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폭동 600명 사망자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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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공청년투사 작성일12-08-01 11:10 조회4,8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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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씨가 5.18 당시 이런 말을 했죠
내가 광주항쟁 기간 시민군으로부터 600명의 사망자 명단을 봤다.
그것을 카피(복사)해서 가지고 나오지 못한 점이 지금도 후회스럽고 한스럽다.
그것이 (전남도청)진압 전 숫자였다. 현재 공식 사망자수는 200명 안쪽 아닌가.”
대해 물어보니 Daniel kim 님께서 답변을 해주시더군요 !!!
Daniel Kim
인요한은 그 당시 의사가 아니라 전라도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전라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라도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전라도 사투리가 사실상 모국어이었던 전라도 토백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운동권이 기독교계에 침투해 있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전부 운동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5월 26일 오후 2시경에 윤상원이 외신기자 회견을 하였을 때 통역을 하였습니다.
김영택 기자가 본 대로 윤상원이 외신기자 회견을 하였을 당시에는 ...
김영택 기자가 본 대로 윤상원이 외신기자 회견을 하였을 당시에는 ...
무장시민군 수가 600 명이었습니다. 3시에 26일의 두번째 궐기대회가 끝나고 두시간 동안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그 두 시간의 행진 기간 동안에 시민들도 시민군도 계속 행렬을 이탈하였습니다. 그래서 5시 경에는 시민군 수가 삼분의 일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김영택 기자의 5.18 책도 황석영의 5.18 책도 그 사실을 기록합니다. 탈북자들 역시 26일 북한군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전남도청)진압 때 수백 명이 사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압 후 연행된 시민군 숫자와 일치합니다.
시민군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사건은 5월 21일 오전 10시부터 수백 대의 시민군 차량이 38개 무기고 무기탈취하러 가고 오던 중 낸 대형발생사고들 때문이었습니다.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 및 시민군 무기탈취 특공대 교통사고 희생자들이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22일부터 시민군은 각 병원의 시체들을 전부 도청으로 운구해 왔는데, 그 중에는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시신들도 있었습니다. 시위선동용으로 각 병원의 시신들을 운구해 왔는데도 그 관 수가 수십 개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600 명의 사망자 명단이 있을 수 있는가요? 600 명의 사망자 명단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사망자 명단은 광주사태가 끝난 후에 작성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망자 명단은커녕 600명의 사망자 확인조차 없었습니다. 사망 확인은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인데, 광주의 의사들이 600 명 사망 확인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인요한은 얼굴이 벌개져서 도망갈 것입니다
즉 결론은 말이죠 인요한씨가 거짓말 한거죠 ;;
김영택 기자의 5.18 책도 황석영의 5.18 책도 그 사실을 기록합니다. 탈북자들 역시 26일 북한군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전남도청)진압 때 수백 명이 사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압 후 연행된 시민군 숫자와 일치합니다.
시민군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사건은 5월 21일 오전 10시부터 수백 대의 시민군 차량이 38개 무기고 무기탈취하러 가고 오던 중 낸 대형발생사고들 때문이었습니다.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 및 시민군 무기탈취 특공대 교통사고 희생자들이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22일부터 시민군은 각 병원의 시체들을 전부 도청으로 운구해 왔는데, 그 중에는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시신들도 있었습니다. 시위선동용으로 각 병원의 시신들을 운구해 왔는데도 그 관 수가 수십 개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600 명의 사망자 명단이 있을 수 있는가요? 600 명의 사망자 명단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사망자 명단은 광주사태가 끝난 후에 작성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망자 명단은커녕 600명의 사망자 확인조차 없었습니다. 사망 확인은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인데, 광주의 의사들이 600 명 사망 확인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인요한은 얼굴이 벌개져서 도망갈 것입니다
즉 결론은 말이죠 인요한씨가 거짓말 한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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