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야, 김대중 사조직이 유시민에게 건 괴전화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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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사논객 작성일13-08-22 07:14 조회3,18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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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4일부터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의 증언에 따르면 광주의 무장시민군이 광주시민들을 끓어앉히고 총구를 겨누는 위 사진 장면은 1980년 5월의 광주해방구에서 종종 목격되던 장면이었다. 박남선은 그의 상황일지로부터 그 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한다:
상황실에서 업무를 보고받고 있는데 윤상원이 뛰어들어와『2층 부지사실에서 시민ㆍ수습위원들이 무조건 무기반환을 결의한 뒤 시내 일원에서 무기회수에 들어갔다』면서 막아야 한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장병력 20여명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2층 복도와 부지사실 문앞에 M16으로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키고 내 지시가 있으면 무조건 전부 사살해버리라고 명령한 뒤 부지사실 문을 군화발로 차고 들어갔다.
시민군 대장 박남선의 증언 캡쳐
(출처: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06.html
이렇듯 박남선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 반환 거부의 주체는 윤상원이었다. 윤상원이 누구였던가? 광주사태 당시 전민노련의 중앙위원 겸 광주 지역 노동운동 총지휘자였던 윤상원은 김대중의 사조직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소위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이었다. 25일까지는 시민군에게 무기 반납의 기회가 있었고, 만약 그때 무기반납 의사표시만이라도 있었더라면 27일 새벽의 무력충돌 및 그 전투로 인한 계엄군과 시민군 양편간의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주에서 김대중 세력의 전권을 행사하던 윤상원과 복면 쓴 불순세력이 24일과 25일에 무기 반납을 강하게 저지하여 27일 새벽의 전투로 치닫게 하였다.
아래의 대한뉴스 제 1284호는 1980년 5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순방길에 오르시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역사학도
http://www.study21.org/518/rumor/strange-phone.htm
5.18인민군 검사 채동욱과의 일전이 시작되었다
http://www.study21.org/518/
전두환의 미환수 통치자금 vs 시민군의 미회수 실탄
http://cafe.daum.net/issue21/3IBb/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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