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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 작성일12-02-29 06:24 조회19,7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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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박사님께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점사건들을 간추려 요점정리한 글입니다.

시스템클럽에 가입하신 후 아래 글을 먼저 읽어보실 것을 권장합니다.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 요약총정리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역사 재평가 운동 본격화 조짐
  

지난 5월7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대한민국재경경우회, 자유시민연대,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이 주최하고 애국단체총연합회가 후원하는 대규모 토론회가 있었다. 토론회의 취지는 왜곡된 “현대사를 재조명하자”는 것이었고, 토론회 주제발표자는 필자, 이주천교수, 법철스님이었다. 토론 주제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5공의 핵심인사들이 대거 참여했고, 앞으로 이들은 역사재조명 추진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는 18만 페이지로 되어 있다는 수사기록, 그것도 5공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작성된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을 가지고 5년에 걸쳐 연구를 했고, 그래서 작년 10월에 총 4권, 1,720여 쪽의 다큐멘터리 역사책을 발간했다. 이 책을 보면 기존의 드라마 제4 및 제5공화국이나 영화 ‘화려한 휴가’는 황당한 무협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수사기록은 필자도 보았고, 판검사들도 보았다. 그러나 해석에 있어서는 필자와 판검사들 사이에 천지 차이가 있다. 필자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관심법 재판이요 인민재판이라고 결론지었다.  

1996-97년에 법관들이 쓴 판결문은 1980년의 판결들과 정 반대였다. 어느 정권 시절의 재판부이냐에 따라 판결이 뒤바뀐 것이다. 정권에 따라 판결이 뒤집힌다면 사법부의 판결들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역사학자가 나서서 역사를 써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판사가 쓰고 정치인들이 쓰면 그 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이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이러한 당위성에 발맞추어 2004년10월3일, 대법원은 수사자료를 공개하여 역사를 쓰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정권에 따라 판결문 달라

1980년, 한국의 법관들은 정승화에게 내란방조죄를 선고했다. “김재규가 범인인줄 알면서도 기회주의적 발상으로 김재규의 범죄를 은닉하고 김재규의 뜻에 따라 국방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동원을 월권적으로 주도하면서까지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1980년의 법관들은 김대중에게도 내란음모죄를 선고했다. “80년5월의 학원소요사태는 김대중이 10.26 이후의 국가체제 공백기를 악용하여 북한 측 불순분자들과 연합하여 최규하 정권을 무너트리고 정권찬탈 목적으로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것이다. 1980년의 법관들은 5.18광주사건을 반정부 폭동으로 규정했다. “5.18은 김대중으로부터 사주와 자금을 받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 등이 자금을 살포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유발하고, 홍남순 김성용 등 반체제 인물들이 이에 편승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과도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폭도들을 더욱 선동하여 방화, 파괴, 살인, 강도 등의 행위를 저질러 광주를 무정부사태로 만들고 계엄군에 총격까지 가한 폭동”이라는 것이다.

그 후 세상이 바뀌자 1996년의 법관들은 헌법이 명시한 일사부재리 원칙을 무시하고 정승화와 김대중과 5.18 광주사건 모두에 대해 재심절차 없이 다시 재판했다. 이들에 의해 김대중은 민주화의 화신으로 등극했고, 전두환은 무력으로 국권을 찬탈한 반란수괴요 광주시민을 학살한 내란수괴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97년 4월 17일(96도3376) 대법원은 이런 요지의 판결문을 냈다. “5⋅18은 전두환 일당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해가지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압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내란을 목적으로 광주학살을 자행하였다.”

같은 사건을 놓고 1980년의 법관들과 1996년의 법관들이 정반대의 판결을 낸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일사부재리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는 재판을 두 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1996년의 법관들은 이 헌법을 무시하고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특별법에 의존하여 1980년의 판결문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YS는 왜 갑자기 전두환을 감옥에 보냈나?

민주화투사라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자 그는 하나회를 정리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인기의 요체를 실감한 김영삼은 군사정권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인기는 더욱 올랐다. 민주화에 대한 막연한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김영삼은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2.12 및 5.18 피해자들이 일어섰다. 1993년7월19일 정승화, 장태완 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장을 냈다. 12.12사태는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일으킨 군사반란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로부터 1년3개월10일 후인 1994년10월29일, 검찰은 12.12고소-고발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12.12를 “군형법상의 군사반란사건”으로 규정했고, 피고소-고발인 전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12.12사건은 소장파 군부세력의 리더인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군권을 탈취하기위해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승인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고, 병력을 불법동원 해 군 지휘체계를 무력화시킨 명백한 군사반란 사건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 모두를 법정에는 세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8명중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에 대해서는 14년간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을 평가하고, 법정에 세울 경우 국가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를, 공소시효가 지난 정호용 등 4명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서울지검 조준웅 1차장검사는 12.12가 내란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당시 대통령 등 헌법기관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한 내란죄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은 ‘죄는 있지만 역사평가는 후대에 맡기자’는 대통령의 발언에 검찰이 법적 고무도장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이어서 5.18 시위를 획책했던 정동년 등 구속자-부상자-사망자가족 등 3백22명이 주동이 되어 1994.5.13일 오후3시 전두환-노태우 등 5.18 당시 대대장급 이상 신군부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고소장이 접수 된지 1년2개월만인 95년7월18일,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장윤석)는 피고소피고발인 58명 전원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이들을 불기소 처분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고소인과 피고소인, 참고인 등 모두 2백69명의 진술과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신군부가 취한 행위들은 10.26으로 야기된 권력공백기에 12.12를 통해 군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을 창출해내기까지의 전형적인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내란죄 등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마디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죄는 인정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여론은 검찰의 이런 결론을 별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이로써 민주화세력에 의한 역사뒤집기 노력은 일단 서리를 맞는 듯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이변이 발생했다. 1995년10월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한 것이다. 비자금이 1조를 넘을 것이라는 의혹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는 연쇄적 심리작용을 일으켜 군사정권에 대한 사회적 반감으로 비화됐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역사를 뒤집기 하려는 소위 민주화세력에게 절호의 찬스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당시 김영삼은 노태우가 이끄는 민자당에 들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로 인해 김영삼은 소위 민주화세력으로부터 군부와 결탁하여 대통령이 됐다며 조롱받던 처지에 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노태우의 비자금이 터지자 국민은 노태우와 민자당에 대해 분노했다. 불똥은 노태우에게만 튄 것이 아니라 노태우로부터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도 튀었다. 김대중은 1995년10월25일부터 그달 31일까지 중국 ‘조어대’(영빈관)에 있었다. 비자금 문제가 터지자 김대중은 동행했던 참모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가 그런 폭로를 한 것은 더 큰 것을 예방하기 위해 던지는 작은 미끼와 같은 것이었다. 만일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의 향방을 추적하게 되면 그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는 김영삼을 향한 비수도 꽂혀있었다. 당시 민자당에 들어가 노태우 밑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더 큰 규모의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김대중의 폭로로 당황한 쪽은 김영삼이었다.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얼마나 큰돈을 받았겠느냐, 이런 여론이 확산된 것이다. 이 따가운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김영삼은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를 향해 집중돼 있는 검은돈의 의혹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노태우와 전두환을 희생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전직 두 대통령을 희생시키면 전 사회가 충격에 빠질 것이고, 이 충격에 의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세간의 조롱도 묻어 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에게 집중됐던 비자금 수수 여론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따라 1995년11월16일. 노태우가 2,358억 9,6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전격 구속되었고, 11월24일. 김영삼이 5.18특별법을 제정하라 지시함으로써 11월30일에 특별수사본부가 발족되고 정당과 국회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대통령의 발언이 바뀌자 검찰의 입장도 바뀌고 헌법재판소의 권위도 바뀌었다. 이어서 12월3일 전두환이 경남 합천에서 경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 되었다. “노태우 등 33명의 군부 장교들과 공모하여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5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 중앙청 등을 장악하여 군권을 탈취하였다는 혐의”인 것이다.

12월21일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으며, 1996년2월28일에는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종결되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16명이 기소되었다. 1996년8월26일, 1심 선고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6월을 선고받았고, 12월16일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으며, 1997년4월17일, 상고심은 항소심 형량을 확정하였다. 1997년12월19일,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12월20일에 김영삼과 김대중이 회동하여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면에 정치적으로 합의했다.

이런 약사가 말해주듯이 5.18에 대한 재판은 순전히 김영삼의 상황 돌파 필요성에 의해 시동되었고, 법관들이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영합하여 판결문을 쓴 정치재판이요, 역사를 뒤집는 역사쿠데타였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학문이다. 분석에 훈련된 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써야 하는 것이지, 법을 다루는 법관들이 단기에 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96년의 법관들은 12.12 및 5.18에 대한 역사를 다시 썼다. 법이 학문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법은 광활한 사회 분야 속에서 극히 좁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이 속에 사는 검사들과 법관들은 역사를 쓸 만큼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역사를 조명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영합하는 법관들도 있을 것이고, 분석력과 시각에 제한이 있는 법관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있는 극히 일부의 법관들이 시간에 쫓기면서, 법정에서 쓴 역사를 진실한 역사요 완전한 역사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그 자체가 역사의 연구 대상이지, 역사의 저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보는 10.26

1979년10월26일, 오후 4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도중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궁정동 안가에서 각하 저녁식사를 준비하라 연락했고, 이때 김재규는 평소 마음먹었던 혁명을 하기 위해 정승화를 궁정동에 불러 대기케 했다. 자기는 각하를 시해할 권총을 준비하고 두 대령들에게는 권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한다.

차지철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은 이 계획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만찬시간 1시간 40분 만에 김재규는 차지철과 각하를 살해했다. 김계원은 각하의 시신을 국군병원에 옮겨놓고 군의관으로부터 각하가 확실하게 사망했음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비상소집을 한다. 8시40분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으로부터 은밀히 김재규가 차지철과 각하를 살해했다는 정보를 듣고도 각료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과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을 결정하고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이 사실을 귀띔까지 해주었다. 총리가 이러했으니 다른 국무위원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그 많은 국무위원들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쥐죽은 듯 눈치들만 보았다. 위기에서 국가를 생각하여 나서는 자가 일체 없었던 것이다.    

한편 김재규는 시해 후에 피범벅이 돼 가지고 정승화에게 맨발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달려와 그를 김재규 차에 태우고 육군 B-2 벙커로 갔고, 가는 도중 정승화는 김재규의 말과 표정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국방장관을 제치고 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을 동원하는 명령을 내리고 차지철의 부하인 경호실 차장을 지휘하여 경호병력을 현장으로 가지 못하도록 동결하는 명령을 내렸고, 현장 접근을 확실히 저지하기 위해 역시 차지철의부하인 수경사령관을 지휘하여 청와대를 포의하라 지시했다. 차지철이 대통령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벙커에 온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을 내놓으면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약삭바른 배신이었다. 정승화는 장관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그를 비호했지만 전두환의 순발력에 의해 김재규는 곧바로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고, 거기에서 김재규는 자기가 범인이고 정승화와 함께 행동했다는 것을 털어놨다.

이학봉은 즉시 체포하자 했지만 불과 두 시간 정도의 시차로 정승화는 이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를 비호하고 자신의 개입 사실을 축소하려 갖가지 시도를 했다. 이학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구속을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12월 6일에야 구속을 결심했고 D일을 12.12로 결정했다. 판결문에는 전두환이 동경사로 발령 날 것을 눈치 채고 정승화 체포를 결심했다고 하지만 전두환에 대한 인사이야기는 12월9일 골프장에서 노재현과 정승화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이다. 체포하라 결재한 날은 12월6일, 인사발령 이야기는 12월 9일이었다. 판결문이 너무 황당한 것이다.   



                                                                      다시 보는 12.12

12월 12일, 오후 6시30분, 전두환은 수사국장 이학봉을 대동하고 국무총리 공관에서 집무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당시는 정승화에 대한 의혹이 사회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이러한 것은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곧바로 대통령에게 가져갔다. 전두환은 재가가 쉽게 나리라 생각하고 무조건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사전각본을 짰다. 그런데 의외에도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앉힌 자리에서 재가할 것을 고집했다.

정승화를 체포하는 일은 원체 큰일이라 전두환은 평소 군에서 여론을 이끌 수 있는 9명의 장군을 보안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경사30단으로 초청하여 재가가 끝나는 대로 체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승화와 가까운 장태완, 정병주(특전사령관), 김진기(헌병감)에게도 따로 설명해줄 요량으로 신촌만찬을 준비했다.

한편 허삼수와 우경윤 등은 4명의 보안사 서빙고 수사관들을 태우고 7시05분에 정승화총장 공관으로 갔다. 서빙고로 가자는 대령들의 권고를 받은 정승화는 순순히 응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부하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총격전이 유발됐고 그의 부하들과 범수대 대령이 중상을 입었다. 그 자신이 한 때 보안부대장을 했으면 저항해야 피해만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필요한 저항을 하다가 부하들을 다치게 한 것이다. 결국 박 수사관이 응접실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M-16소총으로 위협하고서야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국방장관 노재현은 대통령이 빨리 오라는 호출명령을 받고도 이리 저리 피해 다녔고, 피해 다니는 동안 군에는 지휘공백이 발생하여 정승화 군벌과 30단 군벌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됐다. 긴장이 일자 불길한 생각이 든 5명의 장군은 밤 9시 반에 대통령에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면서 재가를 빨리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통령은 ‘장관 오면 해줄게’ 하고 담소들을 나누었다.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총장 권한 대행인 윤성민 참모차장 등 수도권 실세들이 나서서 30단에 모인 장군들을 무조건 반란군이라 규정하면서 병력을 동원하고, 30단과 청와대 지역을 전차포와 야포로 융단공격하려 하고, 상대방 장교들을 체포 구금함은 물론 장교들의 이름을 지정하여 사살명령까지 내리고, 대통령을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하고, 무장헬기로 정승화를 구출하자는 막다른 단계에까지 이르다가 전두환에 의해 진압되고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리저리 숨어만 다이면서 대통령의 호출에 불응한 노재현은 새벽 1시, 제1공수여단과 국방부 옥상에 배치됐던 수경사 병력 사이에 발생한 총소리에 겁을 먹고 부관과 함께 국방부 건물 지하 1층 어두운 계단에 숨어 있었다. 대통령과 함께 하루 밤을 새운 신현확 총리는 참다못해 자기가 나서서 노재현을 찾아오겠다며 국방부로 향했고, 이에 공수대원들이 국방부 건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새벽 3시50분에 계단 밑에 숨은 장관을 발견한다. 총구를 겨눴던 병사들은 “나 장관이다”하는 말에 경례를 한 후 장관실로 모셔온다. 신현확은 장관과 이희성과 국방차관 김용휴를 태우고 총리공관으로 갔다. 노재현은 보안사에 들려 재가문서에 스스로 결재를 한 후 대통령에 가서 꾸중을 듣고 재가를 얻었다. 4시30분에서 05시 10분 사이였다. 최규하는 서명란에 05:10분이라 쓰고 서명을 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1996-97년에 진행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는 전두환이 죄 없는 정승화를 체포하고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윤성민-장태완이 정승화를 풀어주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 5명의 장군을 보내 대통령을 협박하고, 공관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에 의해 대통령에 겁을 주면서 새벽 5시에 재가를 강요했고, 무단으로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사반란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1996.7.1. 제18회 재판정에 나온 신현확 전 총리는 장군들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건의를 한 후 돌아갔으며, 대통령과 하루 밤을 새우는 동안 공관 경비병을 의식한 적은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12.12가 없었다면 시국은 정승화-김재규가 주도한 쿠데타 세상으로 연결됐을 것이다.   



                                                                       다시 보는 5.17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월20일에는 남조선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 ‘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월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7일, 제1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전국내각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 등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이나 김상진 못지않은 애국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이어서 김대중은 4.10일, 5.1일, 5.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무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하도록 해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조직을 분쇄할 것인가!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던 것이다.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당시 북한의 위협은 별로 없었으며,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 되는 것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문을 작성했다. 아울러 폭력으로 국무위원들을 협박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국방장관과 국무총리의 계엄지휘권을 배제하고, 바지 같은 대통령을 간접정범으로 이용하여  내란을 했다고 판결했다. 참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인민재판이요 관심법 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마디로 김대중이 이끄는 세력은 민주화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이 5월22일 전국소요를 일으킬 수 있도록 가만 두었어야 했다는 판결인 것이다.    



                                                                      다시 보는 5.18
              
5월18일(일요일) 새벽에는 이미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 휴교령은 헌법기관이 내린 정당한 명령이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1개 대대씩 들어가 있었던 것은 평소에 계획돼 있었던 부대배치 계획에 의해 자동적으로 배치된 것이며, 2개 대대 규모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상징적인 규모에 불과했다. 2개 대대를 내보낸 것은 순전히 계엄사 작전계통과 계엄사령관 사이에서 취해진 조치였고, 여기에 전두환이나 정호용 등이 개입한 증거는 없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계엄군의 배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배치된 계엄군의 지위야말로 헌법기관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9시경, 광주의 대학생 들은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을 위반했다. 200여명의 대학생들이 전남대 도서관에 간다는 이유를 내걸고 학교에 진압하려 했지만 정문에 이미 배치돼 있던 공수 7여단 병력 20여명이 이들에게 귀가를 종용했고, 귀가의 종용은 정당한 임무수행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꺼내 계엄군에 던져 부상을 입혔다. 도서관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가방에 돌을 숨겨 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5.18측은 계엄군이 먼저 학생들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분명히 학생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을 공격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쫓아가자 학생시위대는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몰려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수많은 시민을 결집시켜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고 경찰관들을 폭행했다. 이는 각본이 있는 행동으로 보인다.  

공수부대가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으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를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들이 대검을 가지고 전라도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 놓았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이 사람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는 동안 확대되어 나돌았고, 이에 관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살해했고, 경상도 차량들을 보면 불태워 버렸고,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여단이었고, 7여단의 주둔지는 전북 금마,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유언비어는 모두가 거짓이었고,  광주시민들에 내재해있는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키려고 제작된 고도의 심리전 전술로 작성-유포된 것들이었다.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사회를 뒤집어보고 싶었던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으로 대표되는 소외계층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삽시간에 배수 단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출소들이 수도 없이 파괴-방화되고 경찰들이 매 맞고 인질로 잡히는 등 경찰력은 단 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에 다급해진 전남경찰과 전남도지사는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은 시내로 나가 길목을 지키면서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을 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상대로 화염병을 던지고 옥상에 올라가 역기와 화분을 머리위로 던진 존재는 시위대였고, 시위대의 지나친 폭력이 계엄군의 반적용을 유도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김대중 석방,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이었다. 이러 요구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의 요구였고, 이 요구는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내각을 일거에 전복하려는 요구들이었다. 광주는 폭력, 방화, 살인이 난무하는 광란의 도시였다. 거리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방화되어 광주시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5월18일부터 5월21일까지는 시위대가 계엄군을 상대로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살육전을 벌였고, 수십 개의 파출소, 도청의 6개 부속건물, 세무서, MBC, KBS 등 공공건물에 대한 무차별한 파괴와 방화 작전이 수행됐다. 계엄군이 교외로 나간 5월22일부터는 시위대가 점령한 광주시와 시위대가 점령한 17개 시군을 연결하기 위한 공격과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해방”을 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28명으로 집계됐다.  

광주시위의 폭력과 과열성은 5월19일 밤부터 5월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다.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고 계엄군을 조롱하면서 감정을 유발하고,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 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돌진차량 운전수를 잡아보니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 한다.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고,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지휘한 지도부가 기록에는 없다. 이러한 공격들이 과연 지도부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한 행동일까?

광주시에는 5월22일에야 비로소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등장하여 무기 회수를 주도했고, 이에 병행하여 김창길(22세 대학생)이라는 온건파가 주도하는 ‘학생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 졌으나 이후 3일간 이들 간에는 무기반납을 놓고 벌이는 강온파 간의 대립이 연속됐다.

5월 25일부터는 강경파인 김종배(26세 대학생)가 김창길 위원장을 제치고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됐고, 학생수습대책위는 시민군 지휘부가 됐다. 이때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 대장으로 등극한 박남선(26세, 골재운반 화물차 운전수)은 시민군 지휘부의 상황실장 자리를 맡았고, 5.18 최고의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겨우 대변인 자리를 맡았다. 상황 기록들을 보면 5월25일 이전, 윤상원과 박남선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는다.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는 숨어 있는 지도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력한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38개 무기고 동시 탈취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사실에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이제까지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고가 탈취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지휘부가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일반 시민들은 무기고 옆길로 걸어 다니면서도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5월21일 아침 9시. 아시아 자동차 업체에 모인 600명은 300여 대의 차량에 시민군을 태워가지고 17개 시군에 널려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향해 38개조로 나뉘어 달려갔다. 광주시로부터 100 여 키로 떨어진 곳들도 많이 있었다.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38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은 위치를 미리 파악한 군사작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38개 무기고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간첩 말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무기고 탈취과정은 5.18에 간첩이 개입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5.21.08:00시, 광주 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자마자 이 지프차들을 모두 몰고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직행했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트럭을 탈취해 그 군용트럭을 몰고 무기고로 갔다는 점이다. 14대의 지휘용 지프차는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이를 본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은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 없이 차량들의 열쇠를 내주었을 것이며, 38개 무기고에서는 지휘용 지프차와 군용트럭을 보고는 역시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기고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러는 위압감에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20사단 지휘부가 몇 시쯤 톨게이트를 지날 것이라는 군 내부의 극비 정보를 알아내 가지고 위와 같은 연속작전을 편 것이다. 이런 작전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전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주작전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국민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경찰과 정부군을 향해 발포한 것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5.18측은 5월21일, 13:30분경에 도청 앞에서 군에 의한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당방위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고 항변한다.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 수사기록을 보면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생했던 자위용 발포였다. 그 이전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이 6차례에 거쳐 발포를 했고, 시민군도 1회의 발포를 했다. 5월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7정 이상의 M-16이 있었다. 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수없이 발생한 사격과 시체들은 아마도 이들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다.

가장 치열했다는 5월21일,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33명,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자동차 전복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일 가능성이 높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70% 이상이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불순분자들이 시민군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5월21일 오후 1시 경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첫 발포를 했고, 거기에는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지만 단지 규명이 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논리와 군대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질낮은 주장일 뿐이다. 5월21일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그들 중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여 병사 1명을 깔아 죽였고, 1명에 중상을 입었다. 이러한 차량공격이 그 후 세 차례나 더 계속됐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은 그야말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차량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도청 앞 발포였다.

그러나 도청 앞 첫 발포는 광주시위에서 있었던 8번째 발포였다. 1번째 발포는 5월19일, 오후 5시, 극렬시위대가 고립된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불타는 짚단을 넣으려 했을 때 그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살기 위해 공포탄을 쏜 것이고, 2번째는 20일 밤, 병사들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하는 살인적 대형차량 바퀴에 대대장들이 권총을 쏜 것이고, 3번째는 같은 날 광주역에 포위돼 있던 3여단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 실탄을 배급하러 갈 때 시위대에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위협용으로 발포한 것이었고, 4번째 발포는 광주역 앞에서 3공수 4개 대대가 포위망을 뚫고 전남대로 철수할 때 발포가 아니었으면 집단 살상을 당할 위기에서 발생했고, 5번째 발포는 5월21일 새벽 5시 경에 전남대에서 시위대가 하늘을 향해 카빈총을 가지고 공포를 쏜 것이고, 6번째는 같은 날 12시경에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발생한 쌍방의 총격전이었고, 7번째는 전남대를 지키던 3공수 여단의 최후저지선이 돌파 당함으로써 집단 살상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자위권을 위해 공수대가 가했던 사격이었다. 그리고 가장 문제를 삼아왔던 5월21일 13시의 전남도청 발포는 8번째 발포였다. 도청 앞에서만 해도 4차례의 차량돌진이 있었고 이때마다 4차례의 자위적으로 취해진 집단 발포가 있었다. 전남도청에서는 8-11번째 발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외에도 5월21일 아침부터 오후 5시 3공수가 전남대를 철수할 때까지에는 6.25 고자쟁탈전을 방불할 만큼의 밀리고 미는 식의 교전과 쌍방 발포들이 있었다. 특전사 10개 대대가 광주시를 철수할 때 철수로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 시위대가 사격을 가함으로써 광주시에서는 정규군과 정규군 사이에 벌어지는 정도의 교전들이 이어졌다.

누구를 위와 같은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발포를 놓고 5.18측은 발포명령자가 전두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공수부대 대신 정규군인 20사단을 투입시켰더라면 처음부터 위협사격을 했을 것이다. 공수부대는 과도하리만큼 민심을 다치지 않도록 억제되고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발포에 대한 자제력이 군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바로 지나친 자제력이 광주 전투를 필요 이상으로 키웠다고 생각한다. 공수대원들은 미국 헤리티지 연구소의 분석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듯이 끝까지 시민군을 조준하지 않고 위협사격 차원에서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5월21일 탈취한 무기는 2개 연대 규모의 것이었다.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광주로 상품을 나르는 상인들이 없어지자, 식료품과 생필품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지속되면 광주시민들의 고통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거기에 일부 무장 시위대들은 시민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뜯고 가족 단위로 살해하고 돈을 뜯어가고 방을 빼앗는 등 광주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기록을 보면 계엄군은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며 그 결과 5월27일 새벽 극비의 특공대식 작전을 폈고, 이로써 무법천지 광주에는 다시 치안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이런 극비 정보마저 새어나가는 바람에 탈환작전 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TNT 제거작업 과정에 웅변돼 있다. 시민군은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도청 지하실에 저장하고 거기에 뇌관까지 연결해놓았다. 폭발하면 광주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그런 분량이었다. 시민군은 이를 폭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게다고 협박했지만 계엄군은 목숨을 내놓고 잠입하여 10여 시간에 걸쳐 뇌관을 제거해주었다. 시민군과 계엄군 중, 누가 광주시민을 더 사랑하였는가?

광주시위대는 헌법기관인 경찰과 계엄군에 폭력을 먼저 행사했고,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에 불복했으며,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것이 내란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을 김대중에 의한 내란음모였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광주시위대를 헌법기관에 준하는 존재라 판결했고, 헌법기관으로서 이를 진압한 계엄군을 국가폭력집단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광주시민에 하루라도 빨리 질서를 찾아주려고 세웠던 조기진압 계획을 놓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 내란목적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저지른 신군부의 행위이므로 재진입작전은 내란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재판부는 5.18을 신군부가 일으킨 것이라 판결했지만 수사기록을 보아도 신군부와 5.18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수사기록을 보아도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주체는 신군부가 아니라 계엄사-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 통수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신군부가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대통령과 내각에 공포심을 갖게 한 행위이기 때문에 헌법기관을 협박한 행위가 됨으로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무장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광주시는 진압하지 말았어야 했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차단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의 판결인 것이다. 이러한 억지의 인민재판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판결문에 적힌 논리도 코미디 그 자체로 보인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해학적 억지들

판결1. “1980년 정승화가 합수부에서 했던 진술은 고문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무효다.” 이는 과거사위원회 들이 과거의 간첩사건을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 것이다. 그러나 수사기록을 연구해보면 정승화는 분명한 유죄로 판단된다.    

판결2. “정승화가 10.26밤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 한 것은 김재규가 권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고 한 법정진술은 설득력이 있다.” “정중히 대하라”는 명령을 “권총을 소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판결3. “12.12 밤, 최규하 대통령은 공관을 경계하는 경비 병력으로부터 공포감을 느꼈고, 밤 9시30분경에 찾아온 6명의 장군들로부터 공포감을 느껴 자유의사를 상실한 채 꼭두각시가 되어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결재를 해주었다.”

만일 최규하 대통령이 이 순간부터 장군들과 군 병력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면 그 후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 9개월 10일간 그야말로 군에 주눅이 들어 꼭두각시 노릇만 했다는 뜻이 된다. 이는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인격살인인 것이다. 대통령과 한 방에서 밤을 꼬박 새운 신현확 총리는 1996.7.1. 법정에 나와 장군들은 예의바르게 행동했고, 경계병이 밖에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대통령이 경비 병력에 주눅이 들고 6명의 장군들에게 주눅이 들어 장군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재가문서에 재가를 했다면 바로 6명의 장군들 앞에서 밤 10시경에 재가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밤을 새우면서 노재현을 기다렸다가 노재현이 재가서류를 가지고 오자 12.13.05:10경에 서명을 했다. 이 대목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고집이 세고, 고집을 관철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눅 들린 사람이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판결4. “12.12는‘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려고 사전 계획 하에 저지른 쿠데타 사건이다.”

30단에 있었던 9명의 장군들 중 하나회 장군은 노태우, 박준병, 박희도 3인 뿐이다. 최세창, 장기오, 백운택은 육사출신일 뿐이고,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는 육사를 나오지 않은 원로급 장성들이었다. 9명의 장군 중 3명만이 하나회 멤버였다. 또 쿠데타를 하려면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병력으로 시작할 것이지, 6명의 수사요원을 가지고 총장에게 가서 수사실로 가자고 조르는 쿠데타는 세상에 없다.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면 대통령 재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윤성민과 장태완이 병력을 출동시키고 난동을 부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초저녁에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을 것이다. 쿠데타의 주모자가 대통령에게 가서 재가를 요청하고, 대통령과 함께 노재현 장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대통령과 마주 앉아 시국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앉아있었으며, 새벽 5시까지 노재현 장관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기록들을 보면  30경비단에 모였던 9명의 장군들 중 정승화를 연행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노태우 한 사람 뿐이었다. 국가의‘최고자’였던 정승화를 연행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거사다. 이런 극비의 계획을 9사람이 모여 사전에 계획하였다면 이는 정신 나간 짓이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살해하는 것도 생명을 건 거사였다. 김재규는 신문조서에서“역사상 2인 이상이 사전에 모의한 거사가 성공한 예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사랑하는 두 비서(박선호, 박흥주)에게도 거사 30분 전에 곧바로 집행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판결5. “이학봉과 전두환이 사전에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학봉은 전두환의 부하다. 이학봉은 전두환에게 정총장의 연행조사를 여러 차례 건의했고, 전두환의 명령에 의해 연행계획을 수립했다. 업무수행을 놓고 재판부는 전두환과 이학봉이 쿠데타를 위해 사전 모의를 했다는 것이다.

판결6. “정승화가 전두환을 합수부장에서 해임시켜 동경사(동해안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전보 발령하려 하자 전두환이 선수를 쳐서 12월12일에 정승화를 불법 납치하였다.”

9명의 장군들이 전두환이라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전에 쿠데타를 모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과, 하나회 장교들이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사전에 모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두 가지 중 하나만 옳다고 해야지 두 가지 모두가 다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재판부는 이 두 개가 다 옳다고 판시한 것이다.  

이학봉의 반복된 건의에 의해 전두환이“그럼 연행하자”이렇게 결심한 날이 12월6일이었다. 정승화와 노재현이 골프를 치면서 전두환을 전보시키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날자는 12월9일이었다. 재판부 판결문에 의하면 12월9일에 나눈 이 대화를 점쟁이처럼 3일 전인 12월6일에 전두환이 알아가지고 선수를 쳐서 정승화를 연행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판결7. “5월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를 가결하기 위해 중앙청에 모인 총리와 장관들은 집총한 경비병들에 주눅이 들고 공포감에 싸여 만장일치로 가결했기에 무효다.”

대한민국 총리와 장관들은 비상시만 되면 주눅이 들고 공포에 싸인다는 뜻이다.

판결8. “10.26의 지역계엄을 5.17에 제주도에까지 확대한 것은 그 자체가 폭력이고, 그 폭력을 내란의 마음을 가슴속에 품은 신군부가 껍데기 대통령을 도구로 이용해 행사한 것이기 때문에 내란이다. 계엄령의 선포는 그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해악의 고지행위이고 계엄업무에서 총리와 내각을 제외시킴으로써 국민은 물론 총리 내각 등 헌법기관들까지도 공포감을 가지게 되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기에 계엄령 확대조치 자체가 내란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5.17 조치에서 가장 큰 것은 5월22일 전국적으로 폭력 시위를 벌여 최규하 과도 정부를 뒤엎겠다는 김대중과 그의 추종자들을 긴급체포한 것이다. 재판부는 김대중 등이 5월22일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일으키는 폭력시위를 그대로 두었어야 한다는 판결을 한 것이다.    

판결9.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지키기 위해 결집된 준 헌법기관이다” “광주시위대는 전두환의 내란음모로부터 헌법을 수호한 결집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가서까지 직접 챙긴 광주작전이긴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이 신군부의 5.18진압과정을 보고 놀라 공포감에 휩싸여 대통령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통령은 껍데기에 불과했기에 대통령 재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대통령이 서명한 것은 신군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다. 최규하는 어차피 바지이고, 바지에게는 처음부터 통치기능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런 바지가 5.17과 5.18 진압작전을 보고 새삼스럽게 통치기능을 잃었다고 판결한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준헌법기관에 해당하는 5.18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20사단 사단장 박준병에 무죄를 선고했다. 똑같이 광주사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박준병에게는 내란하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무죄가 되고, 신군부에는 내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유죄가 된다고 쓴 것이다. 순수한 군인 신분으로 5.18 시위를 진압한 것은 무죄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5.18 시위가 법시위라는 뜻이 암시돼 있는 것이다. 수시기록을 보면 신군부가 광주작전에 관여했다는 증거도 없고, 광주작전의 지휘계선 상에 있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광주 작전에 신군부가 개입한 바 없다고 잘라서 증언했다. 신군부의 마음을 관심법으로 보니 내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판결10.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법률도 아니고 헌법도 아닌 '자연법'에 의한다.”

현행법과 헌법으로는 이른바 신군부에게 유죄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자연법에 의해 유죄를 내렸다는 것이다. 자연법이라는 것은 사회인식법이요 이는 곧 여론법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인민재판인 것이다.

판결11.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데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착안하지 않은 분야들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서 건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망을 얻어 대통령에 오른 것에는 처음부터 반역의 뜻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법논리에 의하면 아이젠하워는 구주군 사령관으로 명성을 얻어 그 명성을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반역자가 되는 것이고, 맥아더는 아시아의 영웅이었지만 대통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역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기에 지혜를 짜내서 국가를 구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판결12. “정호용은 광주진압의 총사령관이라 내란목적살인죄의 주범이고, 12.12에는 직접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신군부 중의 한 사람으로 전두환을 추수하며 부하뇌동한 죄가 인정된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정호용은 12.12에도 관여한 바 없고, 5.18에도 관여한 바 없다.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단지 7개 공수여단을 전투준비상태로 양병하였고,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그가 거느리고 있던 3개 여단을 육군본부가 보내라는 곳으로 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3개공수여단은 육군본부가 명하는 대로 광주로 이동하여 광주지역의 작전을 관장하고 있던 31사단 사단장 정웅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그가 키우고 있는 병력을 정웅 소장에게 파견시켰을 뿐, 실제로 공수부대를 시위진압 작전에 투입시키고, 이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도록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정웅이었던 것이다. 과잉진압의 책임은 정호용에게 있는 게 아니라 정웅에게 있었다. 과잉진압의 원흉이 정웅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호용은 광주시위를 직접 진압한 바 없고, 정 웅과 박준병은 직접 진압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박준병 제20사단장이 광주시위를 진압한 것은 정당하고 판결했고 정웅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시했다. 똑같은 재판부가 정호용을 벌줄 때는 광주시위대가 준 헌법기관이라 해놓고, 박준병에 무죄를 줄 때에는 광주시위대가 진압돼야 할 불법집단이라 판결한 것이다.       



                                                     판결이 무효라고 생각하는 이유

1. 5.18특별법은 공소시효를 무시하자는 초헌법적 위헌작품이었다. 이것이 1995년 당시의 법조계의 지배적인 여론이었지만 헌법재판소는 김영삼에 아부하고 굴종하는 자세로 5.18특별별법의 위헌성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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