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시국대책회의? - 광주의 역사왜곡부터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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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산 작성일13-06-02 07:57 조회2,7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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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가 2차 [시국회의]를 갖고 채널A와 TV조선에 출연해 북한군의 개입설을 주장한 이주성, 서석구, 김명국, 이주천, 임천용 등 5명에 대해 형사고발한다. 5·18역사왜곡대책위는 1일 오전 광주시청에서 강운태 광주시장과 5·18관련단체, 지역원로, 시민사회단체, 법조계 등 각계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5·18역사왜곡대책 제2차 시국회의를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 한겨레신문
‘시국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강운태 광주시장 프로필이다.
48년 화순 생(67세)/부친 공무원/4남2녀 중 강운태까지 내리 3명 대졸-이후는 소개 없음
서울대 외교학과/행시11회/시장, 장관, 국회의원 역임/‘10년 광주시장 당선 - 72년 중앙부처사무관으로 출발, 이후 공백도 없이 내리 국록으로 살아온 자. 아버지 공무원에 3남 강운태까지 모두 대졸이면 당시 5% 이내의 특혜 층. 일단 대한민국에 원한 가질 이유는 없고, 흔히 말하는 전라도차별의 설움대상 조건도 아님.
이런 자가 지금 대한민국을 향해 살기어린 원한을 쏟아내고 있다. 단지 광주의 이익을 위해 호남외의 지역 사람들에게 택도 아닌 고소고발 전쟁을 선포 지휘중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이 음모를 [시국회의]라 한다. 강운태는 광주가 대한민국 위에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렇잖으면 어떻게 시국회의란 이름을 붙여? 5.18단체의 명예와 손해가 곧 대한민국의 심각한 문제란 뜻인가? 그래서 지금 강운태가 대한민국 시국대책을 주도하고 있는 거여? 서울대출신의 두뇌에다 공직으로 평생을 보낸 자가 이런 중요한 용어의 정의와 용처를 분간 못할 리 있나?
고위공직을 두루 섭렵하고 장관 국회의원까지 한 자의 의식수준이 어떻게 이 모양인지,,, 스쳐가도 그만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이 발상의 간극은 중요하고 크다. 대한민국에는 관심 없고 오직 광주의 이익만 필요하다는 철학으로 무장된 사람에게나 가능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국가관이 바로 서 있는 공직자라면 광주5.18단체에 한정된 문제에, 국가적 관점에서 사용되는 시국회의란 용어를 붙이는 과대망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헌데 광주시장이 5.18단체의 이해에 걸린 일을 두고 국가기관인 광주시청에서 [시국회의]를 개최했다 한다. 광주의 저명한 지식인 지성인들이 다 모였던 모양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국가보다 광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런 사고체계가 광주 호남을 대한민국으로부터 스스로 왕따 시키게 된다. 그런 사고방식이니 광주가 감히 호남이외의 지역을 향해 고소고발 협박 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고. 그래, 대한민국을 향한 이따위 협박이 끝내 통할 것 같은가? 광주 지식인 지성인들은 이다음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않나? 그냥 그때그때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란 건가?
그래서 강운태가 어떤 사람인지 프로필을 조사해 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대한민국 혜택은 상급으로 누린 자다. 이는 결국 국가관이 타 지역과 다른 전라도식이라는 차이로 볼 수밖에 없다는 거다. 광주5.18의 역사는 자신들이 뻔히 왜곡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타 지역사람들에게 역사왜곡 한다고 뒤집어씌우는 것도 그 결과일 것이다.
상상초월의 무장봉기와 살육전을 치루고도 태연히 5.18은 [세계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 게 단적인 례 아닌가? 그래놓고는 지금 또 국민을 향해 극단적인 행동에 돌입하며 그 모의를 ‘시국회의’라고? 강운태시장이 광주5.18을 대표한다면, 그래서 5.18역사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나섰다면, 타 지역 국민들에게 역사왜곡을 바로 잡겠다고 나서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 국가적 사건인 광주5.18을 국민적인 동의도 없이 광주사람들 멋대로, 더구나 저런 거짓말로 유네스코에다 등재한 건 당장 취소하라.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이중으로 망신시키는 짓이다.
둘째, 호남사람들이 전두환을 5.18 광주학살원흉이라 하는 역사왜곡에 사과하라. 최규하 정부에서 군은 물론 정부행정 지휘계통에도 있지 않았던 전두환에게 5.18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건, 대한민국국민의 수준을 전 세계에 망신시키는 짓이다.
셋째,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발포로 광주시민이 자위적 수단으로 무장에 들어갔다고 선전해온 역사왜곡에 사과하라. 이는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귀중한 재산인 공수부대를 모욕하고, 그들이 목숨 걸고 도청 사수한 사실을 심대하게 왜곡한 것이다.
강운태는 조갑제닷컴의 공수부대 증언를 읽고 소감을 답하라. 북한특수군 남파여부에 광주사람들 손을 들어준 조갑제이니 그 내용에 신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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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아래 증언은 조갑제닷컴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5월19일부터 27일까지의 광주 현장을 종합적으로 느껴 볼 수 있는 공수부대 대대장 2명과 전투경찰 1명의 증언이다. 고소고발 등 후일의 필요를 위해 여기 종합해 요약해 둔다.
❑ 11공수여단 61대대장이었던 안부웅 당시 중령 증언 요약
- ‘80년 5월19일부터 광주에서 임무수행 (월간조선 ‘07년 10월호)
『개인장구로 M16·군장·방석모 등과 부대장비로 팀 단위 무전기·가스살포용 화염방사기 등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계엄군으로 출동하면 대학을 점령하고 운동장에 주둔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둔 개념으로 장비를 가지고 다닌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TV, 테니스 라켓 등 개인 私物(사물)도 전부 가져갔습니다』
- 1980년 5월19일 새벽이라 그런지 시위대와 충돌은 없었습니다. 배치된 병력들로부터「이상無」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특이상황은 없었습니다. 그 뒤 (여단 본부인) 조선大로 복귀하여 잠시 정돈을 하면서 지내다 세면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1지역대장으로부터 무전보고가 왔습니다.「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해 달라.
-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확인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역대장이 「지금 병사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니 대대장님이 빨리 나와서 확인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습니다.
-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10여 명 정도가 200여 명의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 5월19일 날이 어두워지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차량에 불이 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1개 지역대 병력을 제가 데리고 가보니 경북 번호판을 단 타이탄 트럭 1대가 불타고 있었으며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이 구타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 5월20일 오전에는 별다른 충돌상황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1개 내지 2개 팀을 주요 목지점에 배치해 놓았는데 12시경 되니까 시위대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습격하는 방법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시위대 중 40~50代 정도의 사람 2~3명이 계엄군에게 먼저 말을 걸어 봅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디 부대냐, 언제 내려왔느냐」라고 물으나 저희 병력은 답변하지 않고「해산 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삽시간에 100여 명 이상의 시위대가 집결했습니다.
- 시위대가 집결하면 앞에서 말을 걸던 사람이 군중 속으로 빠지면서 「우우」 하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군중들도 따라하다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200~300명이 모여들어 같이 돌을 던지곤 해 할 수없이 그곳에서 우리 대대는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습니다.
- 19시경이 되자 최루탄이 다 떨어지고 날도 어두워지고 해서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지금 무등 경기장에 차량 100여 대가 집결, 금남로를 향해 오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여단에 보고하니 여단에서는 「선무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만 하고 더 이상 지원도 해주지 않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밀려들어 오는 차량들을 보니 분명히 저희 병력을 향해 밀고 들어올 것 같아 병력을 인도 쪽으로 비키게 했습니다.
― 당시 시위대들은 몽둥이·쇠파이프·갈고리·도끼 등 흉기가 될 만한 것은 전부 들고 있었으며 시위 상태도 이전과 약간 달라졌습니다.
― 5월20일 금남로 상황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때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병력이 시위대로부터 구타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병력들이 완전히 의기상실하고 공포감에 눌린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병력들을 향해「대대장과 너희들이 여기서 죽는다. 이 자리를 물러날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자리를 지키자」라고 병사들을 격려했습니다.
- 5월21일 08시경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금남로에 완전히 꽉 찰 정도로 운집하여 저희 병력 약 10m 전방까지 진출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시위대도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고 우리 앞 10m 전방까지 전진했습니다.
- 당시 저는 병력들에게「눈도 돌리지 말고 서 있으라」고 지시해 병력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돌, 화염병,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 09시경 정도 되니 어제 선동방송을 하던 여자가 시위 군중 사이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왔는데, 나오면서 「죽은 사람이 내 동생인데 계엄군이 죽였다. 살인마 계엄군을 쫓아내야 한다」는 취지로 선동을 했습니다. 군중들이「와와」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이걸로 눈을 쑤셔 버려?」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 우리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 거기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빵빵」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11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慶箕萬)씨의 증언. 『우리 등 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 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 측의 장갑차 한 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 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 3공수여단 15대대장이었던 박종규중령의 5·18 체험수기 요약
- 5월20일 광주로의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광주에 도착하니 광주역에는 31사단장(정웅)이 역장실에 나와 있었다. 정웅 사단장은 패퇴한 장수처럼 초라하고 질린 표정으로 『공수단이 학생들을 마구 때린다』고 모기소리만 한 소리로 여단장에게 하소연했다. 여단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다.
- 나는 두 지휘관의 대화를 더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와 7여단 권승만 중령을 만났다. 피로에 지친 권중령은 말도 말라고 하며 겁이 난다는 것이었다. 오전에는 좀 나은 편인데 조금 있으면 시위 군중이 갈쿠리(갈고리), 쇠파이프, 몽둥이, 돌 등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공수단의 얼룩무늬복만 봐도 도망가기가 바쁜 게 이제까지의 시위 군중이었는데 도망은커녕 공격을 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조짐이었다.
- 우리 대대지역에 별일이 없는가 하여 몇 개 교차지점을 순찰했다. 중간 중간에 우리 병력 하나둘을 10여 명의 시민이 에워싸고 욕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세계최강을 자랑한다는 무적의 공수단이 시민에 포위되어 욕을 듣는다니…. 나 자신도 무전병과 둘이 순찰하기는 겁이 났다.
- 11, 12, 13대대가 광주역에 무사히 도착하는 데는 엄청난 위험이 있었다. 대대가 완전히 포위되어 시위 군중의 돌과 몽둥이에 대대가 해체 직전의 위험까지 갔다고 한다. 화염방사기,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어 쫓기듯 돌아왔다고 한다.
- 광주의 시위는 공수단의 엄청난 착각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얼룩무늬복에 베레모만 쓰고 차려 자세로 투입되기만 하면 시위가 끝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던 시위가 공수단의 패퇴, 공수단에 대한 공격, 부대의 와해, 사단장 차량의 피탈, 공수단의 무등산으로 도주 등 실로 6·25전사의 3군단 패퇴에 못지않은 치욕의 전사가 기록되고 말았다.
- 무인 돌진 차량(액셀러레이터와 운전대를 일정 속도와 방향에 묶어놓고 기어를 1단에 넣은 후 클러치를 떼면서 사람이 뛰어내리고 돌진케 하는 차량) 공격이 시작되면서 우리 대대 앞에도 5대 가량의 무인 돌진 차량이 간헐적 공격을 감행했다. 찾아서 공격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고 허기져 있었다.
- 이때부터 『차 온다!』는 고함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광주사태가 끝나고 귀대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우리 3여단 장병에게 『차 온다!』는 고함경고는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악몽의 함성으로 잔영되었다.
- 간헐적 무인 차량공격과 함께 각 방면에서 폭도의 몽둥이 공격, 투석 공격은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적은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고, 우리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부대 건재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대항을 지속했다.
-『폭도도 우리 동포다, 허벅지 아래만 때려라』『머리를 때리지 말라』『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폭도의 돌멩이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계엄군과 민주시민 항쟁의 차원이 아니라 죽이고 죽이려는 감정의 대립이었다. 영남과 호남의 대립이 아니라 20대 젊은이들의 난투극이었다. 집권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이 아니라 군대 간 자식과 버스 조수의 감정 대립이었다.
- 밤 10시가 훨씬 넘었다. 그런 적막도 잠시였다. 저 멀리 양동교 방향에서 함성과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함성이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차 온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12대대 쪽에서 굉장한 속도로 라이트를 켠 화물차가 질주하여 분수대를 돌아 달아났다. 엄청난 속도였다. 얼마 있다가 16대대 운전병이 돌진 차량을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죽었다는 최초의 피해보고가 구전되어 왔다.
- 이제 무인 돌진차량이 유인 돌진차량으로 바뀌어 속도도 엄청났지만, 방향이 일정치 않고 오히려 우리 대형을 찾아서 돌진하는 공격이기 때문에 우리의 위험성은 훨씬 높아졌다. 드디어 우리 대대 앞에 유인 돌진차량이 공격을 감행했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에 눈을 돌리니, 화물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직진하고 있었다.
- 수차례의 폭도 공격이 있었고 시간은 밤 11시가 지난 듯싶었다. 이제 또 한 번의 차량공격이 예고되었다. 병력의 선두에 서 있는 내 앞 저 멀리 군중 속에 헤드라이트를 켠 2t 트럭이 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부 병력이 『차온다』고 예고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기억을 더듬는 지금 또 가슴이 뛰고 있다.
- 차가 돌진을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직진이 아니고 병력이 피하는 쪽으로 향하면서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돌진해 오고 있었다. 정확히 내 정면이었다. 100m, 50m, 30m… 명중시킬 곳이 없었다. 라디에이터에 명중시켜 봐야 돌진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바퀴는 잘 보이지도 않고 크기도 너무 작았다.
- 나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적은 이미 나를 발견하고 나를 목표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간단하다. 내가 차량 앞으로 돌진하면 그대로 부딪혀 죽게 되어 있었고, 왼쪽으로 도망가면 운전사의 간단한 핸들조작만으로 나는 치어죽게 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도망가도 조건은 마찬가지이며, 뒤로 도망가도 절대속도가 워낙 차이 나기 때문에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 발이 아스팔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는 이미 맹렬한 속도로 3m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짧은 0.1초 동안 나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안 생각도 났다. 그러나 가장 끝까지, 죽음 앞에서 생각한 것은 배고파 지친 우리 대대 병력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난국을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나의 행동에 달려 있거나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운명에 달려 있었다. 앞뒤의 선택은 이미 늦었고, 내가 살기 위한 선택은 좌나 우 둘 중의 하나였다. 오른쪽으로 뛰어 넘어져 버렸다. 마치 비행기가 미사일을 피하는 방법으로, 권투선수가 스트레이트를 피하는 방식으로 차량은 휙 지나가면서 나를 에워쌌던 부대 4명 중 2명이 차의 뒷바퀴에 끌려가면서 다친 것으로 끝났다.
- 차가 분수대에 부딪혀 멈추자, 우르르 몰려간 우리 병력에게 운전사가 잡혀 끌어 내려졌다. 감정에 북받친 우리 병력은 진압봉으로 그를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잘못을 안 그 운전사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맞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때리지 마!』 그러나 그것은 전장에서 사격을 중지시키는 것만큼 들리지 않는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때리지 마! 때리지 마!』
- 나를 죽이기 위해 정면으로 달리는 적에게 나는 실탄과 총이 있음에도 사격을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사격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한다는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광주사태에 참가한 대대장으로서 이만한 비폭력적 소신을 갖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 16대대 운전병이 치어죽은 과정의 단편과 차량 돌진 공격의 유형에서 「5만원짜리」와 「8만원짜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5만원짜리는 무인 돌격차량 조작이고, 8만원짜리는 유인 돌격으로 공수단 대형을 한 바퀴 공격하고 오는 사람에 대한 포상이라고 들었다.
- 한 녀석을 잡았더니, 가슴에 타이어로 몸을 감는 안전장치를 했더라는 얘기며, 차량 돌격조의 출발지를 공격해서 수색해 보니, 진짜 조정자는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휘하고 있더라는 얘기도 들었다. 환각제 비슷한 약을 뺏어서 그 당시 군의관에게 확인시켰더니, 환각작용을 하는 약이 맞다고 했다. 따라서 우발적인 시위가 아니고 조직적인 시위라는 것이었다.
- 5월21일 08시쯤 눈을 떴다. 16대대가 전남대학교 정문을 방어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09시쯤 대학 정문 앞 철교 위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수백 명이 되어 있었다. 점차 열을 지어 정문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돌과 몽둥이로 공격을 개시했다.
- 전남대학교가 폭도에 의해 유린된다면 공수단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와해되든가, 아니면 실탄을 장진하여 총격을 가하다 그마저 인해전술에 밀려 끝장나면 죽음뿐이었다. 부대의 와해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병력은 지치고 적의 시위는 점점 조직화되어, 정문으로만 돌파를 시도하려던 적은 게릴라 수법의 침투를 시도했다. E-8 발사통은 이제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광주출신 지역대장이 마이크로 『나도 고향이 광주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고 호소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 나는 광주사태가 절대로「시민항쟁」이나 「민주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군의 공격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군에 공격을 감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선량한 시민으로 시위에 참가했을 뿐인데 자신들을 자극해서 흥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목이 터져라 하고 호소했다. 최루탄 한 발을 쏴도 충분한 경고와 안전대책을 강구하고 발사했다.
- 시민들은 『나는 못 들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군은 무고한 시민에 공격을 가한 게 아니다. 계엄군 앞에서 집요한 괴로움을 준 폭도에게도 끝까지 설득했다. 경고도 했다. 어찌 보면 극렬한 시위 분자들이 선량한 민주시민과 계엄군을 싸움 붙인 격이다.
- 이제 우리 대대뿐만 아니라 全여단이 피로에 지쳤다. 폭도들이 극렬하게 시위를 해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 여단이 폭도들에게 제압당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3여단의 두 번째 행운이 시작되었다. 전남대학교 철수지시가 그것이었다.
- 대대의 중앙에서 후문을 막 빠져나가는 순간, 철교 부근의 시위 군중 속에서 「탕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으나 거리가 멀어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맨 뒤에서 철수하던 병사가 『대대장님,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했다. 진정한 광주사태 시작을 알리는 신호등이었다. 이제 폭도가 총을 가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심각한 문제였다. 막느냐 못 막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 지금 기억으로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가 좁은 길을 따라 행군하는데 폭도가 군용 차량에 가득 타고 카빈 소총을 흔들며 전속으로 질주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우리를 향해 발포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들은 고함만 지르고 통과했다. 시위 군중 속에서 총소리도 들었고, 멀리 군용차를 타고 카빈을 흔들고 지나가는 것이 목격됨으로써 폭도가 무장했음이 확인된 셈이었다.
- 행군 중 대형이 교대되어 우리가 제일 선두에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선두가 광주교도소 정문을 들어서고 대형의 중간쯤에서 이동하던 내가 31사단의 대대장과 악수를 하고 주유소 앞을 통과하는 순간, 「탕!」 소리와 함께 무전병이 쓰러졌다. 나는 순간 놀라 뛰는 대대원들에게 주유소와 민가지역을 수색하여 범인을 잡으라고 외쳐댔다. 정말 순간적이었다.
- 잠시 지나고 정신을 차려 확인한 결과, 대학생 4명이 탈취한 군용 지프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탕!」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고개를 넘어가더라는 것이었다. 범인은 그들이었다. 권총을 차고 배낭이 없는 나의 행색은 멀리서도 쉽게 지휘관임을 알 수 있었으며, 31사단 선임자와 악수를 하고 무전병을 옆에 대동했으니까 쉽게 지휘자로서의 표적을 제공한 셈이었다. 이 총격이 광주사태에서 내가 겪은 결정적인 죽음의 두 번째 고비였다.
- 나는 각 지역대장을 집합시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각 지역대장은 잘 들어라. 첩보에 의하면 선량한 시민이 점차 시위에서 빠져나가고, 광주시민 자신들이 겪은 3일간의 불편을 느끼면서 시위 자체가 전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하여, 시위를 자제해 가고 있다. 이를 불안하게 느낀 일부 극렬분자와 조직들은 그들의 강력한 지원세력을 얻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해 죄수들을 석방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 만약 저들의 계획대로 교도소가 폭도들의 수중에 들어가 죄수가 석방되어 무장된다면, 목숨을 건 대항을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교도소는 사수되어야 하며 ~
- 5월22일 낮 동안 무장 폭도들은 미원 광고판 방향에서 수차례의 공격을 감행했고, 앉아서 있다가는 당하기만 할 것 같아서 12대대와 13대대가 수차례의 파쇄공격을 감행하여 적을 제압했다.
- 비교적 별다른 충돌 없이 송정리 부근의 후면까지 도착했을 때, 헬기에서 행군을 지휘하던 부여단장으로부터 다급한 무전연락이 왔다. 행군 전면에 아무 이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별일 없이 행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부여단장은 도로상에 폭도들이 TNT를 매설했다는 첩보가 있고, 11여단이 당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첨병에게 그와 같은 첩보를 전달했다. 11여단은 폭도들의 교활한 허위첩보 제공으로 상호 교전케 하여 대대장의 팔이 달아나고, 16대대에 같이 있다가 고등군사반 교육 후 11여단 대대 작전장교로 간 나의 부하가 즉사했다.
- 5월27일 05시경 작전의 성공 보고가 들어왔다. 피해 1명 전사, 적 1명 사살, 나머지 생포. 전남도청 점령완료! 꿈만 같았다. 내가 작전을 했다 하더라도 그 이상 잘 해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작전이었다. 키가 난쟁이 똥자루만 한 임수원 중령 그가 겁먹은 모습으로 여단의 지시를 받고 떠난 지 5시간만의 쾌거였다.
- 무장한 폭도가 200여 명. 그들은 모두 죽음을 불사하는 극렬분자들이었다. 거기에 수없이 쌓인 TNT, 수류탄, 각종 무기, 자기들끼리 회수해 쌓아 놓았다는 수천 정의 총기. 그 위험 속에 단 2명의 희생만으로 탈환에 성공한 것은 엔테베 작전에 못지않은 자랑거리였다. 죽은 11대대 병사는 2층에서 폭도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즉사했다고 전해 들었다.
- 광주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려면 부하의 잘못을 상관이 떠맡아 주려는 한국적 미덕을 제거하여야 하며, 그 반대로 상관의 잘못을 부하가 부담하겠다는 한국적 충성심도 고려되지 말아야 한다. 상관은 상관대로 『나는 하급자에게 발포하라고 한 적이 없다』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여론은 그것을 부하에게 떠넘기는 비열한 도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 억울한 희생자가 보상을 요구하며 팔을 걷어붙일 때, 총기를 잘못 다루다가 사람을 죽인 폭도는 떳떳이 나의 잘못도 있다고 침묵을 깨야 한다. 군인을 매도하는 광주시민의 함성이 있을 때, 나를 치어죽게 하려다 달아난 지금 30이 되었을 청년은 나 같은 합리적이고 선량한 국민의 군인도 있었다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민간인을 총으로 쏠 수 있느냐고 울부짖는 사람 앞에 광주교도소에서 나를 저격한 대학생은 자신이 총을 쏘았다고 자백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광주사태의 규명이다.
- 가해자(?)의 설명이 피해자의 절규에 파묻혀 버려서는 안 될 것이며, 극도의 혼란한 상황에서 의식 없이 쏘아댄 유탄에 맞아 불구가 된 어린이의 슬픔을 군인이 조준하여 사살한 양 붙들고 늘어져도 한풀이이지 사실의 규명이 아니다. 피해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보다는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의 양으로만 하자면 교통사고로 죽는 인명이 더욱 국가가 슬퍼해야 할 양이다. - 군인의 죽음을 기억하라
❑ 경상도 전경 남씨(대기업 근무 중) 체험담 요약
<1985년 7월호 월간조선>
- 경북대학교 정외과 2년을 마치고 전투경찰관으로 입대, 전남 도경 2기동대 소속으로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사태를 맞게 됐다. 광주사태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5월20일 밤, 나는 전남도청 앞에서 데모대를 막고 있었다.
- 밤 9시쯤 군중 쪽에서 버스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부서지고 불탄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우리 전경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피해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 버스를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
- 그때 우리는 최루탄이 거의 떨어져 데모대가 몰려오면 투석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전경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오른쪽에 있는 담벼락을 긁으면서 스르르 멈추었다. 버스 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둠 속에서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끼거나 깔려 뒤엉켜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어머니!』하는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축 늘어진 팔, 다리였다.
-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경장,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순경 등 네 명이 숨졌고 김대민 순경 등 네 명이 중상을 있었다. 이 버스를 몬 운전사 김갑진, 배용주 씨 등 2명은 그 뒤 경찰에 구속, 복역하다 석방됐다. 이들은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밀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몰고 가다가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를 세웠는데 그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편집자 주)
- 20일 자정인지, 21일 새벽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데모대가 밤을 새워 시위를 했다. 중학생에서 노인까지, 여대생에서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 쇠파이프 등이 들려져 있었다. 모두가 악에 바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 여자가 마이크로 군중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주시민 여러분, 경찰이 던지는 것은 수류탄이 아니고 최루탄입니다. 맞아도 죽지 않으니 전진합시다.
- 도청에서 가까운 충장로로 우리 부대가 진압 차 출동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데모군중의 습격을 받고 우리 몇 명은 고립됐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곁에 있던 동기생 한 놈이 『우린 여기서 죽는다』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달아나다가 쓰러졌다.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1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우리를 구원하려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돌입했고, 군중은 흩어져 달아났다
- 21일 낮 1시쯤이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도청 정문 앞에 포진하고 있었다. 금남로의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공수부대원들이 서 있는 쪽으로 질주해 오는 게 보였다. 유리창은 박살 나 있었고, 그 안에는 수십 명의 시위자들이 타고 있었다. 몽둥이로 차체 외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 버스는 공수부대원 쪽으로 돌진했다. 두 명의 군인들이 차에 들이받혀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이 때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두 바퀴쯤 돌더니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버스를 향해 10m쯤의 지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했다. 차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거의 엎드려 쏴 자세로 군중을 향해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군중은 달아나지 않았다. 나의 기억으로는 도청 앞에서 조준 사격이 시작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전에는 주로 공포였다. 공수부대원들이 돌진한 버스에 치인 것이 동료들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인 듯 했다.
- 나는 도청 어느 모퉁이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몇 시쯤 됐을까. 누가 깨웠다. 우리 기동대장 허모 경정이 전경들을 집합시키더니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일단 해산한다. 각자 집으로 가거나 적당히 피신하라.
- 나는 광주에 사는 동료 전경에게『날 좀 숨겨 달라』고 했다. 그는『南상경님은 사투리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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