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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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디언 작성일14-08-19 11:12 조회1,7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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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7.5 한산도海戰. 헐버트(hul bevt. he)는 이 해전을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다” 評했다.
살라미스는 그리스만 서쪽 섬으로 BC.480년 그리스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극적으로 격파한 전설적 해전(海戰).
세계의 많은 해군 사관학교서 세계4대 해전으로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들라 팔가 해전. 한산도 해전을 꼽았다.
하루 뒤 이순신수군은 안골포해전. 부산포 해전(海戰)서 승리했다.
1596년 10.12~30 원균 참소로 체포돼 97년 1.1일~ 3.30일까지 원균모함에 하옥, 4월 사 그 동안 이순신 처리 문제로 어전회의 7차나 열렸다.
7.21일 칠 천량해전서 원균이 대패ㅡ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군 통제사로 재임명 되다.
1597.9월16일 명량해전(海戰).
9월15일 조수를 타고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진을 옮겨 전라우수사 김억 추에 수중 철색을 치게 했다. 울돌목은 다른 말로 명량이다.
우수영 쪽 해안과 진도해안 양쪽서. 남해안 전체 물살이 가장 센(유속10노트)좁은(폭300m)해협에 비스듬히 수중철색을 걸었다. 왜적 배가 서로 부딪쳐 깨지도록 조류 이용전략을 세웠다. 좁고 빠른 유속의 흐름 밑에 쇠줄(수중 막 개장치)을 설치. 왜선이 걸려 서로 부딪쳐 침몰했다.
풀어놓은 염탐 선을 통해 왜선이 공격해온단 정보를 입수. 대 해전이 벌어질 전날 밤, 수군장병을 모아놓고 이순신은“【兵法에 이르길 전쟁에 임해 살고자하면 죽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 반드시 산다.”】는 훈시 군령을 세워 내일의 전투서 유감없이 싸울 것을 명했다.
왜군133척이 명량앞 바다 울돌목에 쳐들어오자 이순신은 조선수군13척을 이끌고 해전에 임했다.
명량해협의 지형과 조류를 사전에 연구해 왜 함선을 향해 죽을 각오로 돌격하니 조선수군 배가 뒤따르질 않았다.
왜 함대의 군세에 비해 이순신 수군병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수군들은 두려워 기회만 생기면 도망치려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의 거제현령 안위를 이순신은 초요기(군령 전하는 깃발)로 불러 배위에 서서 소리 높여 거제현령 안위에게“
【네가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 여기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고 살 것 같으냐!”질타】했다. 뒤따라 도착한 중 군장 김 응한 에게도 그리했다.
거제 현령안위와 중 군장 김 응 한이 죽을 각오로 왜선을 향해 돌격하자 왜 사령선과 적선 두 척서 왜병이 개미 떼처럼 두 배에 달라붙었다.
이순신의 판옥선이 다가가 대포와 화살을 쏘며 왜병을 사살하고 그들을 구했다. 곧이어 녹도만호 송여립 과 평산도 대장 정 응두가 달려와 전선에 힘을 합치니 조선수군이 사기백배, 전력(全力)을 다해 싸웠다.
왜장 마다시가 이순신의 화살을 맞고 바다에 빠졌다. 갈고리로 걸어 올려 목베 돛대에 메 달자 왜병 사기가 저하됐다. 왜선은 수없이 파괴되고 적병은 물에 빠져죽어 패색(敗色)이 짙자 나머지 왜선은 도망쳤다.
명량대첩은 13척 전선으로 왜함332척을 쳐부순 세계해전사상 유래 없이 작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쳐부순 해전 사다.
1598년 무술년(11.18일~19일)노량해전,
남해 노량 앞바다. 겨울 북서풍 차가운 날씨에 倭船550척과 朝. 明200척 연합 함선이 마지막 도주하는 왜적을 섬멸하려 해전을 벌렸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은 明나라 장군 진 린과 서로 돕고 도우면서 왜선격파. 倭 艦 ⅔를 노량 해협에 수장했다.
이순신은 왜적과 관음포 激戰중에 손수 북을 치며 수군을 독려하다 날아오는 총알에 겨드랑에 맞고 쓸어졌다.
장군은 유언으로“【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임종을 지켰다. 이순신이란 조선의 별은 관음포서 떨어졌다. 그러나 공의 구국충정의 혼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후기】 천하는 임자가 없고 왕후장상 씨가 따로 없어 대권을 차지하는 데는 수단방법이 있을 수 없으나, 일단 권좌에 앉으면 선정 베푸는 것을 目的해야 한다. 그래야 지존이다.
조선 초기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내는 가운데 죽는 태종은 숨을 거두면서“【어떻게 하던지 죽어 비를 내리겠다.】” 말하고 죽었다. 그 후 태종이 죽은 날엔 어김없이 비가 온다 해 태우라 했다.
위대한 지도者는 국가위상 정립을 목적하나 얼간이 반역도는 일신 영화만을 위해 움직이다 국가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서 조선을 구한 구국의 사람들, 서산대사. 사명당. 정문부. 권율. 김천일. 조헌. 김덕룡. 김시민. 송 상헌. 곽재우
2010년 .4.28 . 충무공 탄일 아침 곽 정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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