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는 했지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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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케 작성일12-05-17 06:12 조회5,8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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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했지만
앙케 전투는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전투였다.
월남 전사에서 단일 전투로는 최대로 큰 전투였다.
앙케 패스 638고지를 약 1m나 깎여나갈 정도로 수십만 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
엄청난 전비와 희생을 치르고 승리는 했다.
하지만,
“앙케 전투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주 월 한국군은 본국으로의 철수 준비관계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638고지에 매복 작전을 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월맹군 제3사단 12연대 450특공대대에게 무단으로 점령당했다.
적들에게 무단으로 점령당한 638고지를 재탈환해 온 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월맹군으로부터 차단되었던 19번 도로를 원상회복시킨 것이 전과일 뿐이다.
다른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주 월 한국군은 보병 16개 중대와 수도 사단 수색중대, 공병중대, 장갑중대, 기갑연대 수색중대, 지원중대, 제1연대 수색중대, 제61 포병대대, 제1중대 소도산 전술기지에 있는 각종 박격포와 106mm무반동총, 월남군 175mm 직사포, 지원 나온 백마부대 장병들, 약 2천6백여 명의 장병을 투입되었다.
또, 미군 팬텀기와 무장헬기를 지원받아 수십만 톤 폭탄을 투하하였다.
“경계를 태만하게 함으로써 안이하게 대처하였다!”
때문에,
아군은 너무나 비싼 전비와 희생의 대가를 지불한 전투였다.
아군은 많은 전우들이 꽃다운 젊은 청춘을 피어 보지도 못하고 낯도 설고 물도 설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전사하였다.
또, 수백 명의 전우들이 전상을 당하였다.
근 보름동안 엄청난 피해와 희생 끝에 앙케 패스 638고지를 천신만고 끝에 탈환하였다.
동시에, 19번 도로를 개통시켰다.
앙케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앙케 전투 진실을 왜곡 하였다!”
앙케 전투 주역이 수색중대에서 제4중대로 뒤바뀐 것에 이성을 잃었다.
M-16소총을 난사하였다.
극도로 흥분하고 분개하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전우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앙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들 허탈한 심정으로 맥을 놓고 앉아있었다.
제3분대장 김 종일 하사가 울분을 삭이지 못해 격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이 세 호 주 월 사령관과 정 득만 맹호 사단장을 비롯하여 VIP 일행들이 앙케 전투에서 최대격전지로서, 치열하고 처절했던 638고지 전쟁터를 틀림없이 방문하러 올 것이다.”
그는 VIP 일행들이 여기 638고지에 방문하는 날,
앙케 전투의 주역은 적과 교전 한번 치르지 않고 무혈점령한 제4중대가 아니고, 무려 14일 동안 엄청난 피해와 희생으로 난공불락과 같은 638고지를 두 번씩이나 공격하여 91명의 적을 사살하고 인해전술로 638고지 80%를 제일 먼저 점령한 수색중대야말로 명실상부한 앙케 전투의 주역이라고 직접 보고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 월 사령관을 비롯한 맹호사단장, 기갑연대장, 각급 참모들, 그 외 VIP 일행들과 내외신 기자들은 앙케 전투 최대의 격전지로서 치열하고 처절했던 638고지 전쟁터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비교적 안전한 제1중대 소도산 전술기지까지만 방문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전투현장 지휘관로부터 위험한 지역이라는 보고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앙케 전투에서 최대의 격전지로서 ‘죽음의 고지’ 로 악명 높았던 앙케 패스 638고지에 높은 분들은 한 명도 방문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 외신 기자들조차도 한 명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그토록 혈투를 벌였던 현장은 외면한 채, 형식상의 보고에만 의존한 주마간산 격 확인태도에 수색중대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들은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거의 보름동안에 걸쳐 끈질기고 완강하게 638고지를 사수하던 월맹군들을 물리쳤다.
그 탈환한 638고지는 귀하신 분들이 방문한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또, 온 천지에 널 부러져 방치되어 있는 전사한 아군 영현들을 둘러보는 것도 여간 곤욕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이곳은 안전한 곳은 못 되기도 하였다.
고지 주변에는 터지지 않은 박격포 불발탄과 수류탄, 미군들이 주둔해 있을 때 공중에서 비행기로 뿌렸다는 M-14 대인(발목)지뢰들이 곳곳에 묻혀있었다.
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서,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히 현장을 답사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지대였다.
이 같은 위험물을 제거하던 사단공병중대원 5명이 M-14 대인지뢰에 발목이 절단되었다는 끔찍한 소식이 들여왔다.
또, 포탄 불발탄을 처리하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또 한 명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여러 명이 전상을 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여왔다.
도대체!
이 638고지가 무엇이기에,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아까운 목숨을 다 바쳤다.
사력을 다 하였다.
꽃다운 젊은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전사하였다.
또 전상을 당하였다.
이 전우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숙연해지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려왔다.
같은 시대, 같은 전장에서 함께 전투를 하였다.
먼저 간 전우들과 전상을 당한 전우들에게 죄송하였다.
불가사의하게 기적처럼 살아남은 우리들은 그저 한 없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날씨까지도 세계평화와 자유의 십자군으로서 용감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전우들이 애석하다는 듯이 잔뜩 흐린 날씨에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까지도 슬퍼서 울고 있는 같았다.
산천도 울고, 살아남은 전우들도 울었다.
“그 분위기는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적 월맹군들은 난공불락과 같은 이 고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철통 같이 방어 작전을 하였다.
주 월 한국군은 그 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인해전술로 수십 차례 공격하였다.
밀고 밀리는 피아간의 공방전을 벌렸다.
피아간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 처럼 처절하고 치열했던 앙케 전투는, 6 25전쟁 이후 대한민국 국군 전사에서 처음 있는 전투였다.
“6. 25 전쟁 때, 백마고지 전투와 흡사하였다!”
생사를 초월하는 숱한 애환을 안고 꽃다운 젊은 청춘을 바쳤다.
앙케 전투에서 사라져간 전우들의 영령 앞에 애석한 심정으로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
전상을 입은 채,
아직까지도 고통스럽고 어렵게 살아가며 고엽제 후유증과 전쟁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전우들에게 조속한 쾌유를 빌어본다.
전생에 무슨 철천지원수의 악연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그토록 서로 간에 총구를 마주 겨누며 죽고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문에,
그 당시 서로 싸웠던 이국 영령들에게도 늦게나마 함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다 같이 시대의 잘못으로 돌리고, 상호간에 맺혔던 악연들이 모두 전쟁의 포화와 함께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지는 그 날, 인류의 평화가 깃드는 축복의 날이 오기를 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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