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썩을 살, 아끼면 무엇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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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5:49 조회10,7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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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양구 21사단에 일시 배치됐다가 곧바로 광주로 내려가 4개월간의 고등군사반 과정을 마친 후, 화천의 855군단포병대대로 전속됐다. 겨울의 화천은 그야말로 시베리아였고 을씨년스러웠다. 민가 하숙집들은 대개 얇은 흙벽 건물이었다. 겨울에는 벽의 안쪽에도 두꺼운 성애가 쌓여 한 데나 다름없었다. 이불을 돌돌 말고 면장갑을 낀 채 쪼그려 앉아 덜덜 떨면서 신문을 읽어야 했다. 나는 한글신문 대신 영자신문을 구독했다. 월남에서 꾸준히 영문 단편소설들을 읽긴 했지만 신문을 읽으니 용어들부터 낯설었다. 첫 페이지를 읽는데도 한 시간이 걸렸다. 한 줄을 읽는 데에도 사전을 뒤져야 했다. 그렇게 하기를 6개월, 그 때부터는 영자신문을 읽는 편이 훨씬 편해졌다.
화천에서 6개월을 지내는 동안 나는 매 주말마다 서울로 외박을 나갔다. 당시 대대장님은 전반적으로 주말 외출을 통제해 왔지만, 내가 대대장님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외박을 나가는 바람에 다른 장교들의 외출에 대해서도 관대해졌다. “대대장님, 월남에서 지겹게 떨어져 살았는데 1주일에 하루는 가족과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이혼당합니다.” 이렇게 호소하는 데에야 대대장님도 어찌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전략정보과정에 대한 모집이 있었다. 10개월에 걸친 전략정보 교육과 집중적인 영어 훈련은 나에게 많은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다. 출퇴근 버스에서는 물론 휴일에도 꼬박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당시 나는 이태원 쪽 남산 1호 및 3호 터널 앞에 지어진 8평짜리 군인아파트에서 살았다. 공부하는 정신이 가상하다며 이웃집 선배 사모님들이 마실 것과 반찬과 간식거리를 만들어 넣어주었다. 영어과정 1등, 이로 인해 대위로서는 유일하게 합참 정보국에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국방부와 합참 전체를 통 털어 대위는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30여 개의 해외공관에 파견된 무관들을 상대로 파우치(외교행낭)를 주고받는 파우치 담당장교, 이른바 끗발 있는 직책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 직책에 있으면서 나는 많은 비밀문서를 읽을 수 있었고, 이는 상당한 공부가 됐다. 이 직책을 인계해 준 전임자도 사관학교 3년 선배였고, 2년 반 후에 내가 이 직책을 다시 인계해 준 후임자 역시 내가 사관학교 4학년 때 전방실습을 나갔다가 사귄 일반장교출신 소령이었다. 해외 무관들로부터 보내오는 비밀문서들은 합참 정보국 여러 부서들에 배부되는 것들이었다.
전임자는 사무실 한쪽에 기다란 테이블을 설치해 놓고 그 비밀서류들을 각 과별로 쌓아놓은 후, 10여 개 부서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비밀문서가 왔으니 빨리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선배 소령의 마음처럼 빨리빨리 움직여주는 부서는 별로 없었다. 비밀문서를 행여 분실할까 염려하여 점심식사도 제시간에 하러 나가지를 못했다. 배가 고픈 선배는 미처 문서들을 찾아가지 않은 부서들에 전화를 걸어 신경질을 냈고 이로 인해 때로는 말싸움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선배와 다른 부서 행정장교들 사이에는 감정이 악화돼 있었다. 인계인수가 끝나자마자 나는 마치 신문배달 소년처럼 비밀문서들을 옆구리에 끼고 각 층을 돌면서 배달해 주었다. 문서들을 앉아서 받는 행정장교들은 출신은 달라도 모두 다 선배들이었다. 내가 그들의 사무실에 나타나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강제로 붙들어 앉히며 이야기도 해주고 커피도 대접해 주었다. 이런 사이에 나보다 나이 먹은 선배들로부터 유익한 정보도 듣고 인심도 얻게 됐다.
나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죽으면 썩을 살, 아끼면 무엇 해”라는 말을 깊이 새겨들은 일이 있다. 내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수많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데 구태여 내 일, 네 일 따지며 싸워서 얻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내가 손해 본다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진리도 터득했다. 조금을 얻기 위해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미지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이 간단한 문서배달이 내게 준 이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국방부와 합참에서 나는 인기 좋은 대위가 됐고, 소문이 퍼지면서 지 대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급한 공문을 만들어야 할 경우 다른 부서 아가씨들에게 달려가면 언제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들은 다른 타자를 치다가도 내 일부터 해주곤 했다. 타자에 관한 한, 내 사무실, 다른 사무실이 따로 없었다. 대위를 달고 있었던 1972-74년 사이였다.
1974-75년 사이에 나는 미국에 가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국방부에 있는 PPBS실에서 생전 처음으로 육사 10년 선배인 대령 밑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그 선배와 나는 악연으로 만났다. 그 선배 때문에 예편도 생각했고, 그 선배로 인해 1년 반 동안 집단 따돌림의 생활도 했다. 아마도 나는 그 선배로부터 근무평정 점수를 최하로 받았을 것이다. 1977년 9월, 나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또 다시 도미했다. 바로 그 때 중령 진급 심사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파우치 담당장교로 일했던 그 시기에 대령들이었던 분들이 진급심사위원으로 차출되어 나를 진급시켰다 한다. 동기생들 가운데 극히 소수가 선발되는 특진 케이스였다. 선배 대령이 매긴 근무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지소령만은 여러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다며 중론을 모았다고 한다. “죽으면 썩을 살, 아끼면 무얼 해.” 이 가르침이 이루어낸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매주 2회씩 30여 개의 외교행낭(Diplomatic Pouch)을 꾸려야 했다. 밤늦도록 각 행낭에 서류를 집어넣고 문서목록을 작성하고 납으로 봉인하고 나면 손바닥이 벗겨지고 무좀도 생겼다. 그런데 파우치를 쌀 때마다 해군의 아주 어린 하사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도와주러 오겠다고 했다. 그는 해군본부 장성들의 심부름을 받아 일본에 나가 있던 해군 무관에게 부탁할 일들을 가지고 왔다. 그 작은 부탁들을 하기 위해 그는 대방동 해군본부에서 달려와 내가 하는 일을 도와준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부탁들은 별것 아니긴 해도 모두 기분 좋게 수용해 주었다. 대위와 하사 사이에 서로 의지하는 친구가 된 것이다. 반면 정작 부탁이 많은 육군 소령은 모든 부탁을 기분 상하는 식으로 해왔다. “이건 어느 장군의 지시사항인데…….” 내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장군으로부터 혼날 것이라는 암시였다. 진급이 걸려있는 영관급 장교들이라면 장군들 세계에서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어조의 부탁(?)을 잘 수용하겠지만 대위에 불과한 내게는 이러한 언어가 반발심만 불렀다.
파우치를 외국으로 내보내려면 항공수송업자와 거래를 해야 한다. 모 항공수송업체에는 미스 홍이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나는 과에서 가장 졸병인지라 할 일이 너무 많아 파우치 일을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미스 홍은 시간만 되면 정확하게 전화를 해주었다. 목소리가 그야말로 꾀꼬리 소리처럼 아름다웠고 윤기가 철철 넘쳤다. 아나운서 목소리보다 더 아름답고 발음도 정확했다. 각 파우치가 어느 항공기에 실려 무슨 항공편으로 어디어디를 경과하여 어느 날 몇 시에 어느 항공기 편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것을 불러주려면 한 시간 정도 통화해야 했다. 그녀의 외국어 발음은 참으로 훌륭했다. 지금이라면 팩스나 전자 메일로 할 수 있는 일을 당시에는 그렇게 목소리로 한 것이다. 통화내용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지만 통화를 시작할 때와 끝맺음할 때 주고받는 상냥한 인사가 너무 좋았고, 사무적인 목소리를 낼 때에도 그녀의 음성이 너무 듣기 좋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같은 사무실 선배들과 아가씨는 그녀에게서 전화가 올 때마다 애인한테서 전화 왔다며 실실 웃었다. 하지만 2년 반을 그렇게 했으면서도 나는 한 번도 미스 홍을 만나보지 못한 채 바쁜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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