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은 무장폭도임을 입증한 조갑제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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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사논객 작성일13-05-23 19:33 조회2,947회 댓글8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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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금남로의 시민군은 실탄 이십 만 발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광주공원 등 무기분배 장소들에 실탄이 수북이 쌓여 있었으며 시민군 군용트럭이 금남로를 오가며 실탄 분배를 하고 있었다. 시민군의 인마살상용 실탄 이십 만 발은 금남로에서 시위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실탄은 전쟁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시민군은 대한민국과 전쟁을 벌이려 하였는가?
무장단체를 시민군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무장폭도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마도 이것은 민간인 무장에 얼만큼 정당성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조갑제의 책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는 금남로의 무장단체가 무장폭도들이었음을 입증한다.
저항권이란 용어를 쓰며 무장반란을 정당화하려는 5.18 사기꾼들의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5.18 사기꾼’의 정의를 내려보자. 이 글에서 ‘5.18 사기꾼’이라 함은 5월 21일 오후 2시에 31사(광주향토사단) 헬기가 조선대에서 도청으로 실탄을 실어왔다고 허위주장하는 자이다.
5월 21일 정오까지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충정작전 때는 단 한 발의 실탄도 지급되지 않는다. 11공수가 5월 20일 충정작전에 동원되었을 때 단 한 발의 실탄도 휴대하지 않았다. 21일에 도청 앞에 있게 된 이유는 20일 저녁에 이미 사면 팔방으로 시위대에 포위되어 임시숙소인 조선대로 복귀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틀째 쉬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도청앞으로 쫓겨왔다가 21일 아침이 밝자마자 또 다시 시위대 공격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때 시위대 대열에서 점점 더 무장폭도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20일 밤 도청으로 쫓겨온 군인들 중에는 MBC 방송국 등 광주 시내 방송국들을 경비하다가 방송국 건물이 화마에 삼켰을 때 탈출한 광주향토사단 병력들도 있었다. 한동석 중위가 인솔하는 소대 병력이었는데, 이들은 21일 오후 1시경 31사 헬기로 탈출할 수 있었다. 우리를 사지에 내버려두고 너희만 탈출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공수부대원들을 바라볼 때에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어서 한동석 중위가 경계근무용 실탄 세 상자를 11공수에 배속된 7공수 군수장교에게 넘겨주었다. 20 만발이 넘는 시민군 인마살상용 실탄에 비교할 때 그 천분의 일도 안 되는 수의 실탄이었지만 이나마 이렇듯 광주향토사단 소대장의 도움으로 얻게 되었던 것이다.
1988년 광주청문회를 앞 두고 5.18 사기꾼들의 문제는 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 실탄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입증되어야 도청 앞 집단발포 유언비어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고, 시민군 무장은 저항권 행사였다고 우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입증하지 못하면 시민군은 무장반란군으로 인식된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하늘에서 도청으로 실탄이 떨어졌다고 우길 것인가? 땅에서 실탄이 솟아났다고 우길 것인가? 이것이 광주청문회를 앞 두고 5.18 사기꾼들의 문제였는데, 그 문제를 조갑제 기자가 해결해 주었다.
1988년 광주청문회 때 5.18 사기꾼들이 시민군의 무장반란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유일한 근거 자료는 월간조선 7호에 실린 조갑제 기자의 기고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였다. 이 기고문 중 장석화 의원이 안부웅 중령을 엉터리 심문할 목적으로 인용한 202쪽과 2007년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책명으로 출간된 동일 기고문 동일 단락이 http://www.study21.org/518/books/chogabje.htm 에 있다.
1995년 5.18 재판용으로 출판된 『正史5.18』은 5.18 사기꾼들이 남의 말을 인용할 때에 어떻게 자꾸 엉뚱한 말을 삽입하여 완전 딴 말을 끼어넣기하는 지를 보여준다. 월간조선 7월호에서 조갑제 기자는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라고 안부웅 중령의 말을 인용하면서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는 거짓말을 살짝 끼어넣음으로써 5.18 사기꾼들 지원 사격을 해 주었다 (조갑제 1988:202).
기자가 남의 말을 직접 인용할 때 슬쩍 픽션 소설을 써서 삽입하는 것은 학위논문의 경우 학위가 취소될 만한 범죄이다. 기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무죄인가? 5.18 사기꾼들 입맛에 맞게 조기자가 픽션소설을 삽입한 것이 광주청문회를 망쳤다. 『正史5.18』에 인용된 아래의 청문회 심문과 답변대로 장석화 의원과 이인제 의원이 아주 황당한 거짓말로 큰 소리로 심문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 올랐다. 5.18사기꾼들은 조갑제 기자의 엉터리 인용문에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이란 말을 삽입하였다:
- 장석화 의원=(안부웅 증인에게) 『월간조선』 88년 7월호 조갑제 기자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2백2페이지에 있는 내용에 보면 오후 2시께(실제 발포시간과의 차이는 착오에 의한 것이다. 편집자)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 이렇게 기록돼 있는데 증인은 왜 사실과 달리 얘기합니까.
- 안부웅 증인=그 내용이 달리 나왔는데. 31사단 경계병력이 가지고 있던 실탄을 얻은 것입니다.
- 이인제 의원=여기(인터뷰기사) 보면 11여단은 여단에서 실탄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렸을 때 11공수의 실탄이 헬기로 실려가지고 와서 예하 장교 하사관들에게 분배된 것입니다. 그것은 증인이 부정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조갑제 기자와 대대장(안증인)이 시인해 주고 있으니까. 이것을 보면 판단이 그래요.
- 이해찬 의원=실탄인수인계에 관해서 좀더 확실히 할 기회가 없었습니까.
- 임정복 증인=그때 당시의 지휘관이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장 이용덕 중령하고 96연대 작전장교를 했던 홍 대위를 만나서 확인하니까 철수 할 때 실탄 2박스(1천6백 발)를 어느 소속 공수부대인지는 몰라도 인계해주고 철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광주매일 『正史5?18』 1995, 322-323).
이렇게 하여 광주청문회는 목소리 큰 사기꾼들이 큰소리치는 청문회가 되고 말았으며, 작금의 윤창중 사태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언론들이 사실 왜곡에 합류하여 마치 그것이 사실인양 보도하였다. 그때 5.18 사기꾼들의 기세가 그토록 당당하였는데, 그 누가 반박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조갑제 기자가 “반박되지 않는 거짓은 진실이 된다”고 트위터에서 말한 그대로 되고 말았다.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의 근거도 조기자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이다.
31사 한동석 중위가 헬기 타고 철수하면서 200 발의 경계근무용 실탄을 넘겨 주었어도 일반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분배되지 않고 장교들에게만 공포탄 발사용으로 분배되었다.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실탄이 지급되지 않은 발포 명령이라는 것은 없다. 오후 한 시 반경부터 동구청 인근에서 시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어도 그것은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울 목적으로 시민군(혹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가톨릭센터 옥상에 숨어서 쏜 총에 맞았던 것이지 도청 쪽에서 날아간 총에 맞은 것이 아니었다.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발포 명령도 도청앞 집단 발포도 없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마치 사병들이 연발로 집단 발포할 실탄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런 거짓말의 근거는 광주청문회 때 “반박되지 못한 거짓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18사기꾼들의 목소리가 광주청문회 때 기세당당하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된 것은 조갑제 기자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가 증거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5.18 사기꾼들의 거짓말의 모래성은 조갑제 기자의 기고문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조기자의 기사는 확고한 반석이었는가?
http://www.study21.org/518/books/chogabje.htm 하단에서 보듯 그 기사가 그대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라는 제목으로 2007년 10월 3일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책 원본의 인용문 중 앞 문장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가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다.
조갑제 기자가 책에서는 이 문장을 슬쩍 빼버렸을 때 광주청문회 때 5.18 사기꾼들이 위세당당하게 인용했던 말도 없어졌다. 자, 그러면 5.18 진영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도청앞 집단발포가 있었다고 계속 사기치려면 사병들에게 지급할 실탄이 있었음을 입증하여야 하는데, 조기자의 2007년판 책에서 그 문장이 빠졌으니 이제 무엇으로 입증하겠는가?
조갑제 기자는 왜 2007년 책에서는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라는 문장을 빼어버렸을까? 그것은 1988년판 자신의 픽션소설을 섞었으나, 그것은 터무니 없는 허위임을 자각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조갑제 기자는 자기가 광주청문회 직전 했던 거짓말을 슬쩍 없애기 위해 세 개의 문장을 통째로 없애 버렸다. 그런데 안부웅 중령의 말에서 앞의 말 절반을 없애 버리면 그 인용문은 전혀 딴 말이 되지 아니하는가? 5.18 담론에서 문제의 핵심은 발포명령을 내리기 위해 31사 헬기가 조선대로부터 도청으로 실탄을 수송해 주었느냐 않았느냐의 문제이다. 발포명령을 내리기 위해 실탄이 수송되었다면 시민군 무장이 조금이나마 명분을 얻는다. 그러나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면 금남로를 누비던 무장단체는 한낱 무장폭도들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조갑제 기자는 5.18 연구를 가로 막으며, 진실 탐구를 방해하지만 이것이 그냥 이렇게 끝날 문제인가? 31사 헬기가 조선대로부터 도청으로 실탄을 수송해 주었느냐 않았느냐의 문제는 광주청문회 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지금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이 질문이 명확하게 답변되지 못하면 광주사태 폭동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처럼 중요한 문제인데, 왜 조기자는 2007년 책에서는 그 세 문장을 빼버렸을까?
가장 중요한 세 문장에서 조갑제 기자가 거짓말을 끼어넣었다가 송두리째 빼버릴 때 안부웅 중련의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된다. 만약 계엄군은 말을 못하게 할 것이며 계엄군 말은 기자 맘대로 말을 바꾸어 보도하다가 송두리째 절반을 삭제할 것이라면 광주청문회는 무엇하러 하였는가? 증인은 조기자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왜 통일민주당과 평민당 의원들은 조기자가 꾸며낸 거짓말을 맹신하라고 강요하였는가? 청문회를 그렇게 진행시킨 다음 여론몰이로 국민을 속이고, 5.18 재판용 책도 그렇게 출판하여 5.18 재판을 진행하였으니 이것이 끝인가? 아니다. 이것은 조기자가 우리 입을 막으려 한다고 그냥 끝낼 일이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부웅 중령의 말은 철수하는 31사 부대가 실탄통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1988년 광주청문회 때 5.18 사기꾼들의 방패 역할을 해 주었던 조갑제 기자 기사의 수명은 이제 다되었으며, 그 거짓의 실체가 드러났다.
고의적이었든 실수였든 간에 조갑제 기자의 기사에 오류가 있었음이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입증된다. 그러면 조기자의 언론 횡포로 인해 발언권이 탄압을 받고 있는 탈북자들을 위해서도 말을 해야 한다. 도대체 탈북자들의 5.18 증언 중에서 단 하나라도 오류가 입증된 적이 있는가? 그분들의 발언권을 탄압하기 이전에 그분들도 조기자의 5.18 기사처럼 기록이나 말에 오류가 있었던 사례가 있었는지 입증해 달라.
조갑제 기자는 탈북자들의 증언에 근거가 없다고 말하지만 5.18 사기꾼들이 31사 헬기가 실탄을 조선대로부터 도청으로 공수했다고 말하는 주장에는 근거가 있는가? 그런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맹신하도록 강요되어 왔기에 이처럼 5.18 이 왜곡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사태 33주년은 이제라도 그 거짓 주장에 반박하여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반박을 가로 막으시는가?
우리는 월간조선 1988년 7월호에 실린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서 조갑제 기자가 조작한 인용문이 선의의 실수려니 이해하려 하였으며 그 기사로 인해 광주청문회 때 진실이 밝혀질 기회가 망쳐진 것도 관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조기자께서 적극적으로 5.18 사기꾼들을 지원하며 우리의 발언권을 억누르시는 것을 볼 때에는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군이 5월 21일 20 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데, 사실상 전쟁 준비 행위였는데, 이것은 보다 객관적 진실 규명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 날 광주 일원에서 전개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상세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들어본 후 국민대토론에서 결론이 어떻게 나든 들어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33년만에 찾아온 공정한 국민대토론의 기회를 또 망쳐 놓으시다니!
국민대토론이 없으면 다수의 국민은 5월 21일 왜 그리고 어떻게 금남로 일대 시민군이20 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1988년 때처럼 안부웅 중령의 말을 바꾸고 조작하여 보도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에 의거한 설명이 없으면 아마도 그 날의 무장단체에게 시민군보다는 무장폭도라는 호칭이 적절할 것이다.
2013년 5월 23일 역사학도
http://cafe.daum.net/issue21/3IBb/777
"윤한봉의 위장구호에 낚인 인요한과 조갑제"
http://cafe.daum.net/issue21/3IBb/775
황석영의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및 지난 5월 15일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이주성 박사가 한 증언과 일치하는 증언, 즉 광주사태 때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는 뉴스를 북한에서 들었다는 납북 여배우 최은희의 증언 동영상 보기
http://cafe.daum.net/issue21/3IBb/737
경제풍월 5월호 인터뷰기사
http://www.econotalking.kr/xe/index.php?document_srl=88724&mid=interview_2010
"조갑제 기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
http://cafe.daum.net/issue21/3IBb/774
댓글목록
현산님의 댓글
현산 작성일
숨이 답답하고,,, 기가 찬다고할 밖에 없습니다.
이런 꼴을 당하고 살아온 당사자나 이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발언권조차 얻지 못하신 김대령님이나
얼마나 속이 타고 울화가 치밀었겠습니까? 성질 급한 사람은 제 명을 다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어쩜 이리도 뻔뻔 유들유들한지,,, 도대체 나라를 두고 사기쳐서 어떻게 하자는 건지...
그 숨막히고 가혹한 긴 세월을 견뎌내시며 이런 역사적 대작을 남겨주신 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보든 안 보든 일베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만토스님의 댓글
만토스 작성일시사논객님의 빈틈 없는 사건기록 분석과 판단은 독자들의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시원하게 정리해 줍니다. 조갑제 기자가 자신이 기록한 책으로 인해 5.18사태가 엉뚱하게 해석되는 엄청난 절못을 저질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그가 북한군 개입을 애써 부정하고 민주화 운동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어렴풋이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조갑제는 기자라는 칭호마저 박탈해야 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지, 시사논객님의 공격에 그가 어떤 반론을 제기 할지 기대됩니다.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현산님, 만토스님, 감사합니다. 일베에 옮겨 주세요.
신생님의 댓글
신생 작성일
갑제형아의 정체가 뭘까요.
또라이 라는건 분명해 보입니다.
파랑새님의 댓글
파랑새 작성일
최후의 순간에 보수진영을 파괴하기 위해 짱박아 둔 프락치...
좌파를 까는척 많은 연기를 하면서,,,,우익의 신뢰를 확보....
결정적 순간에 보수우익의 진격을 훼방.......
碧波郞님의 댓글
碧波郞 작성일이로써 조갑제는 가짜보수요 좌익프락치임을 인증했습니다.
알고싶다님의 댓글
알고싶다 작성일
조갑제는 자기의 생각만 정의.
이번 일로 사이비 우파 인증.
대장님의 댓글
대장 작성일멀지않아 조갑재란놈 설땅이 없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