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시간) 3위원회에는 북한 인권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도록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권고하는 유럽연합(EU)의 결의안과 이런 권고를 삭제한 쿠바의 수정안 등 두 개가 상정됐다. 당초 정부가 우려한 시나리오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지역의 비동맹국가들이 EU 결의안에 대거 반대표를 던지는 상황이었다. 냉전시대 때 미국과 소련 간 대립 구도에서 살길을 찾기 위해 신생 독립국가들이 주도해 만든 비동맹운동(NAM)은 어떤 강대국 편에도 서지 않으며, 내정 간섭을 철저히 배격한다고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북한도 NAM 소속이다.
쿠바가 “EU 결의안은 특정 국가를 압박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북한을 싸고도는 수정안을 낸 건 이런 원칙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북한도 표결을 앞두고 비동맹국가들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펼쳤다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19일 “새벽에 3위원회 투표를 지켜보며 두 번 놀랐다”고 했다. “쿠바 수정안에 대한 투표가 먼저 이뤄졌는데, 공동제안국도 없이 단독으로 올린 수정안에 찬성표가 40표나 나와 순간 긴장했다”고 했다. 40개국 중 중국·러시아·키르기스스탄·남수단을 제외한 36개국이 비동맹국가였다.
하지만 비동맹국가들의 ‘의리’는 여기까지였다. 이 당국자는 “곧이어 진행된 EU 결의안 투표에서 반대가 절반도 안 돼 또 한 번 놀랐다”며 “쿠바 안에 찬성한 국가들이 북한에 동조, 인권상황에 눈감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쿠바 안에 찬성했던 국가들 중 19개국은 곧이어 진행된 EU 결의안 투표에서 기권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비동맹국가의 맹주 격인 인도가 기권한 것이다. 김일성 정권 때부터 북한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온 인도네시아도 기권표로 이탈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EU 결의안 투표에 참여한 비동맹국 108개국 가운데 찬성이나 기권으로 북한에 등을 돌린 표가 91표나 됐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가 소식통은 “서방이 주도하는 프레임에 뭉쳐 대항하던 비동맹국가들이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도 같은 입장을 취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며 “인도네시아의 경우 북한이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르주키 다루스만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의 모국으로서 EU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질 순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총회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은 없다. 중국과 러시아가 거부권 행사를 공언하고 있어 ICC 회부가 이뤄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가 북한 인권 문제를 논의할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북한에 큰 압박이 될 수 있다. 오준 유엔 주재 대표부 대사는 “이번 결의는 안보리에 북한 인권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는 효과를 갖게 된다” 고 말했다.
북한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표결 전 “결의안이 통과되면 예상하지 못한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최명남 외무성 부국장은 결의안이 채택되자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길을 가겠다”며 대화 단절을 시사했다. 최 부국장은 “미국과 그 추종세력의 반공화국 인권 소동은 우리로 하여금 핵시험(핵실험)을 더는 자제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도 했다. 제4차 핵실험을 강행할 수 있다는 위협이다. 한반도 정세가 냉각될 수 있다. 중국의 입장도 난처하게 됐다. 중국은 외교채널을 통해 EU에 결의안 수위를 낮춰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정훈 외교부 인권대사는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G2 국가를 지향하겠다는 중국이 인권 문제에서 북한을 두둔한 건은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서울=유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