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과 "유신이 대한민국 빛냈다!
최근 빨갱이 야당 사람들은 물론 언론, 청와대, 새누리당에 몸담은 사람들까지 5.16과 유신과 박근혜를 하나로 묶어 맹공격을 가하고 있다. 7월 16일 박근혜가 ‘5.16은 최선의 선택’이었고, ‘유신은 찬반이 있는 만큼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보수를 대표한다는 조선일보까지도 7월 18일 “朴후보, 5·16과 維新에 대한 평가는 달라야 한다”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비판했다.
함량미달의 조선일보 사설
“4·19와 5·16은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두 물줄기가 시작된 기점이다. . . 5·16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10년 장기독재를 무너뜨린 후 민의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전복시켰다는 점에선 '반(反)민주'라는 평가를 면할 순 없다. 그러나 5·16은 빈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가 성립할 경제적 토대를 만든 것이 사실이다. 이미 국민 의식 속에선 4·19의 민주화와 5·16의 산업화는 상호 배격하는 갈등 관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오늘을 짜낸 날줄과 씨줄로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 후보의 5·16 인식은 국민 개개인의 입장과 소신 차이에 의한 찬반이 따를 수는 있을지언정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박 후보의 유신에 대한 생각에 공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 . . 10월 유신을 감싸는 사람들은 당시 월남 패망에 뒤따른 안보적 공황 사태와 경제구조 고도화를 위한 중화학 공업육성 필요성을 들며 1인 독재의 효율적 통치가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질식 상태로 몰고가 부마 민주항쟁을 불러오고 이어 10·26을 거쳐 5·17에 이른 한국 민주주의의 고난 시대인 유신통치를 그런 이유로 긍정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박 후보가 5·16과 유신체제를 같은 선상에 놓고 같은 평가를 한다면 국민은 박 후보의 5·16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대한민국 현대사 전반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박 후보는 5·16 평가와 유신 평가를 달리해야 하고, 그래야 5·16 평가도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5.16은 산업화를 이룩했고, 4.19는 이승만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기 때문에 역사의 날줄과 씨줄처럼 동등한 것이므로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만 유신은 부마사태, 10.26사태 그리고 급기야는 ‘김대중이 이끄는 26명의 내란공모자들을 한 밤중에 체포한 이른바 5.17사태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역사에서 지워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설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는 김대중 쪽으로 기운 사람이고,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인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당대 역사의 현실, 국가중흥을 위한 리더십에 대한 공부가 전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본격적인 산업화가 1972년부터 이루어졌고, 한강의 기적이 1972년부터 이루어졌고, 오일쇼크로 인해 전 세계의 경제가 내리막길을 내려 달리고 있을 때 오직 한국만이 연평균 13%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율을 보였기 때문에 세계가 놀라고 칭송한 ‘한강의 기적’은 유신이후 8년 동안에 탄생했다.
5.17은 김대중, 문익환 등 26명의 반란 모의자 체포한 정당한 사건
그리고 1980년 5월 17일에 김대중 등 반역모의자들을 잡아 놓은 것은 이 나라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록돼야 할 사건이지 조선일보 사설에서처럼 부정돼야 할 사건이 아니다. 필자는 18만쪽에 달하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수사기록’을 모두 조사한 후에 이런 말을 하지만 조선일보 사설을 쓴 사람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관장한 정권과 빌붙고 여론에 편승했던 ‘인민군 판검사’들의 말을 진실로 알고 사는 장삼이사에 불과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조선일보 사설에 역사를 통달한 사람인 것처럼 글을 쓰니 이게 한심한 일인 것이다.
1972년에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과 무지몽매한 김영삼이 정권을 잡았다면?
갈 길은 먼데, 째비도 안 되는 것들이 국민을 선동하고 빨갱이 세력과 야합하고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니 어찌 하겠는가? 이런 거머리에게는 당분간이라도 담뱃불로 지져야 국가를 중흥시키지 않겠는가? 만일 유신을 선포해놓고 박정희가 ‘한강의기적’을 이룩하지 않고, 다른 대통령들처럼 돈이나 먹었다면 조선일보의 사설대로 유신은 비난받아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유신 때에도 99% 이상의 국민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오직 김대중, 김영삼, 그들에 정치인생을 거는 시정잡배 그리고 빨갱이 집단들만이 탄압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국민은 그런 탄압을 반겼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면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냈다. 1963년이었다. 쥐를 잡아 코리안 밍크로 수출했고, 머리를 잘라 가발을 만들어 수출했다. 이어서 기술고등학교들을 많이 만들어 기능공들을 양성했다. 기능공들이 서독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1. 2, 3등을 석권했다. 국제사회에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로 각인됐다. 특사들을 세계에 내보내 한국에 질 좋고 온순한 기능공이 많으니 한국에 와서 공장을 새우라 권했다. 외국자본이 한국에 물밀듯 들어와 공장을 세웠다. 일자리가 폭발했다. 그 이전의 실업율은 얼마였던가? 30%, 살인적인 실업이었다.
1965년에는 두 개의 큰 마일스톤을 놓았다. 하나는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8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과 포항제철 건설에 필요한 모든 기술과 자본을 들여왔고, 월남파병을 통해 월남특수-중동특수를 창조하여 경제를 엘리베이터 식으로 수직상승 시켰다. 이 때 김대중과 김영삼은 입에 거품 물고 박정희가 나라와 젊은 피를 팔아먹는다며 발광적 선동질을 했다.
1966년에는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두뇌들을 모두 유치하여 KIST를 설립하고,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본에서 받아낸 8억 달러 중 극히 일부가 과학자들을 유치하는데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박정희는 홍릉으로 찾아와 과학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격려를 아끼지않았다. 박정희를 친구로 둔 많은 KIST 박사들이 과로를 하다가 순직한 경우가 많았다.
과학입국 산업입국의 토대
1966년에는 포항제철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포항제철은 1973년 7월 3일부터 연간 103만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과기처(과학기술처)를 설치하여 대한민국의 진로를 과학입국의 길로 안내케 했다. 얼마나 박정희가 과학을 중요시했던지 국무회의를 하다가도 과기처 장관이나 KIST 소장이 대통령에 전화를 하면 대통령이 뛰어나와 전화를 받아주었다.
1968년 2월1일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하여 1970년에 준공시켰다. 1970년에는 3,000명 규모의 ADD(국방과학연구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청와대에 박격포, M16소총, 군용전화기를 마련해 놓고 국방과학연구소장(심흥택)을 불러 “임자, 이와 똑같은 장비를 생산하시오”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행됐다. 1971년에는 석사와 박사를 양성하기 위한 한국과학원(오늘의 KAIST)을 설치했다.
그리고 1972년 8.3조치를 통해 당시 도산 직전으로 몰렸던 대기업들을 구해주었다. 대기업이 쓰고 있던 사채를 동결시킨 것이다. 오늘의 시장경제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조치였다만 당시에는 모두가 박수를 쳤다. 원체 국민들이 못 살다 보니 은행에는 저축된 돈이 없었고 그래서 기업들은 암시장의 사채들을 썼다. 날이 갈수록 기업의 빚이 쌓였다. 박정희는 이 사채가 고관대작들이 부정해서 모은 돈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사채를 일체 갚지 말라 명령한 것이다.
화려무쌍한 유신
그리고 다른 한편 박정희는 지하자금을 지상으로 끌어내기 위해 지하자금으로 기업을 창업하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이로 인해 지하자금이 지상으로 올라와 오늘의 재벌 계열사들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때 김영삼, 김대중 같이 배운 게 없고 사색이 없는 정치 모리배, 뚝건달들이 사사건건 발을 걸며 국민을 선동했다. 미련한 국민들은 이들의 말에 솔깃하여 경제건설로 달려가는 진로를 차단하려 했다.
갈 길은 바쁜데 국민들에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는 박정희는 거머리 같고 진득이 같은 이런 저질 건달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입을 막았다. 빨리 뛰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10월 17일에 통과된 유신헌법이었다. 이때부터 ‘한강의 기적’이 태동했던 것이다.
1972년부터 남한은 북한의 경제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경제성장은 연평균 13%의 가파른 가도를 달렸다. 이 때 세계경제는 1973년의 오일쇼크를 맞아 침체하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8년간 박정희는 율곡사업계획(전투력증강사업)을 세웠다. GNP의 6%를 국방예산으로 투입했다. 1971년 계획당시의 경제성장 속도로 계산해 보니, 1972-79, 8년 동안의 예측된 율곡예산은 15억 달러였다. 그런데 1972년부터는 박정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GNP가 마구 성장했다. 그래서 15억으로 예상했던 율곡예산은 무려 4배나 늘어난 60억 달러가 됐다.
일자리 창출의 귀재
박정희는 주로 미국에서 사양화된 군용제품의 기술자료(TDP)를 배로 한없이 들여와 공단을 세우고, 기업을 입주시켜 한두 가지 제품씩 기업에 배급해 주었다. 외국말로 된 설계도면과 설명서를 읽을 사람이 기업에는 없었다. KIST 과학자들와 국방연구소 과학자들이 기업에 나가, 적당히 하려는 기업인들에 시쳇말로 조인트를 까면서 강도와 정밀도를 강요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생산기술은 이런 훈련을 통해 이룩된 것이다. 그리고 실업율은 사실상 0%에 가까웠다.
실업으로 인해 헐벗고 못 먹은 국민들은 월급을 받으면서 행복해 했고, 기업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들이 시장에 나오자 말자 금방 흡수해 갔다. 눈부신 경제성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세계가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정신혁명, 의식혁명의 메카 새마을 운동’은 또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 유신시대에 급성장했던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을 쓴 사람이 아는 것은 오직 ‘민주화’ 하나뿐이다.
대전의 국방과학연구소에는 박대통령이 며칠 씩 묶으면서 유도탄 개발을 격려했던 작은 집이 있었다. 이름 하여 ‘영빈관’이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서거한 다음에는 그 누구도 이 집을 찾지 않았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은 과학을 모르는 건달들이 했다.
세계 경제사를 다시 쓴 유신의 기적
유신시대 8년간 세계경제가 침체의 길을 내려 달리고 있는 때 오직 한국경제만 연평균 13%의 눈부신 성장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 경영학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필자는 경제학 교수들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세계 경제역사상 유례없던 일이라고 이야기 할 때 어깨가 으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조선일보는 5.16이 ’산업화의 공신‘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유신’은 “세계에 경제역사를 다시 쓴 위대한 기적의 공신‘이라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지금 공부도 일천하고 가방끈들도 일천한 온갖 잡놈들이 자판기 정도 두드릴 줄 안다며 무식한 주장들을 내 쏟고 있다. 박근혜는 더욱 당당하게 5.16과 유신을 방어해주기 바란다. 그럴수록 박근혜의 인기는 상승할 것이다.
2012.7.19.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
대학생과의 대화, "維新으로 선진화와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
대학생의 질문: 朴 대통령이 1972년 10월17일 소위 유신조치를 통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다음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은 제2의 쿠데타로서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이 아닌가? 이 기간에 야당과 언론과 노조의 활동이 탄압을 받았다.
필자의 답변: 유신조치는 불법적으로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朴 대통령의 두 번째 쿠데타였다. 그가 1979년 10월26일 피살될 때까지 정치적 자유와 언론 자유가 제약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헌법적이고 정치적 측면에서 평가하면 부정적일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헌법적 평가를 포함하여 國政(국정)에 대해서 종합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므로 7년의 유신기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입체적으로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기간 중 3차 5개년 계획(1972~1976년)이 추진되었다. 이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1%였다. 1977년은 10.3%, 78년은 11.6%, 79년은 6.4%였다. 이 7년간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맞아 경제에 큰 타격을 받고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나라들도 많았다. 朴 대통령은 야당과 언론의 견제를 덜 받는 상황을 만들어 國力(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다. 유신기간은 중화학공업 건설 시기와 일치한다.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오일쇼크 기간 중에 추진했고,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이로써 한국은 동남아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한때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들을 멀리 따돌리고 개발도상국의 선두에 나섰다. 유신기간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전자, 조선, 종합제철, 석유화학, 자동차, 기계공업은 오늘의 한국을 세계 10大 경제대국으로 만든 기반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력 건설도 성공하였다. 한국인들이 장기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한국이 一流국가를 꿈 꿀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유신체제이다.
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연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 데 반해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한국 다음이 칠레로서 11.8%였다. 칠레에서도 이 기간 중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로 등장하여 박정희식 모델을 참고하여 이 나라를 개혁하고 있었다. 오일쇼크 같은 큰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개발도상국에선 강력한 지도력이 요긴하게 쓰인다. 세 번째 임금 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당시 국민당의 계엄령 통치가 계속되던 대만으로서 11.5%였다. 같은 독재라도 사회주의식 독재는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하였다. 이 기간 중국의 연평균 임금 상승률은 1.3%에 불과했다.
維新(유신)기간에 한국이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를 보여 계층간 소득격차가 커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다르다. 소득 하위계층 20%에 대한 상위계층 20%의 소득 비율을 보아도 한국, 대만, 일본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평등한 나라로 꼽혔다. 유신기간 중 한국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소득격차도 낮은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77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의료보험은 세계적 성공사례이다. 朴 대통령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없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朴 대통령은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확신하고 민주주의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킨 뒤 경제발전에 國力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이뤄진 경제의 토대와 안보의 울타리가 1980년대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견디게 했던 것이다. 역사는 박정희를 한국 민주주의의 2大 건설자로 평가할 것이다. 또 한 분은 물론 이승만 建國(건국) 대통령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