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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생도와 고향 여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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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3-08 09:44 조회6,6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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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관생도와 고향 여선생님

 

사관학교 3학년 겨울방학

고향에서 만난 여선생님과

나란히 밤길을 걸었다

동네 눈이 무서워

첫 만남에 밤 데이트를 한 것이다

며칠 전에 내린 눈에

약간의 발자국들이 나 있었다

 

행여 동네사람이 볼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닿을락 말락

간간이 가슴 뛰었다

앞에서 사람이 플래시를 흔들며 다가왔다

둘이는 반사적으로

언덕길 뒷면에 몸을 숨겼다

나는 눈 위에 누웠고

그녀는 내 위에 기댔다

색 색

그녀의 가쁜 숨결이 뺨으로 전달됐다

 

개울가를 걸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흰 눈이 뽀드득 소리를 냈다

숨 막히는 학교생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이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가슴 벅차했다

나의 팔을 잔뜩 잡아당겨

그녀의 어깨에 밀착시킨 채

어린애처럼 성큼 성큼 걸었다

노래도 불렀다

 

춥지요

그녀가 어깨를 떨었다

나의 손을 잡아다

그녀의 얇은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뼈마디 없는 섬섬옥수

손바닥 부드러운 살집이 경이로웠다

 

달빛이 눈빛에 반사되어

온 동네가 신비로운 동화마을처럼

뿌옇게 보였다

개울을 덮은 얼음이

속으로 흐르는 물에 스쳐

여기 저기 찢겨져 있었다

갖가지 모양의 어름조각들이

물살의 속삭임에 맞춰 너울거렸다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

발길을 돌렸다

둘이서 밟는 뽀드득 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간간히 그녀의 긴 머리카락들이

나의 뺨을 스쳤다

 

합의 절차도 없이

발길은 그녀의 토담 방을 향했다

맞은편 교장 선생님의 사택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의 입을 막고 벽으로 밀었다

교장 댁 문이 닫히자

둘이는 등을 벽에 등을 붙인 채

발을 수직으로 올렸다 내렸다

고양이 걸음을 했다

 

한 손으로는 벽을 더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의 손을 붙잡고

주위를 살피며 한 발작 한 발작 전진했다

이번에는 또 교장 댁 울타리에서

커다란 눈송이가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또 한 번 가슴이 얼어붙었다

한 배를 탄 위기의 순간들이

두 사람을 더욱 가깝게 했다

 

방바닥에는 열을 보호하기 위해

요와 이불이 이미 깔려져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 세웠다

그리고 입술을 내 귀에 바짝 대고

주의를 주었다

옆방에 남자 선생님이 있는데

책장 넘기는 소리까지 들린다 했다

 

그녀가 여유분의 파자마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이불 속에서 갈아입었다

요위에 배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그녀는 여러 장의 백지와 연필을 꺼냈다

전에 애인 있었어요

아니요

서로가 먼저 쓰겠다고 연필을 빼앗았다

추위에 오랫동안 노출됐던 터라

두 사람 모두 콧물을 흘렸다

그녀는 재빨리 두루마리 휴지를 잘라

나의 코를 눌러 콧물을 짜 주었다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소리가 사납게 울고

바람과 눈가루가 종이 창문을 마구 때렸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더욱 아늑한 행복감에 도취했다

밤이 순식간에 깊어갔다

뽀얗던 그녀의 눈가에

나른한 안개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주보던 자세는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화석처럼 보존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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