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 “조선일보 덕분에 악역 연기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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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형님(노무현)은 떨어졌지만 나는 이기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형님이 가시면서 부산이 이렇게 달라졌다는 걸 보고하고 싶었다”며 “선거전 중반께부터 ‘정말 이겨야겠다.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고 말했다. 문 최고위원과의 인터뷰는 4·11 총선 다음날인 12일 저녁 일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시작해 이튿날 새벽 1시께까지 이어졌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
[토요판] 커버스토리 문성근의 정치인생과 낙선 심경 정말 이기고 싶었다, 할 말 다해 미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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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지만, 이 남자들은 지고도 좀체 주눅들지 않는다. 목소리엔 되레 힘이 잔뜩 들어간다. 여당의 텃밭이자 4·11 총선의 격전지 부산권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섰다가 나란히 고배를 마신 문성근·김영춘·김경수. 이 남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것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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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북·강서을 문성근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어? 아직 질문이 남았는데…. 톤을 높여 질문하자 번쩍 떴다. 시계를 보니 1시가 넘었다. 4·11 총선 다음날인 12일 밤 10시쯤 여의도 국회 앞에서 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만났다.
손님이 오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배우에서 시민운동가를 거쳐 정치인이 된 그에게 난생처음 치러본 선거는 어땠는지, 낙선한 소감은 어떤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궁금해 시작한 인터뷰는 20세기 현대사를 관통했다.
첫 질문으로 거시기하지만, 선거에 떨어진 소감이 어떤가?
“담담하다. 선거운동 끝나고 투표참여 캠페인 하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 근래에 드물게.”
낙선하고 기분 좋다니…. 이전에도 많이 떨어져봤나?
“음…. 그러고 보니 처음이네. 초등학교 때 쭉 반장 했고. 1월 민주당 최고위원 됐고. 정말 처음이네.”
졌지만 최선을 다했고 마음속 응어리 다 쏟아내서 후련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에 이처럼 편안한 적 없었다. 굉장히 기분 좋아. 다 쏟아냈ㅊ으니까. 서거 후에 1년 고민하다가 (야권통합운동인) ‘국민의명령’을 시작한 거고, 그 연장선에서 달려온 거니까. 지금까지. 연극으로 치면 1막을 끝낸 기분이다.”
어떤 응어리를 어떻게 쏟아냈나?
“서거 이후에 석달 열흘을 공부만 했다. 그 양반이 왜 갈 수밖에 없었나 알아야되니까. 다 아는 것도 다시 뒤져봤다. 사실 난 2002년 대선 때 지역구도 극복에 꽂혀서 한 거거든. 그 양반 대선 때도 백화점식으로 무지하게 많은 사안을 얘기했다. 그런데 난 그 얘기만 들려. 관심이 그거니까. 지방분권, 국토균형발전, 동북아균형국가 이런 거는 안 들어왔다. 남북관계는 기본적으로 관심 있었고. 새로 공부하면서 노무현은 정상적인 민주공화국을 만들고 싶어했던 거구나 깨달았다.”
특별히 지역구도 극복에 더 관심이 꽂혔던 이유는 뭔가?
“아버지(문익환 목사) 때문이지 뭐. 생의 뒷부분 17년 중 11년 3개월을 교도소에서 사셨다. 6번. 범접 안 되는 수준의 삶이지. 딱 하나 시빗거리가 1987년 양김(김대중·김영삼)의 분열이거든. 그때 내가 대선 일주일 전인가 수유리 댁에 가서 어마어마하게 항의했다.
어쩌시려고 이러는 거냐. 진다. 당신은 국민이 단일화를 하도록 할 거다, 정 안 되면 디제이가 양보할 거다, 그런 가능성을 엄두에 둔 거지. 어쨌거나 1차적 책임은 양김에게 있지만, 문목(그는 부친인 문익환 목사를 줄여서 문목이라 불렀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거지. 양김 시대 끝나면서 2002년에 노무현이 극복하겠다고 나서니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나라도 한번 더 국민 앞에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노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거다.”
선거 얘기는 뒤로 밀리고 말았다. 한 사람의 인생이 ‘딴따라’에서 정치인으로 180도 바뀌었는데 어찌 스토리가 없을까. 우리는 한동안 1980년대 후반에서 어슬렁거렸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이었던 문 목사는 1989년 북한을 방문한다.
문 목사는 이를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미리 알렸다. 문 목사가 돌아온 뒤 변호인단은 평민당 중심으로 꾸려졌다. 문성근은 당시 통일민주당의 초선이던 노무현을 찾아간다. ‘노짱’과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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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인터뷰 내내 “‘노무현을 판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비판하려면 해라. 난 그것 때문에 나온 거다. 난 할 말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선거를 치렀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에 이처럼 편안한 적이 없었다”는 말로 마음속 응어리를 다 쏟아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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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목사 방북과 구속 이후 공안정국이 시작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노 의원에게 변호인단 참여를 부탁했나?
“변호인단을 꾸렸는데 모두 평민당 쪽만 있으니까 모양새가 안 좋아서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부탁을 드렸다.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러자고 하더라고.”
그리고 꾸준히 교류한 건가?
“아냐. 그러다가 1992년 총선 때 입당해서 유세를 도와달라고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막 진행 시작했을 때였거든. 아직도 그 말은 기억난다. “인기라는 게 별거 아닙디다”. 내가 인기를 유지하고 싶어 그런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세번째 만난 게 2001년 3월쯤이다. 그때는 계남(명계남)이와 내가 찾아갔다. 도와드리겠다고.”
그 뒤 방송을 그만두지 않았나?
“양자택일하라고 하더라고. 그리 갈 건지 아님 방송 계속할 건지. 노사모 활동 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광주 경선 때인가 무대 위에 올라가 버린거야. 화면에 나왔거든.”
당선 가능성 높아지니 주변에서 남북문제는 얘기하지 말랬다 지역문제와 무관하지 않은데 빨갱이라 공격당한다고 김두관 지사는 지방선거 때 노무현 얘긴 일체 안했다더라. 난 했다, 장사하냐 비판해도 부산에 온 이유였으니까.
2002년 대선 후 입각제의를 받지 않았나?
“문화부 장관 하라고 했지. 그런데 지역구도 극복하겠다는 노짱을 도운 이유가 문목 때문이었거든. 나라도 한번 더 국민 앞에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그래서 당선 이후 어떤 덕도 보지 않겠다고 미리 얘기했었고. 입각 제의를 덜컥 받아버리면 사죄가 성립 안 되잖아.”
결국 아버지 문익환 목사, 그리고 문 목사를 고리로 만난 노무현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온 거네?
“디제이도 있다. 마지막으로 만나서 길게 얘기한 게 2009년 3월이다. 문목 방북 20주년 추모 동영상을 찍으러 갔다. 그때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제 내가 대통령을 다시 하겠냐,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 난 할 수 없으니 젊은 네가 싸워라.” 속으로 그랬지. 안 할 건데…. 노 대통령 가시고 나서는 그런 말도 했다. “담벼락에다 대고 욕이라도 하라”,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다.” 절창이라고 생각했다.”
서거 이후 100일을 공부해서 내린 결론이 정치였나?
“우리 역사를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여까지 왔는데 이명박이라는 괴물이 나타나서 이렇게 쑥대밭을 만드나…. 돌아가신 분들께 죄송함이 엄습했다고 할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이듬해 국민의명령 제안서를 쓰고 야권통합운동을 시작한 거다.”
그는 2010년 장문의 제안서를 쓴다. ‘유쾌한 100만 민란-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꾸는 시민들이, 시민의 힘으로 민주진보 진영을 하나의 정당으로 묶어내자는 취지였다. 2012년 민주정부 수립이 목표였다. 당시만 해도 ‘목표와 취지는 좋은데 그게 되겠어?’ 하는 싸늘한 분위기였다.
국민의명령은, 내가꿈꾸는나라, 시민주권 등 여러 시민정치운동단체와 합쳐져 ‘혁신과통합’(혁통)이 되고 합당을 위한 징검다리 정당 시민통합당을 거쳐 민주통합당의 한 주체로 합류한다. 야권이 하나의 정당이 되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인 통합이 이뤄지고 그 정신이 바탕이 되어 이번 총선에서 전국적으로 야권연대가 이뤄진다.
야권통합운동 이후 출마를 결심하기까지는 한 고비가 더 있었을 것 같다.
“운명이지 뭐. 혁통이 출범하면서 내 역할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당과 통합하면서 처음엔 지도부를 양당에서 3명씩 추대하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을 하기로 결정됐다. 흥행 불쏘시개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한다’ 싶었다.
밥상을 차려 드리면 이제 ‘선수’(전업 정치인)들이 드시겠지 했는데 출마까지 하라니까. 난 국민의명령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외각에서. 배우도 하면서. 혁통 만들 때는 전국 돌아다니면서 회원 모집하고 있었으니까 촬영 못했지만, 선수들 포진했으니. 그때 고민이 가장 많았다. 고민하다가 지난해 12월26일에 최고위원 출마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출마까지 선언해버렸다. 최고위원이라면 어려운 지역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통합당에 어려운 지역은 수도권에도 많은데 부산 북·강서을을 선택한 이유는?
“노통이 2000년에 떨어진 곳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노통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밥 먹자고 부르더라고. 그런데 뭔 얘기를 안해. 30분 넘게 다른 얘기만 하기에 왜 부르셨냐, 편하게 얘기하시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부산, 경남 선거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그 부탁을 못하고…. 그래서 선거운동 내내 10명 정도 지역구를 다녔다. 깨끗하게 다 떨어졌지. 허허.”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
“가장 많이 묻는 게 왜 여기 나왔느냐는 것이었다. 노무현 형님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얘기했다. 서민 대통령이었는데 회한 많지 않느냐, 제대로 못한 것도 있고, 내게 운명처럼 숙제가 돼버렸다, 숙제하러 왔다고 했다. 처음엔 당선 가능성 제로였다. 나도 기대를 안 했고. 그런데 시민들한테 왜 왔나 설명하면서 점점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하더라고. 처음에 거기 활동가들과 어떤 기조로 선거운동을 할 것인지 전략회의를 할 때도 김두관 지사 방식으로 할 건지 아닌지 고민이 많았다.”
김두관 방식이 뭔가?
“2010년 6·2 지방선거 때 김두관 지사는 단 한번도 노무현 얘기를 안 했대. 장사한다고 할까봐. 그런 말 듣기 싫다는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지지유세를 가자마자 신들린 듯이 했지. 눈물, 땀 범벅이 돼서. 아직도 기억난다. “노무현은 3번 떨어지고, 여기 김두관은 6번 떨어졌다.
정치인 노무현이 지역대결 구도를 극복하겠다고 자기 머리 짓이기다 죽었다. 세상 떠났다고도 안 했어. 노무현이 걸었던 길이 옳다고 김두관이 또 도전하고 있다. 노무현 한 사람 목숨으로 부족한가. 그렇다면 김두관도 죽여라.” 미친 거죠. 얼른 사과했다. 유권자한테 할 말이 아니니까. 김두관의 길도 고민했었는데, ‘내가 여기 왜 왔지? 그 양반 아니면 여기 올 이유가 없지’ 생각하고 내 방식대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 하자고 결정했지.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하자, 아예 화면에 유서를 띄우고 노제 때 낭독한 유서를 읽었다. 어느 날은 한국 역사, 어느 날은 부산 경제 등 조금씩 방점이 달랐지만 대부분의 유세에서 노무현을 얘기했다.”
어떤 얘기를 주로 했나?
“유서 해설이랄까. 작은 비석 하나 남겨라는 대목 있지 않나. 이 양반은 죽어서도 지역구도 극복에 기여하겠다는 거였다. 처음엔 몰랐다. 국립묘지가 싫어서 그랬나, 나라가 × 같으니까. 돌아가서도 거기 묻혀 지역구도를 극복하려 했던 거다. (유서에) 오랜 생각이다라고 썼잖아. 15분 뒤에 뛰어내릴 사람이 풀 뽑잖아. 인사도 하고. 그것도 나중에 곱씹어보고 알았다.
문목이 1976년 전주교도소에 27일 동안 단식한 적이 있다. 뼈밖에 안 남았는데 웃으시면서 그러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시 하나 지었다면서 마지막 시 외우는데 이랬다. ‘나는 죽는다/ 나의 스승은/ 죽어야 산다고 하셨지/ 그 말만 생각하자/ 난 오늘도 죽음을 산다’. 이 양반이 15분 뒤면 육체 생명은 끝나지만 인간 노무현은 역사 속에 살아 있다 이런 생각 한 거지. 미뤄 짐작하면 이런 거다. ‘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가족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
나를 공격하는 게 나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민주진보진영을 한데 묶어 수장시키려는 거니까 나를 버려라. 그래서 나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가 아니다. 나를 버리라고 하다가, 그것도 안 되니까 진보진영도 침몰시키면 안 되니까… 내가 싸안고 간다.’ 그러고 간 거 아니냐. 그래서 문재인도, 나도 여기 나온 거 아니겠냐, 이런 식으로.”
유권자들이 듣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후보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한 거네?
“그게 노무현을 판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비판하려면 해라. 난 그것 때문에 나온 거다. 난 할 말을 하겠다. 물론 부산 얘기도 했지. 부산은 침체가 끝없이 이어지는 도시거든. 모든 수치가 내려가요. 인구는 400만에서 350만으로 떨어졌고…. 그 침체의 원인을 일당 독점지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경쟁, 견제와 균형이 없어서 그렇다고.”
본론인 총선 얘기에 진입해서도 문성근은 되돌이표를 찍은 것처럼 노무현 얘기로 돌아왔다. 정치를 얘기해도, 정책을 얘기해도, 부산의 경제를 얘기해도 마침표는 노무현이었다.
조선일보 덕에 악역 연기 늘었다 악의에 가득찬 기사 보며 이젠 따로 공부 안해도 될듯 날 포함한 민주당 지도부 일을 제대로 못한건 욕먹어 싸 그래도 참패라고 규정 말자 털고 씩씩하게 대선 치러야지
지역구 유권자들은 지역 개발 공약을 좋아하지 않나?
“처음엔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여론조사도 좋게 나오고 당선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이 지역의 오랜 활동가들도 주문이 많아졌다. 빨갱이라고 공격하니까 남북문제는 얘기하지 말라고. 그런데 지역 공약만 해도 그렇다.
부산 발전전략은 철도 연결밖에 없다.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북항을 재개발하기로 하고 신항만, 물류단지를 잘해놨거든. 또 부산은 준설을 해야 하는 중국 상하이에 비해 항구가 좋다. 남북철도를 연결하면 유럽까지 갈 수 있다. 우리나라 중국 수출 액수가 얼마나 많은가. 부산의 경쟁력이 무지 올라간다.
그 물류를 쓰려고 외국 업체들이 들어올 테고 항공수요도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신공항 문제도 가덕으로 가지 않겠나. 그거 말고는 다른 희망이 없다. 그 얘기를 하면 <조선일보>의 ‘저주 마케팅’에 영향을 받은 분들이 “뻑 하면 총질하는 사람들하고 뭔 놈의 교류냐”고 부르르 떤다.”
그 지역 활동가들이 하지 말라는 얘기 중에 고집스럽게 한 얘기 또 있을 거 같다.
“우리한테 3분의 1만 달라. 부산 전체 18개 의석 중에 6개만…. 그 힘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정치인을 대선 후보로 밀어올리겠다, 부산의 힘으로 정권교체 하자.”
왜 그 얘기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
“여론조사를 해보면 나를 지지하는 사람 중에 20%는 다음 대통령은 박근혜라고 생각하거든. 박이 대통령이 되면 정권교체라는 거지. 박근혜 지지세력이 떨어져 나간다는 거지.”
노무현도 하지 말라, 남북문제 언급 말라, 부산의 힘으로 정권교체 얘기도 하지 말라면 뭘로 선거운동을 하라는 건가?
“지역 공약이지 뭐. 중앙정부 예산 많이 가져올 수 있다. 민주당의 최고위원이고, 정권 교체하면 집권당의 수뇌부가 되니까 지역 예산을 많이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공약을 하라고 하더라고. 난 그렇게는 못하겠더라. 나는 내 얘기를 안 하면 선거에 나온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낙선하고도 후련하다고 한 건가?
“선거운동 다 끝났을 때 얹힌 게 싹 내려가더라고. 지역의 활동가분들 맘도 100% 이해하지. 20년 동안 한 번도, 심지어 노무현도 못 이긴 곳에 당선 가능한 사람이 왔으니까. 나도 선거운동 하다 보니 정말 이겨야겠다,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은 떨어졌지만 난 걸렸다(당선됐다)고 보고드리고 싶었다. “형님이 가시면서 이렇게 달라졌다. 형님의 호소를 부산시민 이제 들어주신다. 형님이 내민 손 미처 잡아주지 못했는데 12년 만에 동생이 내미는 손 잡아주셨다” 하고 보고하고 싶다. 정말 간절히 원했다.”
4년 뒤에 다시 출마하는가?
“지역구를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선거 사무실로 쓰던 공간을 줄여 문화강좌를 주기적으로 열려고 한다. 지역구 활동은 계속할 계획이다.”
문익환의 아들이자 김대중의 아들인, 그리고 노무현의 동생인 문성근은 표가 나오는 방식이 아니라 그가 하고 싶은 선거운동을 하고서도 45.1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문재인(사상)과 조경태(사하을)는 당선했다.
10년 전 같은 곳, 노무현의 득표율은 35.69%였다. 문성근 외에 부산·경남에 출마한 후보들 대부분이 노무현 이상의 득표를 했다. “그게 변화다. 오늘 최고위원들이 약식간담회를 열었다. 부산은 잘한 거다. 기대가 높았던 거다.
수도권에서는 이기지 않았나. 저쪽(새누리당)은 1인 독재의 효용성을 만끽한 거다. 게다가 박근혜는 대선 후보다. 우리는 대선 후보들이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를 못해 사실 ‘2진’으로 구성돼 있어 지도력 면에서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참패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뼈를 깎는 반성을 해야 한다. 1월15일 지도부 선출 이후 지지율이 수직상승했다가 한없이 내려갔고, 나를 포함한 새 지도부가 일을 제대로 못한 거는 욕먹어 싸다. 총선 전략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점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참패, 우리 스스로 그렇게 (평가)하지는 말자. 대안세력으로서 신임을 못 얻은 측면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반성하고 조정하고 대선을 준비해야지. 지도부가 총사퇴하면 어떻게 하나. 늦어도 7월께에는 대선후보 경선에 들어가야 하는데….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평가를 냉정하게 하고 반성할 거는 하고 털고 씩씩하게 가고 해야지. 다 관둬버리면… 그건 무책임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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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 지난 12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노무현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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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이다. 정치인이 좋은가, 아니면 배우가 좋은가?
“배우가 100배는 좋지.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그냥 배우 하고 있었을 거다. 참여정부 끝나고 나도 뭔가 억눌린 것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다. 노통이 봉하 내려가 “아, 기분 좋다” 할 때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면서 연기가 아주 좋아졌다.
이런 게 깔대기인가. 아무튼 그 이전 내 작품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하하. 조선일보 덕분에 악역 연기가 늘었다. 전에는 범죄심리학이나 소설, 책을 보고 따로 공부를 했는데 참여정부와 노무현, 그리고 문성근에 대한 악의가 가득 찬 기사를 보면서 ‘이래서 조폭언론이구나’ 느꼈고 덕분에 악역을 더욱 잘하게 됐다.”
그렇게 연기를 좋아하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올 연말에 정권교체하고 한 10년쯤 뒤? 우리나이로 일흔 되는데 그 정도 나이면 정치 쪽은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하지만, 영화 쪽에서는 환영받는다. 노인 연기 수요는 늘 있으니까.”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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