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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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VERGREEN 작성일13-03-24 16:36 조회3,8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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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6.25사변 직전과 같이 각 분야에서 좌익이 국가의 근본을 교란시키고 있다. 이 혼란한 시기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란 있어서는 안 될 유령같은 반역 좌익단체가 조작극의 달인 북정권과 똑 같은 행태로 역사를 왜곡 편집하여 “백년전쟁”이란 대국민 홍보 영상물을 퍼뜨려 젊은 영혼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죽기 살기로 역사와 업적을 부정하면서 조작까지 하는 정신적 지진아인 이들의 육신은 대한민국에 살지만 마음은 악마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북조선의 임을 향한 충실한 개들이다.
이승만은 1875년 한 말에 태어나 어릴 적 한학을 공부하고 배재학당에서 신 문학을 공부했다. 22세부터 24세까지 어린 나이로 주간신문과 일간신문의 주필을 했던 그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 못하는 정부와 황제의 퇴위를 언급하다 괘씸죄에 걸려 사형수의 신분으로 6년간의 옥살이를 하던 중 민영환의 주선으로 풀려났다.
고종 밀서를 가지고 특사의 자격으로 도미하게 되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길로 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학을 다니며 수업하였다.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역임 한 독립운동가로서 미국생활 40여년의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통인 그는 동서양의 학문을 습득한 인물로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최고 학벌의 엘리트로서 국민들은 이박사라고 불렀다.
1948년 출범한 이승만정부의 전반기는 민족적 대 과도기였고 후반기는 기약이 없는 암울한 시대였다. 식민지 해방에 따르는 정부수립의 혼란과 곧 이어 닥친 절망적인 동족전쟁으로 인한 파괴를 복구하며 국가를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는 시기였었다. 그러나 후반기는 가난한 후진국의 병폐인 사회적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비전 없는 장기집권으로 불만에 쌓인 국민들이 3.15부정선거로 폭발하여 4.19학생데모라는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국민혁명이 일어났으며 민중의 대승리였다.
하지만 자유당을 없애고 내각제를 세운 만족감과 미래에 대해 막연한 희망을 가질 수는 있었으나 민생고의 해결 또한 막연하고 요원했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장면내각 10개월만에 박정희시대가 도래했으므로 그 때 정치인의 입장에선 사회를 개혁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도 하겠으나 이미 장면내각의 국가운영방식은 박정희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에 경제개발계획은 후진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정부의 경제계발계획도1960년 4월15일 국무회의에 의결되었으나 4일 뒤 4.19혁명으로 시행도 못하고 하야했다.
이승만의 경제개발3개년계획을 스틸한 장면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더 많은 원조와 군의 감축, 농업과 노동자위주의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지 진정한 개발개혁과는 거리가 먼 다람쥐 체바퀴 도는 먹거리개발계획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화학 섬유공장 건설등의 공업위주의 전략을 쓴 5.16군사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비교 할 수 없이 진취적이고 스케일이 큰 계획이었으며 똑똑한 군인들이 나라를 환골탈태시킨 역사적인 대 모험이었다. 민족의 복록(福祿)이고 국가적인 대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지금도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하고 있다.
4.19의 주역들은 박정희의 등장으로 민주주의를 도난당했다고 여겼을 것이고 박정희는 만인의 적이 되었다. 국민이 쟁취한 새로운 민주시대에 대한 열망과 무한한 자유가 허무하게 무너지며 군인의 출현으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별 볼일 없는 우리 엽전의 운명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자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위세에 숨을 죽이고 있는 국민에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재건을 독려하며 다가오는 분위기가 참으로 묘했었다.
61년 7월 3일 2대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에 취임한 박정희를 소개하는 뉴욕타임스의 기사 한 구절을 소개하자면 “너무도 적은 자원에 많은 생명들이 매달려 살아야하는 남한의 운명은 지금 44세인 박정희소장에게 달려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발전은 커녕 자급자족으로 호구지책을 할 자원조차 없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박정희를 반대하는 부류들이 즐겨하는 말이 “그 당시는 경제가 저절로 발전하게 되어있었으며 누구라도 18년간 집권하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박정희를 부정하고 싶으면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뇌 없는 인간처럼 지껄이겠나마는 18년이 아니라 180년이 흘러가도 그럴 일은 없다. 박통과 동갑내기인 필리핀의 영웅 마르코스는 국민의 열열한 지지속에 집권하였으나 극도의 부정부패와 축재로 경제를 후퇴시키고 피플파워에 쫓겨 하와이로 망명했다. 부인 이멜다의 사치 또한 얼마나 극심한지 그들이 떠난 궁에 구두가 3000컬레나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구두로 필리핀 정부는 구두박물관을 만들었다. 만약 육영수가 30컬레라도 모아뒀다면 박정희의 성질에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거지나라를 찬란히 바꿔놓으니 그 시절에는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억설을 하는 인간들은 앞 선 조선조의 위정자들만 보아도 모르겠는가? 중국, 일본 개화할 때 조선은 최소한의 세월 격차를 줄여 말해도 50년 동안 뭘 했던가? 우리가 깔보던 일본은 양반의 나라 조선보다도 문맹률이 낮았다. 그들도 1960년대 한국의 군인사회처럼 무사와 군인이 엘리트들이었다. 일찍이 전 백성의 70%가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계몽이 되어 있었으며 서양문물이 밀려 들어와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조선은 백성의 교육과 계몽을 등한시 했다. 하층민의 깨우침은 양반네들의 기득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망국적 유교 윤리관인 삼강오륜은 도덕적 덕목이라지만 몹시 권위적이며 그 내부에는 상하가 분명한 계급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게다가 백성의 살림살이는 넉넉지 못하였으니 공짜로 문맹을 깨우쳐 준다 해도 배가 고파 글 보다는 산에 나무하러 가는 것이 더 우선 했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들은 세도가일 뿐이고 백성은 하인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
경복궁에 불난 것도 대원군 탓하느냐고? 당연하지. 오직 집권욕에 사로잡혀 왜놈과 공모하여 경복궁 건청궁에서 국모인 며느리를 윤간 피살한 패거리와 한패인데 뭐가 잘난 대원군이냐? 훗날에 광화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모멸적인 조선총독부청사(중앙청)가 들어선 것도 창경궁이 동물원이 된 것도 세상 물정 모르고 권력에 영혼을 판 대원군과 명성황후 민비의 탓이고 또한 그들 웃대 세도가들의 탓이리라. 조선조 인물하고만 비교를 해도 박정희가 얼마나 불세출의 진보개혁가인가. 그는 삼강오륜대신에 “국민교육헌장”을 암송케 했다.
단언컨대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장기 집권했었다면 우린 아직도 개발도상국이 국가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들은 선동과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꾼이었지 이승만처럼 약소국가 백성의 한이 있다거나 지지리 가난한 농부의 아들 박정희처럼 가슴에 맺힌 가난을 타파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정치가가 아니었다. 부유히 자랐던 그들은 밀가루 배급받던 나라에서 철 이른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속내는 대통령의 권좌가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바꾸어 대는 당의 이름, 저 사람하고 동지인가 싶으면 이미 결별하고 이 사람의 손을 잡고 동침하였다.
그들의 권모술수는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나도 인생교훈을 얻었다. 정치가야말로 팔색조이며 국민배우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적도 동지도 없는 권모와 술수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좋게 보아 화합과 상생을 보여 준 셈도 된다. 그들의 말 중에서 가장 인정하고픈 말은 스스로 정치 9단이라고 한 말이다. 충분히 인정하고말고. 9단이 되도록 집권을 위해 기나 긴 세월 이리 뭉치고 저리 흩어지면서 결국 대통령자리에 앉은 의지의 한국인들이었다. 대통령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인간승리요 만대에 길이 빛날 가문의 자랑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에겐 아무런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청렴한 이승만은 왜정에 항거하고 공산주의를 이겨 낸 애국자였다. 국제정세에 밝고 배짱있는 이승만도 나이가 많아지니 분별력이 없는 정치를 하였었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전쟁까지 치루다보니 피폐한 국토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12년 대통령 생활이 힘이 들고 지쳤을 것이다. 항일정신과 반공정신과 민주주의 이념에는 투철하지만 민생고의 근본문제인 경제개혁과 발전에는 가닥을 잡지 못했으며 나라가 잘 돌아간다는 환관의 아첨을 국민의 소리로 착각하여 영구집권의 꿈을 꾸다가 86세 고령으로 어리둥절하게 하야를 했다.
그는 정부와 계획한 하와이교민의 요양초청을 단순한 나들이로 생각하고 이화장을 나서면서 “늦어도 한 달 후에 돌아오니 집 잘 봐주게”라며 간단한 짐만 트렁크 몇 개에 담고 외유에 나섰으나 그 길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스스로 망명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불쑥 귀국하겠다고 할 때마다 하와이 교민들은 건강상 요양이 더 필요하다며 만류하였고 홈시크에 빠진 노영웅은 하와이생활 5년여 만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민들의 성금으로 어려운 생활을 한 노 정치인은 집권 후반기에 판단력을 잃어 불명예스러운 하야를 했지만 개인영달을 위해 축재를 하지 않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 않았다는 떳떳함이 항상 의식 속에 잠재되었으리라 본다. 김일성은 신의 자격으로 지구상에서 역대 동서고금 어느 나라 왕보다 가장 호사스런 생활을 누렸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생활 내내 검소하였고 하와이 망명시절에는 죽는 날까지 넉넉지 못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재력가 마르코스의 하와이 망명생활과는 극과 극이었으리라.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애잔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45세에 등장한 젊은 박정희의 시대는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탈바꿈을 하는 대 변혁기였으며 거짓말처럼 성공했다. 그 기적은 우연이 아니고 한 지도자의 탁월한 국가운영과 국민 모두의 노력이었다. 정치적으로 진단한다면 그는 분명히 성장을 빌미로 장기집권을 했기 때문에 야당 정치인들이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옥을 당하면서도 투쟁한 것은 박수를 받아야한다.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다면 올바른 정치인도 아니고 올바른 국가도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나 훗날 문민정부들이 앞 다투어 김일성을 숭배하는 반 대한민국 지하세력들과 심지어 살인행위자마저도 민주투사로 감투를 씌운 행위는 어불성설로서 개에게 금목걸이를 달아 준 격이며 피아의 구분도 없이 선악의 경계선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 문민정치가 그 누구도 군사정부를 폄하 할 자격이 없으며 군인보다 혜안이 없는 인물들이라 단언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의 독재엔 인정과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산업과 민주주의가 함께 발전 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 세계에 유래 없는 본보기국가가 된 것이다.
그동안 대남적화공작과 반정부 종북좌익이 일일이 정부의 발목을 잡고 국가를 위기에 빠뜨려도 민주주의를 고수하며 쉽사리 적화가 되지 않은 것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화의 대성공으로 국민에게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풍요를 선물한 박정희는 외로운 말년을 달래는 술자리에서 총에 맞아 고통의 숨을 몰아쉬면서도 잦아드는 목소리로 “나는 괜찮아”하며 국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떠나갔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3천 궁녀가 있는 아방궁이라도 기꺼이 만들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양 부모 다 없이 출가도 하지 않은 자식들을 가슴 쓰리며 남기고 떠나는 발길이 천근만근 무거웠을 것이다. 지금 쯤 열렬히 전 국민적 추앙을 받아야 할 영웅이 떠난 지 3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얼굴은 천 원짜리 지폐에도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창궐한 친북,종북좌파들에 의해 나라는 붉게 물든 채 좌로 기울어지고 있고 북괴는 연일 도발을 호언하고 있는 불안한 시국에 귀때기 새파란 놈들이 구국의 영웅을 인권을 유린한 친일파 독재자 다카키 마사오라고 마녀 몰이를 하며 그의 무덤에 침을 뱉는 이 슬픈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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