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의 정치관 (매우 중요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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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碧波郞 작성일14-07-19 15:50 조회1,944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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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입은 용(Der Verwundete Drache)’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글을 읽어보시면 대략 윤이상의 본래적인 정치철학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윤이상이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곤란한 지독한 빨갱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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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반일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중국과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나를 반일적으로 키우는 아버지의 교육 방법이었지요. 아버지 자신은 비정치적인 사람이고 세상사에 어두운 선비였습니다. 일을 하는데도 일본인과 일절 관계를 갖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경제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일본인이 넘쳐흘렀고 일본인은 우리나라의 주요 수입원인 농업과 어업, 말하자면 조선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인은 부지런하고 숫자도 많은 통영의 우리 조선인들을 마을 중심에서 주변으로 몰아내고 또 좋은 직종도 그들이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힘을 잃었습니다. (중략)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협력한 사람들조차도 반일적이었습니다. 특히 경찰도 그리고 나중에는 군대도요. 게다가 조선의 노인들은 거의 모두가 반일적이었습니다. 노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을 때의 일을 경험했고 일본인이 잔혹하게 탄압했던 1919년 독립 봉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략)”
“나는 조선인이고 애국자이고 그리고 음악가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정치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조국 재건에 있어 사회주의 쪽에서 무언가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말한 사회주의란 요즘 말로 하면 민족적,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정치의 훈련을 받지 않았고, 공산당에는 그것에 단련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은 나를 써먹을 수가 없었고 그저 사무실에 앉혀둘 뿐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제는 우리의 행정, 우리의 시장, 우리의 경찰서장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스스로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결국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위단을 만들어 일본인을 무력으로 몰아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평화롭고 그리고 조용한 민족이고 수천 년 동안 먼저 침략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화를 폭발시키면 잔혹해질 수도 있습니다.”
“일본 침략자에 대한 전쟁이라면 언제라도 참가했을 겁니다. 하지만 동포와 싸우는 데 끼여들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거라고 믿었거든요. 나는 내 민족끼리 벌이는 무서운 살육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당시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는 만주까지 진격하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트루먼과 1952년 11월에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전쟁 확대를 우려했고, 소련의 개입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분단되고, 국경선으로 휴전선이 남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늘 그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망명하여 그곳에서 일본 지배에 대항해 싸우고, 우리의 해방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가 위대한 애국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무능한 정치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기간에 나라를 엄청난 경제적 곤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한국전쟁이 그의 책임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분명한 정치적 구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북한국이 한국으로 침공하기 전에 한국군이 언젠가 북한으로 진군할 것이라고, 늘 그것도 아주 도발적으로 떠들어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그러한 선동적인 선전은 언젠가 적을 도발시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한국군이 북한으로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군이 한국으로 쳐들어오는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전까지는요. 그 쿠데타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다시 나의 정치적인 의식이 눈을 떴습니다. 그는 군인입니다. 한국군 중에는 이미 이승만 시대부터 많은 부패가 있었습니다. 고급 군인은 점차 부자가 되고 민중은 점점 가난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몇 안 되는 동료들과 함께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을 때 나는 자문해 보았습니다. 미국이 한국군을 감독하고 있을 터인데 몇 안 되는 군인이 어떻게 그런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미군에게 들키지 않고 박정희가 행동할 수 있는 전략기지가 전국 어디에 있을까?”
“박정희의 측근인 군인들 중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뿐 아니지요. 그 무리들은 박정희와 똑같이 일제 시대에 일본인 편에 서서 자기 민족과 싸웠던 자들이었습니다. 나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을 때, 친구들과 함께 독일에서 한국인 협회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그 곳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학생들이 많았고요. 우리들은 1년에 두 번 세미나를 열어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한국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정보가 다른 경로를 통해 우리 손에 들어왔고 한국에서 박정희와 그 군사정권에 의한 탄압이 증대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었습니다. 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1958년 여름, 내가 처음으로 다름슈타트의 국제음악 하기 강습회에 참가했을 때, 우리는 교육대학의 학생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급사를 하던 소녀는 동독에서 온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내게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코리아에서요”라고 말했지요. “남쪽에서요, 아니면 북쪽에서요?”라고 또 물었습니다. 그녀는 동독에서 왔는데, 그곳에 많은 북한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 북한 정부는 수천 명의 전쟁고아를 동구권 여러 나라로 보내 거기서 특별한 기술을 배우게 했습니다. (중략)
나는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남과 북이 갈린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북한 사람도 동포입니다. (중략) 나는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없지만,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늘 마음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살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1961년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가능한 빨리 군사정권에서 보통의, 요컨대 민주적으로 선택된 문민정부로 이관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궐기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1964년과 특히 1965년에 학생들은 박정희 개인이나 체제에 대해서라기보다 한일 조약에 대해 항의를 했습니다. 일찍이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두 나라 사이의 조약 - 그것은 평화를 위해서라고 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 대해 아무런 호의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통상 관계를 위해서, 투자를 위해서, 일본 산업의 재건을 위해서 한국이 필요해진 것이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더라도 세금은 아주 조금만 낸다든가, 아니면 전혀 낼 필요가 없었고, 일본처럼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단히 싼 노동력을 쓸 수 있었습니다. 한국 민중은 36년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해 얼마나 압박을 받아왔는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조선인이 싼 노동력으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고 또한 만주에서는 조국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빨치산들이 박해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 민중은 특히 박정희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천황의 추종자이고,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장교로서 일본군에 들어가 우리 민족과 싸웠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같은 일본화된 사람이 일본과 조약을 맺는다면 그것은 일본에 반대하기는 커녕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한민족에게는 불이익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조약은 실제 그 후에 정말로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박정희가 체결한 미국과의 조약도 같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민족이 우리 민족을 희생시켜 부를 쌓고, 우리들은 식민지로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데모를 한 사람들은 옳았지만, 그 데모는 유혈 탄압을 받았습니다. 감옥은 학생과 지식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1967년에 두 번째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국회의원 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선거가 부정 선거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 후보로는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김대중이었는데, 이길 가능성이 있었고 나중에 박정희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자기 정책이 바르다는 것을, 즉 반역자에게는 본 때를 보여준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1965년에 대규모 일제 검거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에 박정희는 비합법 정당인 ‘인민혁명당’이라는 공산주의자 지하운동을 적발했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박정희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이 일을 구실삼아 정부에 충성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체포했습니다.”
댓글목록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
윤이상이놈은 윤씨 가문에서 퇴출시켜야 할 놈!
아주 죄질이 나쁜 놈입니다.
김일성이 한테 갖은 혜택 다 받고 산 빨갱이 새끼가 남한에는 떵떵거리면서 가족이 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