로
인간의 질병이 치료되고 과학으로 규명되는 세계 최고의 쌀이어야 하고 (3) 생산에
있어 절대적인 경제적 효율성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기 내용의 제안에 두 분 어른께서는 반드시 응해
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발명한 기능성 쌀은 세계 최고입니다. 이미 미국과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겼고, 1kg에 1만원을 받기 때문에 이러한 기능성 쌀이 전체 쌀 생산 농가 1/10만
재배해도 농가 소득에 수조원의 이익이 창출되고 국민들의 질병예방에도 수 조원의 간접혜택이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신개발품 쌀이 출품되리라
희망과 기대도 걸어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이 땅의 국민과 쌀 생산 농가에 내일의 꿈과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08년 12월 9일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원 장 이 병 화 |
며칠후 청와대와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우리는 얼마 전에 쌀 품평회를 개최하였기
때문에 귀하의 요구사항은 해당되지 않는다”라는 참으로 개탄스러운 답변을 받았습니다.
●
제4의 권력화로 진화하는 시민운동을 국민운동인 새마을로 잡으려고 했으나….
YS의 문민정부와 DJ의
국민의 정부 10년 동안 시민운동의 민주화 운동권은 한계를 넘어 정치권을 좌지우지하는 제4의 권력이 되었고, 특히 국가안보와 공권력이 위협받는 지경에 와버렸습니다. 2002년 대선때 정몽준 후보를 지원했었으나, 선거 막판에 정 후보는
진ㆍ좌성향인 노무현과 손을 잡는 바람에 손을 떼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당선자 시기인 두 달 동안 고향친구인 노건평과 저와는 겹사돈이고 노무현 아들의 장인인 배병렬(학교후배이기도함)등 고향 사람들을 동원하여 “내가 새마을중앙회장을 할 테니 너희들이 당선자에게 잘 말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다녔습니다. 국민운동인 새마을로 시민운동 조직을 제압해야 ‘국보법’이 보호되고 과잉되는 민주화운동을 차단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DJ때 임명된 새마을중앙회장은 잔여임기 2년을 다 채우고 물러난다는 소식을 듣고 2005년 6월 8일자 중앙일보 경제판 한 면 전체에 “존경하는 노무현 대통령님, 오영교 행정자치부장관님, 그리고 전ㆍ현직 새마을지도자님께 고(告)합니다”라는 광고를 실었습니다. 이듬해인
2006년 2월말에 새마을중앙회장 선출이 있는 것에 대비책이자 제가 추진할 새마을 운동의
전략홍보물 차원이었습니다. 광고비가 무려 1,680만원이나
되었으나 對국민 공익성광고로 판정되어 국정원에서 1천만원을 지원해주었습니다. 광고가 나간 당일부터 한 달여 동안 전화 및 문자메시지 등과 해외동포들까지 격려를 해주어 잠을 설치면서 24시간 새마을에 대한 상담을 하였습니다.
노무현 측근중 가장 실세였던 최도술 총무비서는 당장 청와대로 들어가서 노무현을 도와주라는 등, 다양한 추천이 있었으나, 저는 진ㆍ좌노선인 그들과는 사상이 달라
같이 할 수 없다고 잘라 답변했고, 오로지 새마을중앙회장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2006년 2월 25일 청와대는 새마을중앙회장으로 내정되었으니 취임사에 읽을 원고를 보자고 하여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2월 26일 저녁, 이수성 前총리가 노무현을 만나 자신이 새마을중앙회장을 하겠다고 하여 제가 추진코자했던 새마을운동
개혁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제가 청와대에 보낸 취임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 시민운동 조직들과 선의의 경쟁하는 국민운동(새마을), 재무장이 필요하다. 민주화 사회, 부정부패척결, 균등분배 및 정의사회구현 등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시민운동조직들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탄생에 크나큰 역할을
하였기에 국민 모두는 이들 조직에 격려와 찬사를 보냈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불행하게도 일부 시민운동단체들은
제4의 권력기관으로 변질되었고, 여기에 직업 삼아 투쟁하는
일부의 조직들이 가세하고 있어 시민운동의 장래를 염려스러워 하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시민운동이란 생활 속의 정치운동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기획 주도하여 시민의 힘을 빌려 정치권과 금융권의 부조리와 재벌ㆍ학교ㆍ공무원ㆍ노동자 권익보호 등의 부정을 감시하는 야당적 기질의 운동이고, 평등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성문법(成文法)에 의존하는 운동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요소를 긍정적
현실로 전환시키는 운동이기 때문에, 운동의 주제가 완료되면 또 다른 표적으로 옮겨가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뭇잎’과 같습니다. 반면에, 국민운동인
새마을운동은 참여 지도자 스스로가 행하는 민족정기수호와 시장경제 성장운동이고, 긍정적인 요소를 더욱
승화시키는 목표와 목적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운동임과 동시에, 윤리와 도덕을 기본으로 하여 국민을
‘의인(義人)으로, 부자(富者)로’ 만드는 불문법(不文法)에 의존하는 운동입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고차원적 정치운동이기도 합니다. 국제적 사례로 독일의 근검정신, 영국의 신사도정신, 중국의 중화정신, 일본의 야마도정신,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정신, 미국의 뉴 프런티어 정신, 프랑스의 문화예술정신, 스페인의 열정의 정신 등은 후손에게 길이 이어지는 국민적 정신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국민운동인 새마을 운동은 단군의 홍익인간, 고구려의
북벌정신, 통일 신라의 화랑도정신, 고려의 상무정신, 조선시대의 청백리사상과 일제 식민지시절의 독립운동 등, 국민들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민족정신을 재집결한 국민 잘살기 운동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한쪽날개(시민운동)만 유난히 발달한 기형조(奇型鳥)처럼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없습니다. 천년을 살면서 구만리 창공을 나는 청학처럼 되려면 빈약한 한쪽 날개를 키우기 위해 새마을과 같은 국민운동을
재무장 시켜야 합니다. 국민운동조직은 태생적으로 정부역할의 대안자이며 경우에 따라 어용단체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정책수행의 동반자입니다. 아울러 민간정부임을 인지하고 철저히 활용해야
합니다.
◆ 죽어가는 농촌부터 국민운동(새마을)으로 살려야 한다.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도 잘 살아 보자”는 열기가 진동할 때 농촌은 분명 도시보다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두 분 김씨 대통령 시절의 지난 10년 동안, 침체되어
가는 농어촌 살리겠다고 자부담 포함하여 무려 1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정책자금을 융단 폭격하듯이
퍼부었으나, 결과는 도․농간의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농가부채는 더욱
늘어나서 지금 이 시간 농촌은 오히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때 국민운동인 새마을과 연계하여
추진했더라면 이렇게 허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의ㆍ식ㆍ주를
망라한 농촌문제는 최고통치자께서 신농씨(神農氏)의 심정으로 삼농(三農 : 농업ㆍ농촌ㆍ농민)은 종적(縱的)으로 분리하고, 삼장(三場 : 농장․공장․시장)은 횡적(橫的)으로 통합하는, 그야말로 근본부터 바로잡는 외과수술을 단행하면 해결 가능한 것이지만 공직사회에 일부 존재하는 부처 이기주의의
저항에 용단은 쉽지 않겠으나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요, 넘어야 할 산입니다. 한국은 직선거리로 휴전선에서 남해안까지 450km,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30km의 직사각형태의 구조로, 국토면적은 지구촌 200여개 국가 중 109위(약9만9천㎢)이고, 농가 인구비중은 7.4%에 불과하여 175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렇게 자그마한 나라에서 비싼 땅(서울 명동)과 싼 땅(경북 봉화)의
가격차이가 무려 100만 배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 약18만 배, 일본 23만
배, 스위스 5만 배,
대만 12만 배). 여기에 농고생 1만 명에 농대생이 6만5천
명(전문대와 농과계열 포함)으로 1대 6.5라는 가분수와 같은 인류역사에 전무후무한 해괴망칙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미
이병화박사님!!!
저의 블로그에 퍼 가서
박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