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황혼기 인생은 광주폭력과의 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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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3-11 14:45 조회11,88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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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황혼기 인생은 광주폭력과의 전쟁기
한국현대사의 간판역사 ‘광주5.18사건’은 언터처블 성역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은 2018년 3월 11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는 서울 교외의 한 조그만 아파트. 바로 이 장소에서 나는 2002년 10월 22일 오후 4시, 갑자기 들이닥친 광주의 검사직원 1명과 광주서부경찰서 경찰 3명에 의해 수갑을 뒤로 채인 채 끌려 나갔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는 것인가? 18년 전인 2002년 8월 15일, 나는 한국의 대통령 김대중이 북한의 통치자 김정일의 총독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엮어 주요 일간지 2곳에 3,500자의 칼럼형 계몽광고를 냈다. 그 중에는 “광주 5.18은 순수한 시민들은 소수의 불순세력과 북한특수군이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라는 35자의 문장이 한 개 있었다.
이에 대해 광주 4개의 5.18단체들이 고소를 했다. “5.18은 성스러운 민주화운동이었는데 어째서 불순분자와 북한특수군이 개입했다는 것이냐, 용서할 수 없는 명예훼손이다“. 한국 근대사 최대의 역사사건에 대해 광주사람들과 다른 역사적 시각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5.18사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인구 80만이었던 광주에서 발생한 해방 후 최대의 무장폭동이었다. 1981년 4월 1일 한국의 대법원은 5.18사태를 ”김대중이 배후 조종한 내란 폭동사건“이었다고 판결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독재를 했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코너에 몰리게 되고 소위 386주사파들이 언론과 국회를 장악했다. 모두 북한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쓰나미에 편승하여 5.18사건이 재심 절차 없이 급조된 특별법에 의해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특별법은 헌법 위에 있었다. 한국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도 유린했다. 일명 북한식 ‘인민재판’이었다. 1997년 4월 17일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한 대법원은 1981년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었다. 5.18은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는데 전두환이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 내란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이 보유해온 팩트 뭉치는 1980년의 것이나 1995년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뒤바뀐 것은 오로지 판사의 판결 즉 그 팩트들에 대한 해석이었다. 결국 나의 죄는 1981년의 대법원 판결을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선진국 국민들은 내 이 말이 너무나 상상 밖이어서 잘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계의 독자들이 곧 내 말을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현 독재자 5.18
한국의 가옥들은 구두를 현관에 벗어놓고 맨발로 생활하도록 지어져 있다. 바닥의 먼지를 닦기 위해 늘 주부들이 걸레질을 한다. 그런 정결한 방에 차량 거리로 6시간 떨어진 한국의 남쪽 지방 광주로부터 온 체포조 4명은 구두를 신고 더러운 발자국을 내면서 들어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의 두 팔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법관이 발행했을 체포영장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내와 10세 전후의 남매 아이들이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깊은 상처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이틀 전인 2002년 8월 20일에는 광주에서 ‘5.18부상자’ 회장 김후식이 검은 유니폼을 입은 12명의 어깨들을 인솔하고 광주로부터 올라와 사무실을 부수고 아파트 대문과 차량을 부수고 이웃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 5.18깡패들 앞에서 경찰들은 겨우 나에게 피신하라 사전에 알려준 것뿐이었다. 당시는 김대중이 신이었고, 5.18은 가장 위력 있는 세도였다. 지금까지도 5.18이라는 명칭만 내 세우면 역대의 대통령들도 법관들도 정치인들도 숨을 죽여왔다. 은행에 가서 5.18의 이름으로 취직을 호령하면 은행은 그 요구를 받아주어야 했다. 지금의 한국에는 분명 독재자가 있고, 그 독재자는 5.18이다.
5.18민주화운동은 곧 5.18폭력지배운동
지금과 같은 인권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어떻게 감히 경제 10대 국인 대한민국에서 이런 비문명적 현상이 있을 수 있느냐, 선진국들에 사는 세계인들은 내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폭력사건이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아 손에 쥐고 있던 김대중이 대통령직에 있을 때 발생했다고 하면 나의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신뢰를 위해 나는 그 체포조들의 이름부터 밝힌다, 검사는 광주지방검찰청 615호실 최성필 검사였고, 체포조는 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수갑을 뒤로 채우면 단 10분을 견디기 어려워 할 것이다. 나도 그랬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 주거지로부터 6시간을 연행하면서 화장실 사용도 거부한 채 6시간 내내 번갈아가면서 내 얼굴과 머리를 쥐어박고 언어폭력을 가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생지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바로 이 시간이 내게는 생지옥이었다. 나는 소위로부터 대위까지 베트남전에 전투요원으로 참전했다. 그 때에도 이런 질 낮은 지옥은 없었다. 이 때 내 나이는 60세, 체포조의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을 깍듯이 존중한다는 한국의 유교풍습은 오간 데 없었다.
“니미씨발 좆같은 새끼야, 니놈이 어디라고 감히 5.18을 씨부려, 우익새끼들은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당께, 야 이 개새끼야, 네깟 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건드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챙겼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은 얼마나 챙겼냐, 부하 꽤나 잡아 쳐먹었을꺼다”
6시간 후 광주검찰청 615호실에 도착하니 최성필 검사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조사를 하는 또 다른 2시간 내낸 뒤로 채운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다. 최성필 검사의 이웃 검사로 보이는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합세했다.
“당신이 시스템공학 박사요 엥, 시스템공학이란 게 있당가, 어디서 학위를 받았소?, 처음 듣는 건디 이거 가짜 아냐? 좀 알아봐야 겠구만, 어이 좀 알아보소, 당신 눈에는 광주시민 전체가 빨갱이로 보이요? 광주가 아니었다면 한국에 무신 민주주의가 생겼겠소. 어림도 없재이 참말로 잉~”
저녁 식사를 하라면서 수갑을 풀어주었는데 손이 두껍게 부어올라 팔 자체를 들어 올릴 수 없었고,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는 물론 등판 전체가 손바닥 보다 더 두껍게 부어올라 아픔이 가시는 데만도 4개월 정도 걸렸다. 나는 서울 근교에 사는 사람이다. 한국의 형사소송법에는 분명 내가 나의 거주 지역을 관할하는 검찰로부터 입건이 되어야 하고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2002년 당시에는 광주와 5.18과 김대중이 법 위에 군림했다. 이는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광주법원은 서울에 사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쓴 회고록과 내가 쓴 책들에 대해 서울법원에서의 재판을 못하게 하고 광주법원으로 가져다 재판을 한다. 나에 대한 재판사건11개 중 5개를 광주법원이 가로채 재판을 했고 또 하고 있다. 전두환의 회고록과 내 책들이 5.18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2002년 내가 광주로 끌려가는 것을 촬영한 영상은 물론 없다. 그러나 광주의 폭력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영상들이 있다. 5.18단체들은 그들이 검사들과 판사들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나에게 11건의 소송을 냈다. 2016년 5월 19일은 그들이 낸 소송 11건 중의 한 사건이 처음으로 법원에서 심리하는 날이었다. 나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법정에 섰다. 재판장이 심리를 끝내고 내가 법정을 나가려는 순간 광주로부터 올라온 50여명의 폭도들이 나를 둘러싸고 20분 이상 집탄폭행을 가했다. 아래 사진들을 보면 내가 2016년에 집단 폭행을 그것도 법원에서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할 것이다. 내가 집단 폭행당하는 장면들은 여러 TV방송사들에 의해 여러 날 동안 방송됐다.
5.18단체들은 ‘민주화의 간판을 내걸고 한국사회 전체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사해왔다. 서울 강남의 초대형 교회인 서울교회도 담임목사가 설교도중 5.18은 북한군이 저지른 것이라는 말을 했다가 5.18단체들로부터 4회에 걸쳐 예배를 방해 당했다. 2013.1.경 나는 채널A와 TV조선에 출연하여 수사기록의 일부 자료들을 가지고 나가 1980.5.21. 폭동상황을 설명하면서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이 와서 저지른 폭동이라는 내용의 방송을 했다. 우측에 앉은 사람이 나였다.
이 내용들이 폭발적인 신뢰를 얻자, 두 방송국은 서로 경쟁적으로 탈북자 등을 출연시켜 5.18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내용을 방송하였다. 그리자 5.18단체들이 대거 몰려와 두 개의 방송국에 폭력행사를 가했다.
이와는 별도로 나는 지금 5.18단체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를 상대로 민사와 형사로 소나기 소송을 하여 매일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답변서를 쓰는 일로 77세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2018.3.11.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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