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폭동성(무장봉기)을 바라보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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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3-05-24 15:28 조회3,5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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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폭동성(무장봉기)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점!!
광주사태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광주사태 일지를 낱낱이 뜯어보는 미시적 접근만으로는 부족하다.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건국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흐름과 소위 반정부투쟁의 맥락이 북괴의 대한민국 전복투쟁(대남전략)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살펴볼 줄 아는 거시적 접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1. 광주사태는 눈앞의 부정선거에 공분한 4.19류의 비폭력 민주화 요구투쟁이 아니다.
무장봉기가 수반된 대한민국 전복투쟁(무장반란)이었다. 광주정신을 들먹이는 자들이 스스로 언급한 시민군(폭도의 다른 표현)개념, 광주꼬뮨(도시게릴라 공산화 해방구의 다른표현)개념 등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규군인 국군과 치안담담자 경찰을 적으로하는 시민군이 무장봉기를 통해 만들어낸 공산화 해방구에 대하여 광주꼬뮨이라는 명칭으로 누차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라!!
2.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 여부는 덜 중요하다.
일거에 44개 무기고에 대한 습격 및 무기탈취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즉 봉기 준비세력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봉기였다는 사실이다. 최소 3개월 이전부터 무기고 정보를 모으고 다녔다는 여러 증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따라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무장의 동기였다는 명분은 애당초 성립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앞으로 있을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비하기 위해 3개월전부터 무기고를 털 준비를 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북괴개입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더더욱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북괴개입설을 지탱하는 증언들에 따르면 전면남침과 연결되는 광주폭동을 사전에 결정하고 치밀한 준비를 해왔으며 광주사태 초반에 자생적인 운동권세력이 만들어내기 힘든 입에 담지못할 악성 유언비어를 거침없이 퍼트리며 순식간에 무기고 습격과 무기탈취가 이루어졌다. 당시 대남총책이던 김중린은 고정간첩들을 총동원해 광주무장봉기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혈안이 됐으며 특수부대는 광주현장을 지휘하고자 침투했다. 납묵여배우 최은희 증언에 나온 노동당 부부장이 김중린이 아닌가 추정된다. 78년 시점에서 3년뒤엔 남조선이 틀림없이 해방될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북괴는 모종의 무장봉기전략을 대남전략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침투조대장이었던 자가 문제심이며 나중에 인민무력부 부부장까지 승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탈북자들의 위와같은 증언이 아직까지는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면 광주사태에서의 거침없는 무장봉기와 관련된 내용을 준비한 자생적 세력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에 대하여 김대중의 국민연합을 거론하는 증언이 많다.하지만 국민연합은 반체제인사와 조직들이 망라되기는 했지만 광주사태에서의 무장봉기를 진두지휘할만큼 사전에 준비돼 있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반체제 민주화투쟁인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베트콩처럼 무장봉기를 정치노선으로 삼고 혜성대라는 무장조직을 꾸리려했던 남민전도 79년에 이미 일망타진되고 잔당만이 일부 남아있을 뿐이었다. 남민전은 민주화운동세력이 아니었다. 광주사태에 참여하여 가세할수는 있어도 무장봉기를 주도할만큼 조직을 튼실하게 정비하고 있었던 상태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간과된 조직이 하나 있다. 바로 김종태를 수괴로 하고 김질락을 핵심인물로하여 4.19직후 김일성의 지시로 조직된 지하당 통혁당이 바로 그것이다. 1968년에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간첩단을 적발하고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지만 김일성은 75년 외교문서에서 남조선에 통혁당이 존재하며 당원은 3000 명 수준이라고 하였다. 서울에서 방송된다며 통혁당의 목소리라는 방송을 해주에서 송출하고 있었다. 통혁당이 바로 고정간첩과 연계되어있던 남한의 지하당이며 70년대에는 일체 적발되지 않고 역량을 보존했던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적화통일 혁명정당이었던 것이다.
79년 10.26사태가 터지자 북괴 통일전선부의 남파공작원들과 연계된 통혁당원들이 전략전술 등 모든 부분을 일체화시키며 80년 민주화의 봄 공간에서 대중투쟁을 배후에서 지휘해 나갔으며 국민들은 김대중의 국민연합으로만 알고 있었다. 김중린이 김일성 앞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여유를 준다면 광주봉기를 틀림없이 전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고 장담한 것도 바로 고정간첩과 튼튼하게 연결된 통혁당을 믿고 한 소리였다. 79년 10.26사태이후 통혁당 잔존세력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80년 광주사태의 성격과 역사적 맥락을 규명하는 핵심내용이 될 것이다. 김일성의 유일주체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한반도 공산화통일을 추구했던 반역혁명가들의 집단인 통혁당의 추적 연구활동 없이 광주사태는 제대로 밝혀질 수 없다.
86년 소위 김영환의 종북주사파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60년대부터 통혁당을 통하여 주체사상파가 민주화운동권의 주도권을 틀어쥐었으며 주요 민주화운동의 배후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86년에 김영환의 주사파가 등장했을때 지하에서 이미 암약하고 있던 통혁당계 운동권 주사파는 김영환을 주사파조직을 박살내기 위한 안기부 공작의 산물로 의심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북에서도 90년대에 들어와서야 김영환을 접촉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요약
시민군, 광주꼬뮨 등의 용어는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용어이다.
북괴군 개입설의 신빙성이 낮다면 광주사태는 더더욱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광주사태의 배후로서 고정간첩과 연계된 통혁당계 운동권을 주목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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