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을 무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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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3-08 10:49 조회6,4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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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무를 수만 있다면
사관학교를 졸업1한 지 1년
베트남 정글전에 투입됐다
햇볕은 여과 없이 내려 쬐고
얼굴은 빨갛게 익고
얼굴의 여기저기에는 생채기가 나있었다
3개의 수통에 담은 물
남에게 주지도 달라지도 말라 했다
오후 2시가 되자
물이 동나 버렸다
작업복이 소금가루에 하얗게 뒤덮였다
땀이 말라 소금이 된 것이다
입이 타들고 침조차 말라버렸다
바로 이때
50m 앞 발대로부터
날카롭게 째지는 총성이 울렸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부산항에 두고 온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이 순간을 다시 무를 수만 있다면!
세상 끝 절벽이었다
철수할 때의 기분은 세상 최고
막사라 해야
모래밭에 천막을 치고
베니어판을 얽어매 벽을 만든 것이었다
철수한 날
중대장은 소대장들을 불러 모았다
얼기 직전까지 냉장된 캔 맥주를 쌓아놓고
마음껏 마시라며 권했다
이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꿈인 것만 같았다
몇 번씩 살을 꼬집으면서
생시인지 꿈인지 확인했다
꼬집음의 아픔은 고통이 아니라
살아남았다는데 대한 희열이었다
전축에서는
문주란, 박재란, 현미, 정훈희의 히트곡들이 흘렀다
고국에서는 싫증나던 곡들이
이 순간에는 음의 마디마디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고국은
온갖 꿈과 희망이 담겨있는 어머니 품이었다
살아서 다시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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