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케 전투의 의문점[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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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케 작성일12-05-18 04:51 조회9,862회 댓글1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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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케 전투의 대한 의문점[종편]
안녕하세요?
먼저 이 귀중한 자리에 초청해 주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오 홍 국 연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맹호 기갑연대 수색중대원으로 월남 전사에서 최대격전지 앙케 전투를 직접 체험한 앙케 의 눈물 저자 권태준입니다.
“앙케 전투의 의문점에 대하여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 번째 의문점입니다.
앙케 전투는 아군의 정보부재와 경계태만으로 앙케 패스 638고지를 월맹정규군 제3사단 12연대가 무단으로 점령 하였습니다.
아군 전술기지보다 약 38m 더 높은 638고지를 경계하기 위해 아군이 구축해 놓은 벙커를 중심으로 하여 적들은 참호와 거미줄 같은 교통호를 구축하였습니다.
적들은 천혜의 요새와 같은 벙커와 참호 속에서 철통같이 방어 작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군은 경계태만으로 적들에게 무단으로 점령당한 638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약 15일 동안 막대한 전비와 엄청난 피해와 희생으로 638고지를 두 번씩이나 공격하여 천신만고 끝에, 차단된 19번 도로 개통과 동시에 638고지를 탈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앙케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습니다.
“군 전략상!”
1개 연대가 고지를 방어하면 1개 사단이 공격을 해야 된다는 것이 군 교범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아군은 군 교범도 무시하고 소규모 특공대작전으로 시작하여 4개 중대로 하여금 축차적으로 638고지를 공격하다가 엄청난 희생과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아래 도표에 나와 있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된 “파월 한국군전사 제10권(1-73)”에 나와 있는 앙케 패스 전투에서 한국군이 올린 전과와 아군 피해 현황을 보면,
아군 전사자는 75명인데 비해, 적 사살은 705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고지를 방어하는 쪽이 고지를 공격하는 쪽보다 약 10배 이상 전사자가 많다는 것은, 전투 현장에 있었던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 같은 전사기록은 군 전략과 군 교범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두 코 전투와 청룡 짜 빈 동 전투는 고지를 방어하는 아군전사자보다 고지를 공격했던 적들의 사망자가 약 10배 이상 많았다고 전사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과연, 앙케 전투에서 공격했던 아군전사자보다 천혜의 요새와 같은 벙커와 참호 속에서 방어를 했던 적 사살이 10배 이상 많았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통제된 국내 언론들과는 달리, 외국 언론들은 주 월 한국군이 차단된 19번 도로 개통과 동시에 638고지를 탈환하여 승리는 했다고 인정 하였습니다.
하지만,
“월맹군보다 희생과 피해는 주 월 한국군이 훨씬 많았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 음 리 파월전시관에 새겨져 있는 기갑연대 제1중대소속 황 진순 일병의 앙케 전투 수기에는 193명의 시신을 후송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앙케 전투 아군전사자 전체가 아니라 제1중대에서만 후송 보낸 숫자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한 전투에서 군사편찬연구소 전사자기록과 파월전시관에 새겨져 있는 전사자기록이 이렇게 큰 편차가 날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두 번째 의문점입니다.
맹호 기갑연대 수색중대는 1972년 4월12일 앙케 고개 개활지에 랜딩 하여 엄청난 피해와 희생으로 앙케 패스 638고지를 두 번씩이나 공격하여 4월22일 밤에 인해전술 작전으로 638고지 약 80%를 먼저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참호와 교통호를 구축하고 적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1972년 4월23일 투입되어 4월24일 07시10분경 638고지 뒤쪽에서 공격해 오는 기갑연대 제4중대 3소대 특공대원들과 약 20~30m 거리를 두고 앞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던 수색중대와 함께 앞 뒤 협공하여 638고지를 탈환하였습니다.
“마침내 수색 중대는 앙케 전투 승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색중대의 전공은 어이없게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투상보마저 누락 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색중대 중심으로 제작된 “앙케 의 영웅들” 영화 상영을 갑자기 중단 시켜버렸습니다.
인해 전술작전으로 638고지 약 80%를 먼저 점령하고 뒤쪽에서 공격해 오는 제4중대 특공대와 협공으로 638고지를 탈환한 수색중대는 앙케 전투 주역에서 완전히 배제 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굴절된 역사 속으로 묻혀 질 번했던 앙케 전투의 진실이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1975년 4월30일 10시20분에 월남군은 월맹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월남공화국은 역사의 무대 뒤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월남공화국이 패망한 지, “약 17년이 지난 후” 1992년 12월 22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과 우리나라는 국교, 수교에 합의 하였습니다. 양국이 수교에 대한 경축기념으로 MBC TV방송국에서, 월남 전사에서 최대격전지 앙케 패스 638고지 정상에서 특집방송을 방영 했을 때였습니다.
앙케 전투 당시에 638고지를 방어했던 월맹군 특공대 장교가 이렇게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때 한국군(따이한)은 쓰러지고 쓰러져도 인해전술 작전으로 계속 밀고 올라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증언 했습니다. 서로가 총부리를 겨우며 죽이고 죽이던 적군이었던 월맹군 장교가 수색중대가 펼쳤던 작전을, 진실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했습니다.
이 같은 석연치 않은 의문과 더불어 정보부재와 지휘 잘못으로 앙케 전투는 패한 전투라고 말하는 전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앙케 전투는 패한 전투가 아니라 승리한 전투가 분명합니다.
경계 태만과 정보부재와 지휘 잘못으로 엄청난 피해와 희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들에게 차단된 19번 도로를 개통 시키고 또, 무단으로 점령당한 638고지를 탈환했기 때문에 승리한 전투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금 공산화 된 베트남 정부도 우리의 승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한국에서 공수해 가서 638고지 정상에 세워놓은 전승 기념비를 지금까지도 철거하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필자의 연재를 종결 할 가합니다!”
지금까지 필자의 연재를 읽어 주신 모든 회원님들과 네티즌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모든 회원님들과 네티즌 여러분들에게 무궁한 행운을 기원합니다.
특히!
필자의 연재를 허락해 주시고 무사히 마치도록 배려해 주신 시스템크럽 관리자이신 지 만원 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스템클럽 홈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끝 -
댓글목록
북가주님의 댓글
북가주 작성일
그동안 안케님의 연재를 하나도 빠짐 없이 읽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케님이 질문했던 두가지 군사편찬연구소 오 홍 국 연구위원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안케님의 댓글
안케 작성일
북가주님 안녕하세요?
작년 9월16일 베트남 전쟁사 워크숍에 참석하여 앙케 전투 의문점에 대해 발표를 하였습니다.
때문에,
처음으로 올 4월 24일 채명신, 이세호 주월 전 사령관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앙케 전투 40주년 기념행사을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르스님의 댓글
마르스 작성일
안케전투의 논공행상이 엄청난 엉터리였다는 사실은 알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엉터리의 핵심에는 전투에서의 승리보다는 전공에 눈이멀은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관이 분위기를 지배하였기 때문이죠.
마치 임진왜란때 원균이 하던 행동을 다시보는 것 같습니다.
월남에서 훈장받은 사람들을 보면 베트콩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던
부관병과 경리병과 장교들이 수두룩합니다.
월남훈장이 엉터리훈장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미 때늦은 감이 있지만 후세에 이렇게 부끄러운 행위가 재발되지 않도록
명백히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안케님 수고많았습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안케님의 댓글
안케 작성일
마르스님 안녕하세요?
마르스님께서 월남전에 실상을 솔직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100% 다 그렇하지는 않고,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은 영원한 것이기에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 지겠지요.
감사합니다.
그건뭐지님의 댓글
그건뭐지 작성일
안케님 감사히 잘 봤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책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보고 알고 있던 전쟁이란 이미지를 철저하게 파괴한 전쟁역사였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눈물 흘리던 글귀들이 아른거리며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글에 대한 감사를 드리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을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바치신 호국 영령에게 묵념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지금도 전쟁의 상처로 고생하시는 수많은 장사병의 명예와 적합한 보훈이 이른시일내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안케님의 댓글
안케 작성일
그게뭐지님 안녕하세요?
필자의 글을 읽으시면서 눈물까지 어른거리시다느는 님의 글에 감명 받았습니다.
필자로서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 무궁한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구장님의 댓글
구장 작성일
바쁜 일이 있더라도 안케전투만은 꼭 읽었습니다.
안케님 덕분에, 이렇게 편히 지내는 게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국가의 부름에 꽃다운 젊음을 바친 호국영령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제가 마치 전장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같이 공포와 두려움 분노 안타까움 등등을 느꼈으며
안케님과 전우분들의 모든 감정이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난 것처럼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뭔가 섭섭(?)하기도 하네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고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일들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
안케님의 댓글
안케 작성일
구장님 안녕하세요?
바쁜일이 있더라도 필자의 글을 읽었셨다니, 필자로서는 한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전장 한가운데서 공포와 분노, 안타까운 감정이 님에게 전달 되었다니, 필자로서는 무한한 보람을 느낌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서양돼지님의 댓글
서양돼지 작성일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제가 다 읽어보지는몾했는데 중간중간 읽었읍니다,그 치열한 현장을 상상을 더해가며읽었읍니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숭고한 희생에 에도를 표합니다,
그리고 살아있으면서 이렇게 먼져가신분들의 명예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신 안케님께 경의를표합니다.
잘정리된 책으로 다시만나 뵙기를 청합니다.수고 하셨읍니다.
안케님의 댓글
안케 작성일
필자의 글을 읽으시고 숙연해 지시고 숭고한 애도와 경의를 표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울러 필자로서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잘 읽었으며, 실태 파악, 진상을 좀 더 자세히 알게되었읍니다. 고맙! ,,.
제C사단 제△연대 RCN co 는 전술적 임무/기능을 무시한 채, 운영을 잘 못되어졌었음! ,,. 그 책임은 지휘부에 있다 . 수색중대원들에게늦더라도 보상성 {배상?}을 해주면 하는 희망임! 그렇게 되어진다면 좋겠음. ,,.
안케님의 댓글
안케 작성일
선생님 안녕하세요?
항상 저에 글에, 댓글로 격려해 주시고 좋은 정보와 많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연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늦더라도 R C N원들에게 보상성을 해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희망이라는 마음에, 감명 받았습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 무궁한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ANCKE】님! 사실 저는 1972년도에 경북 영천 충성대 {육군 제3사관학교} 교수부에 있었는데, 당시 3사교 # 1기생인 '이 무표'대위가 모교에 왔군요. 연병장에 모든 기간 장교, 부사관, 사관후보생{사관 생도} 및 군무원, 교도대.행정부.학생연대 산하의 모든 기간병들 상황근무자만 남기고 열외없이 총집합하여 638고지 작전 체험담을 청취했었읍니다. 저는 학술학처 일반학과 독도법반에 있었는데, 내일 교육 준비가 너무 바빠서 참가치 못하고 홀로 남아서 준비하는라고 불참했던게 아쉽웠읍니다. ,,. 그때 참석한 선배 장교들이 하는 얘기가 "이 무표'대위 가슴에서 어께 띠를 두르고 태극무공훈장을 달고 강연하는데, '나느한 이;ㄹ이 하나도 없는데 올라간 것 뿐이고. 나보다 먼저 '나 민하'중위가 먼저 올라가서 고지를 탈환했는데 그 '나'중위가 고지에서 저격받아 죽는 바람에 다시 공격한 나는 그냥 아무런 전투도 않고 발로 밟았다는 것 뿐인데 이렇게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되었다. ,." 운운!
당시 학술학처 일반학과 및 교양학과 만 해도 Viet-Nam 참전자들이 몇명 있었읍니다. 독도법 반장 '한 시호'대위{간부후보생 # 157기, 중령 예편} 교양학과 '戰史' 교관 '임 종천' 중위 {육사교 # 25기, 소장 예편, 보병 사단장 역임}, 그리고 저! ,,.
화기학처 및 전술학처, 특수전학처에는 제법 있었는데,,.. 행정부에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만,,. 모두들 부러워하는 표정들이 역력했었죠. ,,.
아무튼, 제C사단 제Δ연대 RCN co 는 '보병사단 편제표{T/O & E, 군사3급비밀}' 및 '야전 교범 보병연대 수색중대 {FM 7 - ?}'에도 언급되어진 바; '임무 및 기능, 전술적 운용'에 위배된 작전이었읍니다.
'경 전투, 측방 전투 지경선의 상급부대 쪽에서의 측방방 방호{遮障(차장), screen}, 방어 작전 시 전투지역 전단{FEBA} 전방의 전투 전초{COP} 임무 수행 시 전방 遮障{screen}, 연대 주요 시설 경계 작전, 적 후방 주요 시설 습격{assult}, 적 후방지역 잠입 침투 후 적진 상황 보고, 필요 시 공중 기동 작전으로 적 퇴로 차단{방어 시}, 제한된 중 전투, 주로 경전투, 조기 경보 작전 및 적과의 접촉 유지.
그러나, 이번 638고지 전투에서처럼 '보병대대 예하의 '소총중대'처럼 운용되어진 것은 아주 졸렬한 전술적 운용이었으며, 따라서 책임이 큽니다. 그러므로 그런 중전투를 수행하여 적지 않은 실질적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훈장 몇 개만 할당되어졋던 건 정말 말이 않 됩니다. ,,.
저도 소령 때 전방 제7사단 사단수색대대 작전장교를 해서 실무를 조곰은 알며, 육군보병학교 교수부 전술학처 연대반에서 '공격시 보병연대'라는 과목을 맡아 고등군사반 대위들 교육을 전담해서 전술을 조곰은 앎니다만, 적이 점령치 못하도록 사전에 해 지점에다가 불시에 요란 사격도 하면서 적의 접근을 원천 불가능하게 햇었더라도 ,,. 아주 불량한, 졸령한 방책을 채택.시행했었던 잘 못된 전투라고 여겨집니다.
내종에야 뭐 이렇쿵 저렇쿵 말은 하기 쉽기야 하지만,,.
공중 공격 {Air Strike}도 별로였으며, 공중 지뢰 살포도 무지막지한 낭비였고, 군수 지원 ㅡ 재 보급작전은 왜 또 그렇게도 소홀했었다니! ,,. 또 통신 유지는 왜 그토록 먹통이었느냐? ,,.
하여간, 고인들의 명복이나바 진심으로 빌며,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뿐! ,,.
하루 빨리 빨갱이들을 소탕하고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 오기를 마음 먹어 봅니다. 여불비례, 총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