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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의 인연(나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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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7-11 09:41 조회9,3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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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과의 인연

 

               아태재단 정치학교 강사 

 

김대중에게는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대단하고, 일단 점을 찍으면 10고초려까지 한다는 것이 보기 드문 그의 장점이다. 1995, 채명신 전 주월사령부 사령관이 내게 해준 말이 있다. 그가 산프란시스코에 한동안 머물렀던 시기, 김대중이 일곱 차례나 찾아와 만났는데 함께 일을 하자고 졸랐다는 것이다. 참으로 끈질긴 사람이라고 했다.

 

 

1995년 초, 나는 안양 운동장 근방 작은 빌라촌에 살았다. 어느 날 내가 없는 사이, 김대중이 보낸 사람이 꿀 항아리와 30만원을 놓고 가면서 아태재단이 3개월 과정으로 정치지망생들을 양성하는 학교를 운영하는데 강사로 나와 달라는 메모를 남겼다. 아태재단에 나가는 강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원만한 사람들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사회에는 좌익 우익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영구분단 통일론으로 인기 강사 1

 

아태재단 정치지망생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들과 변호사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상대로 나의 통일 이론인 영구분단 통일론을 강의했다. 통일을 하려면 먼저 영구분단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강의내용의 요지였다. 모두가 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괴상한 이야기였다. 통일과 영구분단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인데 통일을 하려면 먼저 영구분단부터 해야 한다니!. 그래서 통일에 대한 내 이론은 패러독스로 들린다. 그러나 설명을 조금만 들어보면 사고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긍들을 한다.

 

1953년 휴전 이후부터 남북한 사이에는 군사적 긴장이 점증적으로 고조돼 왔다. 북한에서 통일을 강조하면 남한이 긴장하여 무기를 증강하고, 남에서 통일을 외치면 북한이 긴장하면서 군비를 증강시켜 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반도에서는 통일을 외치면 외칠수록 긴장만 고조돼 온 것이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100년이 가도 통일은 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땅덩이 하나를 두 아들에게 주면서 사이좋게 나눠가지라 하면 두 형제는 자기가 다 가져보려는 욕심을 가지고 끝없이 싸운다. 하지만 아버지가 땅을 두 쪽으로 나누어 등기를 설정해 나눠주면 두 아들은 사이좋게 지낸다. 한반도라는 땅덩이를 놓고 남북한의 두 존재는 서로가 상대방의 땅을 빼앗겠다고 한다. 이것이 통일이고, 통일에 대한 열망은 곧 긴장의 연속인 것이다. 6.25전쟁이 바로 이것이었고, 북한의 끝 없는 군사적 도발이 오로지 적화통일 목적에서 자행돼 온 것이 아니던가. 남한이 통일을 추구하면 북한도 추구하게 되고, 남한보다 훨씬 더 호전적이고, 이념 공격력이 매우 강한 북한이 통일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절대로 평화롭게 살 수 없다. 오늘날 남한 인구의 대다수가 적화이념에 사로잡힌 현상도 이 때문이 아니던가. 통일의 길이 열려 있으면 적화통일의 길도 열려 있게 된다. 양쪽 모두에게 통일의 길이 막혀 있어야 적화통일의 길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영구분단은 곧 평화정착의 근본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UN 레프리 하에 양측 군사력을 축소하고 두 개의 독립국가로 갈라서면 캐나다와 미국처럼 양쪽 주민들은 간첩혐의를 받지 않고도 비자를 가지고 왕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사실상의 통일이 아니겠는가.  

 

양쪽이 다 이런 식의 사실상의 통일을 원하면 내일이라도 통일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두 개의 수도를 하나로 합치고, 두 사람의 지휘자를 한 사람의 지휘자로 합치는 법률적 통일을 원한다면 긴장은 영원무궁토록 이어질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하나로 합친다고 생각해 보자. 도청을 전라도 땅에 두느냐, 경상도 땅에 두느냐를 놓고 양개주민은 아마도 낫을 들고 나와 싸울 것이다. 누가 도지사가 되느냐를 놓고는 더욱 더 격렬하게 싸울 것이다. 이런 분쟁을 왜 구태여 만들려 하는 것인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 몫이 보장된 상태에서 남의 것을 바라지 않고 살다 보면, 국경선은  마치 바닷가 모래 위에 써놓은 글씨처럼 세월과 하늘에 의해 지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구분단은 평화를 보장하지만 통일은 피를 부른다. 서독은 피를 흘리지 않고 통일이 되었다. 동독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독정권을 당시의 소련이 세웠고, 소련이 붕괴하자 동독정권도 붕괴된 것이었다. 하지만 남북한은 전혀 다르다. 양측이 서로 상대방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려는 욕심이 존재하는 한, 한반도에서의 평화통일은 천년이 가도 불가능하다. 실력도 없으면서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막연히 통일을 바라다가 어느 날 남한은 과거 월남처럼 간첩들에 의해 적화통일 당하는 날을 맞고야 말 것이다. 한국국민들의 가장 큰 고정관념은 '통일이 민족의 염원'이라 믿는 것이다. 이 고정관념이 평화를 쟁취하지 못하게 하는 암적 존재인 것이다. 영구분단만이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고, 남북한 주민이 평화롭게 오가면서 살게 되면 그것이 곧 통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되면 남북간의 국경선은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선의 의미 정도로 변화될 것이다. 

  

정치지망생들에게 나의 이 강의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신세계였다. 그래서 소문이 많이 났다. 학생들의 인기도 조사에서 내가 1위가 됐다. 모두가 신선한 충격이라고 말들 했다. 내가 1위가 되는 바람에 그 전까지 1위를 차지했던 임동원이 2위로 밀려났다. 3개월 과정이 끝나는 날 김대중은 학생간부들, 아태재단 간부들 그리고 강사들을 초청해 저녁 파티를 열었다. 20여명이 길게 늘어앉는 기다란 테이블에서 김대중은 내 자리를 자기 맞은편에 정해놓았다. 김대중의 양쪽에는 전 서울대 총장과 전 중앙대 총장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은 어쩐 일인지 얼어붙은 자세로 식시시간 내내 별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회식 자리에서는 내가 거칠 것 없는 매너로 독판을 쳤다. 시스템 이론에 대한 사례들과 사회병리현상들에 대한 내 진단내용들은 그들에게 처음 듣는 신기한 세상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가 재미있다며 많이 웃었고, 이것저것 많이 물었다. 헤어지면서 우연히도 나는 김대중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김대중이 나에게 명함을 한 장 달라했다.

 

          국제세미나에서의 기조연설

 

며칠 후 아태재단의 박 아무개라는 젊은 정치학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5월 어느 날 한국에서 가장 큰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한중 국제 세미나가 있는데 거기에서 기조연설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보좌진들이 기조연설 대상자로 전 총리, 전 부총리, 서울대, 연고대 전 총장들의 이름을 써다 주고 고르라 했더니 김대중이 모두의 이름에 X표를 긋더니 지만원이라 썼다고 했다. 나는 18분 동안의 연설 분량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리고 기조연설을 외워서 했다. 영구분단 통일론은 그 자리에서도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다 할 수 있느냐고들 했다. 그는 또 같은 해 10월에 북경에서 또 세미나가 있으니 영구분단 통일론을 중국에 가서도 발표해 달라 했다.

 

                   김대중의 말동무

 

1995년 1024일 오전 북경행 비행기 1등석을 탔다. 김대중은 자기 부인과 자리를 바꾸게 하여 나를 자기 옆에 앉으라 했다. 1024일부터 31일까지 나는 북경 조어대라는 영빈관에 그의 일행 20여명과 함께 머물렀다. 식사를 하거니 중국 고위 당간부들이 초청하는 식사 자리에서 언제나 김대중 옆자리에 앉아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1019, 평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을 폭로했다. 여론이 들끓던 시기에 김대중이 중국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1028, 김대중은 조어대에서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 기자들을 불러 자기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계동의 폭로와 김대중의 20억 발표는 미리 기획된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 술수 뛰어난 김영삼의 해국행위

 

국민들의 시선은 20억원 수수사실을 고백한 김대중을 향한 것이 아니라 김영삼에게 집중됐다. 정적인 김대중에 20억원을 주었다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도대체 몇 천 억원을 받았다는 말이냐. 김영삼의 처지가 참으로 어려워졌다. 김영삼이 탄핵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정치적 감이 뛰어나다는 김영삼이 찾아낸 생리학적 대안은 전두환과 노태우 모두를 감옥에 넣는 것이었다. “저 두 놈들, 쿠데타 해서 정권잡고 광주에서 양민학살 한 놈들이다. 당장 잡아 넣어라당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대단했다. 김영삼의 이 돌파구는 이런 국민적 정서에 먹혀들었다. 김영삼에게 날아오는 화살들을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날아가도록 한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두 전직 대통령은 마녀사냥을 당했다. 누구든 소설을 써서 기사로 올리면 무조건 사실로 인정되는 원시사회가 되었다.

 

                   5.18역사 뒤바꾼 국가코미디 

 

1981.1.23. 한국의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이 배후조종해 일으킨 내란폭동이라 판결했다. 1997.4.17. 한국의 대법원은 재심 절차 없이 헌법이 보장한 기판력을 뒤엎고 5.18역사를 다시 재판했다. 5.18은 전두환 등이 일으킨 내란이라는 것이다. 사실들(Facts)에 대한 검찰자료는 1980년의 것이나 1997년의 것이나 다 같았다. 역사가 뒤집힌 것은 사실에 의해 뒤집힌 것이 아니라 민주화의 탈을 쓴 판사들의 인민재판으로 뒤집힌 것이다. 판결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2성장군으로 보안사령관겸 계엄수사본부의 장이었던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이 시키는 일만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재들을 사방에서 불러보아 비상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들을 열심히 찾아내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사실은 정권을 한번 잡아보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5.17 비상계엄을 선포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는 고도의 정치군사적 판단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법부의 판단대상이 될 수 없지만 전두환의 마음에는 이미 집권을 해보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바지에 불과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선포한 5.17계엄은 그 자체로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조치였기 때문에 내란행위다”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다. 이를 무력으로 탄압한 전두환 등의 행위는 내란이다." 이런 기막힌 판결문도 있다. 몬도가네 식 이런 판결은 이것 말고도 12개가 더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은 냉혈의 순간들  

 

중국을 다녀 온 이후 김대중은 중국에 갔던  팀을 한 두 차례 챙겨 음식을 같이 했다. 중국에 갔던 사람들 중 김상현이 있다. 친화력이 대단한 그는 나를 아우라 불렀다. 그는 또 내가 졸업한 한영고등학교의 선배이기도 했다.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그는 나를 여러 차례 불러 여의도 만하탄 일식집에서 대화를 했다. 그는 나더러 장관을 한자리 하라 했다. 싫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 만나서는 한전 사장 같은 거라도 하라고 했다. 내가 그의 제의 모두를 사양한 것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 의한 것이었다. 자유인의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 싫었고, 창의력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고, 공직보다는 프리렌서로 사는 것이 훨씬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넓은 사회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매월 1천만원 이상의 벌이를 했다. 당시 장관 봉급은 400만원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공해가 바로 인간공해다. 나는 사람들과 얽혀 사는 것이 참으로 싫었다. 그러나 국정원 자문역할은 자유를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한동안 할 수 있었다. 

 

공직 자리라고 하면 2,000년 총선 때 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도 있었다. 이회창이 총재였고, 홍사덕이 부총재였을 때, 홍사덕이 과천 호프호텔로 나를 두 번 찾아왔다. 거래가격은 20억원인데 돈 한 푼 안 받고 전국구 의원자리를 줄테니 받으라고 했다. 나는 정치가 싫다고 했다. 며칠 후 그는 다시 찾아왔다. 백지수표를 가져왔는데 제일 좋은 직책이 정첵위 의장 자리라고 했다. 나는 정치가 싫다며 그를 또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이렇듯 끈질기게 자유인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촘촘하게 여러 가지 끈으로 포박돼 있다.

 

임동원, 그는 1998년 청와대 안보수석이 되자마자 경실련부터 찾아 강의를 했다. 그가 개발했다는 햇볕정책의 본질을 설명한 것이다. 나는 정신을 차려 그의 발표내용을 메모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임동원이 간첩급의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개성공단도 그 때에 발표됐다. 1999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1년에 몇 사람이 가든 무조건 50만명이 가는 것으로 하여 1인당 300달러씩 북한에 주었다. 금강상 독점사업권을 딴다며 현대에 9억 4,200만 달러를 주라 했다.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 두사람을 김정일의 앞잡이라 했다. 잡지와 인터넷에 글을 쓰고 강연도 했다. 이 때부터 김대중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임동원은 국정원장을 하면서 나를 집요하게 도청하고 뒤를 밟게 했다. 모든 기고활동 저작활동 강연활동을 차단시켰고, 지만원은 또라이라는 소문을 확산시켰다. 또라이를 상대했다가 봉변을 당할 수 있으니 지만원을 멀리해야 한다는 정서가 내가 속한 사회에 널리 형성됐다. 임동원은 국정원 차장 김은성과 제8국 인력을 동원하여 나를 집요하게 도청하고 뒤를 밟게 했다. 임동원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에는 "아무런 저항능력 없는 한 자연인 지만원을 장기간 도청했다" 것이 사전구속 이유로 적시돼 있다. 나는 그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를 제기했지만 겨우 2,000만원밖에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의 추악한 단면을 증거하는 매우 엄중한 불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짧은 기간을 같이 했지만 김대중은 나를 참으로 좋아했었다. 여러 경제수석, 총무수석, 안보수석을 차례로 내게 보내 식사도 대접해 주었다. 그런 그를 나는 단지 그가 빨갱이라고 판단된 순간에 가차 없이 공격한 것이다. 나를 향해 환히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다. 도청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오래 했던 국정원 제2차장 김은성은 검찰 조서에서 지만원은 이름도 없는 사람인데 어째서 김대중이 그토록 미워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임동원이 매일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지만원에 대해 알나낸 것이 무엇이냐고 닦달했다. 내 차장 임기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이 바로 임동원으로부터 매일 추궁당하는 일이었다이렇게 진술했다.

 

내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은 경우는 또 하나 있다. 김진홍 목사다. 그와 나와 고 제정구 의원은 한동안 매우 가까이 지냈다. 2005년 김진홍이 북한거류민증 소지자 제1호라는 것을 발견한 나는 곧바로 그가 빨갱이라고 발표했다. 나와 빨갱이는 그만큼 양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2018.7.1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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