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 : 1981.03.25(수) /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 표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처음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다. 전라도에서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민주정의당)이 야당보다 많은 의원을 배출했다. 이는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 사태와 관련이 없슴을 보여주는 좋은 반증이다. 광주사태 당시 폭동주동자들이 전두환을 찢어죽일놈이라고 선동했지만 일반 주민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거일 : 1985.02.12(화) /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 표는 전두환 정권 중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 결과다. 민정당이 전라도에서 정확하게 50%의 의석을 얻었다. 경북 경남과 같은 비율이다. 오히려 부산과 대구는 민정당이 각각 1/4. 1/3밖에 얻지 못했다. 전라도가 부산대구보다 민정당 지지율이 훨씬 높았다. 이는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결과다.
<선거일 : 1988.04.26(화) /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 표는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노태우 정권때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 결과다. 민정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1987년 11월 12일 정통 야당이었던 민주당(통일민주당)을 탈당, 평민당(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김대중을 대선후보로 추대했다. 추대가 아니라 당시 야당 대선후보의 대세였던 김영삼을 단일후보로 미는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독자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김대중의 논리는 자기가 독자 출마하면 1노3김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되어 경상도표는 노태우와 김영삼이 갈라먹고, 충청도표는 김종필이 잠식하고, 김대중 자신은 호남과 수도권의 호남표를 싹쓸이 하면 필승이라는 논리였다. 이른바 "4자필승론"이다.
선거판에서 지역감정에 불을 지핀것은 이것이 시초이다. 물론 이전에 "우리가 남이가?" 정도의 눈총받을 발언이 있기는 했으나 이처럼 구조적으로 지역감정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예는 없었다.
위 표는 87년 대선 결과 후보별 득표상황이다. 여기서 90%대의 전라도 몰표가 처음 등장한다. 선거공학적으로는 김대중의 논리가 그럴듯해 보였으나 결과는 지역감정만 불 질러 놓고 김대중은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로 밀려난 참패로 끝났다.
김대중의 총득표율은 26.5%였는데 이는 전국에 있는 호남인 인구와 거의 일치한다. 차이래봐야 불과 몇%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도 전술한 바와 같이 김대중 평민당이 호남의석을 싹쓸이 했다. 누가 보아도 지역감정을 일으킨 원흉은 김대중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 동안 지역감정의 원흉은 박정희라느니, 5.18 광주사태는 전두환 때문에 일어났느니 하는 것은 모두가 정치적 음모일 뿐 정치판의 지역감정은 1987년 대선에서부터 생겼으며, 그 원흉은 어디까지나 김대중임은 위 선거결과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김대중은 세상이 어지러워져야 자신에게 정치적 입신의 기회가 온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는 그 스스로 혼란조장을 서슴치 않았다. 박정희 정권을 궁지에 몰기 위해 학생시위를 선동하고, 미국 정계를 돌아다니며 한국원조를 중단해 달라는 로비를 하고 다녔고, 심지어 조총련과 접촉하여 음모를 꾸미는 등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82년 소위 "김대중 각서" 사건이 있다. 5.18 광주사태와 관련 수감중이던 김대중이 신병치료 명분으로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린 사건이다. 이 탄원서에는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스스로 그동안 국가안보와 정치를 어지럽히는 짓을 많이 해 왔다는 간접시인인 셈이다.
이렇듯 "앞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미국으로 떠날때까지도 김대중은 호남인들에게 별 대단한 존재가 되질 못했다. 1985년 김대중은 귀국하여 다시 수감된다. 호남인들은 이 때도 역시 그의 귀국이나 수감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다. 김대중의 이런 중요한 신변변화에도 호남인들이 조용하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당시에는 전라도에서도 김대중을 따르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고, 4.13 호헌조치,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군의 최루탄 피격사망, 등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전두환 정권은 호헌철폐(대통령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헌법개정)를 결정하고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선후보를 통해 소위 "6.29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김대중에게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그는 감옥에서 나왔고, 이 호기를 놓칠세라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의 국민적 열망을 외면하고 민주당 소속 호남출신 정치인들을 탈당시켜 평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독자출마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대통령의 꿈을 지역감정으로 풀어나갈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술한 바와 같이 김대중의 '4자필승론'에 의한 정치판 지역감정의 시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