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폭동세력의 22가지 주장 <--참고하시길 > (구)자유게시판(2012~2014)

본문 바로가기

System Club 시스템클럽

(구)자유게시판(2012~2014) 목록

5.18 폭동세력의 22가지 주장 <--참고하시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전야113 작성일14-07-15 01:42 조회1,744회 댓글4건

본문

5.18폭동 세력의 22개 주장
  
[주장 1]
5.18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 5.18은 1988년 초에 가동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로부터 처음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받았다. 1988년 11월부터 제13대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열어 진상규명에 나섰다.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30416164800533
●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대법원의 5.18 진압 혐의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란 평가가 점차 확고해졌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209892&categoryId=200000431

[주장 2]
5.18 최초 사망자는 5월20일 밤에 사망한 경찰이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구타후유증으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다. 5.18의 두번째 사망자는 19일 밤 10시 사망한 김안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망진단서, 사망자 검시 자료가 있다. 
● 5.18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주영복은 1996년 5월6일 열린 12.12 5.18 사건 7차공판에서 공수부대원이 시위 진압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5월19일 밤 들었다고 증언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 김경철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7Iv8Wfm.jpg
http://i.imgur.com/sVLaaLU.png

- 김안부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DVO907u.png

[주장 3]
광주시민이 먼저 무장해서 계엄군에 발포했다?
●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선제발포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하고, 금남로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뒤이다.
●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중략) 본격적으로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당시 군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논의했다. 5월21일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는 '전두환 각하: 초병에 대해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발포 후 계엄군에 의한 조준사격이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로 올라가 조준경이 달린 소총으로 시위대 맨 앞에 주동자를 향해 조준사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6007

[주장 4]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할 이유가 없다?
●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5.18항쟁 시기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이 신군부가 집권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일으킨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맞섰고, 공수부대의 과격한 진압에 희생됐기 때문이다.
●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1980년 5월 초부터 학생시위 과열을 명분으로 비상시국으로 몰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1980년 5월15일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령부는 김영삼, 김대중은 '국기문란', 김종필은 '부패혐의'로 잡아 가둔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집권 시나리오와 정치인 체포 계획은 비상계엄 확대를 명분으로 군병력을 국회의사당에 투입하고 정치인을 체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군 출신 인사로 채워진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정부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에서 세워졌으며, 실제로 신군부의 의도에 따라 정국 흐름이 진행됐다.
●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정부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강요했다. 정부가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군의 부당한 압력을 받았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절차를 밟지 않은 채 국회가 계엄군에 의해 무력으로 봉쇄한 가운데 선포됐기 때문에 불법이다. 신군부는 계엄 확대와 동시에 정치인 체포, 정치활동 금지 선포, 국회의사당 폐쇄 등 정치탄압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사전에 강도높은 시위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서울, 대전, 광주 등 주요 도시로 파견했다. 
●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 600여명의 계엄확대 반대 시위가 발생했는데, 공수부대가 무자비하게 전남대 학생이 일으킨 시위를 진압했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시위진압 광경을 지켜보던 광주시민이 분노하여 대거 시위에 참여한 것이 발단이 되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5.18 민주화운동을 강경진압한 신군부는 1980년 5월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1996년 1월 5.18 사건 검찰발표 요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46748
-1997
년 4월 5.18 사건 대법원 판결문 요지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70417161500243 

[주장 5]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판결이 존재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2004년 1월29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따라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1980년 판결은 취소가 되어 법적으로 무효다.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을 맡은 재판부는 '내란음모'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음모했거나 회동한 사실이 없고, 단순 정치이념을 같이하는 지식인과 종교인들끼리 회동해 순수한 민주회복을 위한 의사표시의 방법으로서 학생운동을 통해 국민여론에 반영토록 시도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행위는 방법이나 실력으로 보아 국헌을 문란하게 할 아무런 위험성이 없었고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의 목적과 범죄주체가 되는 집단이 특정되지 아니하는 등 공소는 부적법하다고 판결문을 통해 판시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무죄판결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176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021816

[주장 6]
민주화운동은 항상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
● 독립운동, 동학농민운동은 참여자가 무장했지만 운동이라고 부른다. 최근 아랍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시위대가 무장을 했지만 민주화를 추구하는 사건으로 인정받고 있다. 운동이라는 단어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노력'이라는 뜻으로 폭력 사용 여부와 무관하다.
● 비폭력적인 민주화운동이 바람직하다고 하나,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에 비폭력적으로 민주화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부는 모든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경진압에 나섰기 때문이다. 
●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 6.3항쟁, 부마항쟁, 6월항쟁 등 다른 주요 민주화운동도 어느정도 폭력성을 띠었다. 예를 들어 4.19 혁명 시기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하자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고에서 들고 나온 무기로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5.18 민주화운동 때 역시 계엄군이 발포하기 시작하니까 시민이 경찰서,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해서 맞섰던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시민은 정당하지 못한 공권력이 폭력을 행사하는 정도만큼 대응하여 폭력을 행사했다.
-4.19 혁명 시기 시위대의 무장투쟁 사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200209204008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40020920401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2100209103002


[주장 7]
최규하 반대 구호가 있었기 때문에 최규하 퇴진 시위에 불과하다?
● 1980년 5월18일 이전 광주시민은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평화시위를 했다. 5월17일 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선포를 기점으로 시위가 격렬하게 됐다. 광주시민은 누가, 어떤 의도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렸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 했지만 휴교령, 집회시위 금지로 기본권이 침해당했으며 군에 의한 정치인 체포나 시위진압 군대투입으로 정상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예감했다. 실제로 일련의 조치를 신군부가 주도했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비상계엄은 정부가 선포했으므로 시위 도중 정부나 대통령을 규탄하는 구호가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 민주화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항상 정치권 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학생운동권 세력은 사태의 근본적인 원흉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고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들이 배포한 유인물의 내용을 보면 최규하 정부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최규하 정부 내에서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득세하기 때문에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신군부가 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면 굳이 시위대가 최규하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을 규탄하는 민주시민회보 제10호
http://i.imgur.com/4nCEQaF.png
-껍데기 과도정부와 계엄당국을 규탄한다는 유인물
http://i.imgur.com/k9SQvfd.png

[주장 8]
 어떻게 꼭꼭 숨겨져 있던 무기고 38개를 모조리 털어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나?
● 19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이 있는 기업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전라남도의 경찰서, 파출소에 설치됐던 예비군 무기고만 해도 적어도 269개 이상이었으며, 5.18 민주화운동 도중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38개 무기고는 전체 무기고 수에 비하면 일부분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13822

[주장 9]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 5.18 당시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피아트 CM6614)이다. KM900은 궤도 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 장갑차이며, 핸들로 방향 조절을 할 수 있어 일반인이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군에서도 KM900 운전병은 기갑이 아닌 수송 병과(2816 경장갑차 운전)로 분류된다. 1980년 5월20일을 기점으로 버스기사, 트럭기사 수백명이 차량시위를 벌이면서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위대의 KM900 조종이 불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주장 10]
광주교도소가 습격당했다?
●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으며, 두 도로의 옆에 바로 붙어있어 통행이 빈번한 교통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 1980년 5월21일 19시 30분 계엄사령부는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의 모든 출입도로를 차단하는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그중 제3공수여단은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를 주둔지로 삼아 도로를 봉쇄했다.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주변 도로 위에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무장여부와 관계없이 통행하는 차량에 무차별 발포했다. 따라서 시민은 도로통과는 물론 접근조차 제대로 못했다. 이런 상황을 군 측은 '교도소 습격'이라고 왜곡했던 것이다.
-광주교도소 사진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
http://i.imgur.com/3TYpVaK.jpg 
● (1980년 당시 한도희 광주교도소장의 증언)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 (1995년 12월 검찰 현장조사 결과)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2900329101009
●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00쪽) 외곽도로 봉쇄작전 중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주장 11]
시위대가 쓰던 카빈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 제5공화국 시절 육군본부는 1982년 펴낸 '계엄사'를 통해 총상에 의한 사망자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 '계엄사'에 실린 이 내용은 총격에 의한 사망자 69%가 카빈에 맞아 사망했다는 표현으로 전환돼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계엄사'는 뒷받침할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1980년 6월 초 민군 합동 조사를 통해 작성된 보안사의 '광주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의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광주시청의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가 있다. 이 중에서 카빈에 의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수는 보안사 검시 자료에서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에서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에서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된 사망자는 8명이다. 5.18 사망자 검시자료의 출처는 아래와 같다.
-보안사 검시자료 출처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중 참고자료 부분
-광주시청 검시자료 출처 : 국가기록원 광주사태사망자철
-광주지검 검시자료 출처 :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주장 12]
신원미상 시신이 12구이며, 신원미상 시신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 2001년 광주광역시에서 실종자, 장기 가출자, 행방불명자 가족 282명의 유전자 대조작업을 벌여 신원미상 시신 11구 중에 6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권호영(당시 16세)·김기운(17세)·김남석(18세)·김준동(16세)·양민석(20세)·최숙일(21세)씨 등 6명의 시신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 나머지 5구의 시신 중에서도 40세 가량의 남자, 4세 가량의 남자아이, 목포에서 비무장 상태로 차량 위에서 시위하다 추락해서 사망한 남성 등 적어도 3구는 불순세력과 연관짓기 어렵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523084304765
-40
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cIM7D4E.png
-목포에서 차량 시위 도중 추락사한 23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2U0atGT.png
-
효덕동 뒷산에서 사망한 4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9xTOsfg.png
● 사망자, 실종자가 수백명이 되는 대형참사에서 모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30구,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6구인채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5.18 민주화운동의 신원미상자는 다른 사건에 비해 전혀 많은 편이 아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204080211729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21103031007344

[주장 13]
다이너마이트는 누가, 왜 설치를 했는가?
● 5.18 당시 이성전을 비롯한 화순광업소 직원 13명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잔혹하게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계엄군의 광주진입을 막아야 겠다는 마음에 화순광업소에 있는 폭약을 조립하여 5월21일 밤 전남도청에 있는 광주시민들에게 전달했다.
● 전남도청에서 폭약을 관리하던 신만식의 증언에 따르면 떡밥과 뇌관 결합 작업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과정으로 도화선을 연결하지 않아 실제로 폭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고 한다. 시민군 모두가 폭약이 실제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http://cafe.naver.com/enature/21

[주장 14]
 6.25유공자보다 5.18유공자 혜택이 더 많다?
● 6.25 유공자는 가족사망, 본인장애와 같은 피해사실이 있거나 보국훈장 이상 공훈기록이 있어 혜택이 많은 국가유공자, 참전했지만 피해사실이 없어 혜택이 덜한 참전유공자로 나눠진다. 5.18유공자는 단순히 시위에 참여했다고 지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사망, 본인장애, 구속 및 수감과 같은 피해사실이 있어야 유공자로 지정될 수 있다. 
● 같은 피해를 입었을 경우 6.25 유공자가 5.18 유공자보다 혜택이 좋다. 국가유공자와 달리 5.18 민주유공자는 매달 연금을 받지 않는다. 반면 국가유공자는 상이군경의 경우 매달 116만원~422만원, 전몰군경 유가족은 매달 48만원~143만원의 연금을 받고 있다. 국가유공자는 자녀 혹은 형제 1인에 한해 보충역 6개월 복무 병역혜택을 주지만 5.18민주유공자에게는 병역혜택이 전혀 없다.
● 6.25 국가유공자, 5.18 민주유공자, 6.25 참전유공자의 혜택을 비교하면 6.25 상이군경-6.25 전몰군경 유족-5.18부상자-5.18사망자 유족-5.18 관련 수감자-6.25참전유공자 순으로 많다고 할 수 있다. 5.18유공자 혜택이 더 많다는 오해는 피해사실이 존재하는 5.18민주유공자와 피해사실이 없는 6.25참전유공자를 비교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6.25 국가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사이트)
http://www.mpva.go.kr/support/support124.asp
-5.18
민주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사이트)
http://www.mpva.go.kr/support/support143.asp
-6.25
참전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사이트)
http://www.mpva.go.kr/support/support133.asp
-6.25유공자
, 5.18유공자의 혜택 비교표
http://i.imgur.com/8FhwF5P.png

[주장 15]
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조종했다는 근거다? 
●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영국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월북했다. 
●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라고 보기 어렵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20만여명 전부를 북한과 관련지어 매도할 수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6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7

[주장 16]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 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북한의 4.19혁명 기념식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20650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32746

-북한의 부마항쟁 기념식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80395
-북한의 6월항쟁 기념식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5622
●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주장 17]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 북한 특수부대가 5.18에 개입했다는 임천용의 증언은 북한군의 침투인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또한 임천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다. 
-임천용의 인터뷰 발언 정리 표
http://i.imgur.com/5c7Kyt0.png
●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7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임천용은 2006년 한국논단의 인터뷰에서는 계엄령 중이라 육지가 봉쇄되어 북한군이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으나, 2013년 TV조선 인터뷰에서는 북한군이 땅굴로 내려와서 육로로 이동하여 광주까지 내려왔다면서 자신의 예전 주장을 완전히 번복했다. 2007년 뉴스한국 인터뷰에서도 철수 과정에서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한 육지를 통해 이동하여 북한군 60~70명이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어갔다고 말한 바 있다.
침투 방법도 각각 다르다. 2006년에는 오직 배를 타고 침투했다고 했지만, 2007년부터는 잠수함 침투를 언급했고, 특히 2013년 TV조선의 남침땅굴 특집방송 때부터 땅굴 침투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
-2006
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TV
조선 인터뷰
http://vod.tv.chosun.com/vod/index_vod_detail.cstv?prog_id=C201200117&epis_sub_cnt=233 
● 2006년 임천용이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한 사망자의 시체 사진을 제시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1980년 5월22일 총에 맞아 쓰러진 외삼촌 손광식을 구하러 갔다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사망한 임정식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125614

[주장 18]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당시 상황을 TV에서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주장하는데, 1980년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서 수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5.18 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에 맞아 사망했다.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몇몇 탈북자는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면서 한 시신의 사진을 제시했는데, 5.18 사망자 검시자료에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가지고 왜곡한 것이다.
http://asegaew.egloos.com/3406357
● 2013년 5월15일 서울중앙지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짜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는 글을 작성한 보수논객에게 사자명예훼손 유죄를 선고하면서 "탈북자의 수기(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내용은 출처나 증언자들이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고 판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6&aid=0002155661

[주장 19]
 5.18 광주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 뉴데일리는 함경남도 청진시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면서 5.18과 관련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석 사진에는 5.18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없지만, 뉴데일리는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인민군영웅 렬사묘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청진시 출신 북한군을 추모하는 비석이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북한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도 높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355393
●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 국정원은 함경남도 청진에 있는 비석과 5.18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북한 정보원을 통해 현장조사를 했지만 묘비 속 이름들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 지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특수부대원의 이름을 나열하고 특수임무를 공개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523220310255

[주장 20]
황장엽이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쓴 메모가 있다?
● 2013년 4월 김용삼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TV조선을 통해 황장엽이 남긴 메모에 '광주학생문제는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삼은 해당 구절이 있는 메모를 공개하지 않았고, 언론보도에서도 그

댓글목록

토함산님의 댓글

토함산 작성일

허허허~그 어려운 자료를 구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전야113님의 댓글

전야113 작성일

知彼知己 百戰不殆;不知彼而知己,一勝一負;不知彼,不知己,每戰必敗
지피지기, 백전불태 ;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 부지피, 부지기, 매전필패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험하지 않다.
적을 모르되 나를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은 진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싸움마다 위태하다
--------

박정희주변에 차지철이 있듯이
여기 시스템크럽에도 차지철같은 인간들이 있다는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박근혜주변에 차지철이 있다는 걸 비판하면서도
실제 자신은 스스로 반성하고 자성하지 않으면 10년탑 도로아미 타불 입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은 선택적 증거로 만들어진
역사적 명제.주장은 결코 웃음거리 밖에 안된다는 걸 왜 모를까요 -
확실한 증거 없으면 재판에서도 판판이 깨어집니다
그런 깨어질 주장에 함께 가는 사람들도 조롱받게되니까요 -

댓글 너무 길었나요 ? 하하하하.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반역자의 땅】황 만유 저, 361페이지에 기록.
도서출판 삶과 꿈. 교보문고 판매 중, 출판 2002년 발행.
+++++++++++++++++++++1980.5.18 광주사태에 북괴군 124군 부대 참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북괴군 10년복무후 대한민국에 귀순. 2002년 당시 김대중 공산 괴뢰 정권 시절에 출판

지만원님의 댓글

지만원 작성일

모두 훑어보았습니다. 주장 1,2처럼 우리 측이 잘못 주장한 것들도 있고, 저쪽이 잘못 주장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5.18진실 규명에 핵심이 아닙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쌍방간에 무엇이 쟁점이 되고 있는지 잘 알았습니다.

(구)자유게시판(2012~2014) 목록

Total 25,367건 88 페이지
(구)자유게시판(2012~2014)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2757 박근혜 대통령은 양의 탈을 쓴 늑대 전략으로 가나 보다 댓글(1) 조고아제 2014-07-15 1762 31
22756 제주4.3 역대 폭도사령관들 - 5대 허영삼 비바람 2014-07-15 1578 15
22755 5·18 폭동 경고문! 댓글(1) 碧波郞 2014-07-15 1728 49
22754 【G박사뿐 만이 아닙니다.】 댓글(3) 가디언 2014-07-15 1717 22
22753 이도형대표: 김대중, 김일성돈 20만불아닌 4천만불 받… 댓글(1) 비전원 2014-07-15 1935 24
22752 KBS가 문창극이를 씹고 싶어 씹었겠나? 댓글(1) 경기병 2014-07-15 1678 22
22751 깽판 댓글(2) shrdi 2014-07-15 1725 27
22750 총알받이용 인사 댓글(1) 경기병 2014-07-15 1763 42
22749 새벽을 여는 여명의 시각 직전이 가장 어둡다. 댓글(1) 가디언 2014-07-15 1777 31
22748 누군가가 나서야 되는 핸드폰업체문제 kang 2014-07-15 1412 11
22747 이게 대한민국입니까? 댓글(1) 금강인 2014-07-15 2294 83
22746 미녀응원단? 성접대? 댓글(5) 경기병 2014-07-15 2123 54
22745 정부는 북한의 대남 和戰양면 전술책에 돈을 대지 말라 댓글(5) 경기병 2014-07-15 1781 47
22744 Korea’s Suggested Doctrine-Dr.… stallon 2014-07-15 1687 42
22743 문재인 비리를 밝히지 않는 이유 댓글(2) kh7366 2014-07-15 2795 24
22742 권은희 전 수사과장, `모해위증` 혐의로 검찰 고발돼 댓글(2) 海眼 2014-07-15 1860 58
22741 양승오 "박원순 아들 재검만 하면 끝날 일" 댓글(4) 海眼 2014-07-15 2101 72
22740 근래 몇 우익 사이트는 어데로 갔나? 댓글(1) 가디언 2014-07-15 1792 46
22739 땅굴안보 애국동지분들을 초대합니다 댓글(4) 루터한 2014-07-15 1780 43
열람중 5.18 폭동세력의 22가지 주장 <--참고하시길 댓글(4) 전야113 2014-07-15 1745 19
22737 시스템클럽의 회원님들에게. 댓글(1) 이름없는애국 2014-07-15 1762 35
22736 여기가 막대기 꽂는 땅입니까? 댓글(9) 최성령 2014-07-15 1796 47
22735 김정은 '셋째 뚱보' 영상 中國에서 인기폭발 현우 2014-07-15 1957 22
22734 뉴욕타임스 지국장 참회: 5.18은 김대중이 사주한 폭… 댓글(1) 비전원 2014-07-14 1867 41
22733 한국정치의 한없는 신비로움 경기병 2014-07-14 1769 16
22732 김대중이 살아서 박근혜 처럼 정치를 한다면... 댓글(1) 경기병 2014-07-14 1739 25
22731 제주4.3 역대 폭도사령관들 - 4대 고승옥 비바람 2014-07-14 1539 12
22730 새월호참사유가족들이 "시체팔이"에 농락 당하나?? 댓글(2) 장학포 2014-07-14 1729 20
22729 새월호참사 유가족들을 두고 벌이는 더러운 작태!! 댓글(8) 장학포 2014-07-14 2043 31
22728 암담한 길로만 가고있다!! 댓글(1) 장학포 2014-07-14 1619 23
게시물 검색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대표자 : 지만원 | Tel : 02-595-2563 | Fax : 02-595-2594
E-mail : j-m-y8282@hanmail.net / jmw327@gmail.com
Copyright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All rights reserved.  [ 관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