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재판부를 재판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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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1-08 23:45 조회8,7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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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임동원으로부터 받은 야만의 박해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김대중, 그가 대통령을 할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김대중의 총애를 받는 임동원이 국정원장이되면서부터 나는 1999년 11월부터 2001년까지 끈질긴 집중도청을 당했다. 이 사실은 2005.11.17 매체마다 대서특필됐다. 특히 동아일보에는 나의 얼굴사진까지 올라 “지만원이 주요도청 대상자”이고 모두 1,800여명이 도청당했다고 보도했다. 국정원 제2차장이었던 김은성은 검찰조사에서 “어쩐 일인지 지만원은 DJ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고, 임동원은 수시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지만원에 대해 조사한 것이 뭐냐 등의 추궁을 받는 등 내 재임 기간중 지만원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사실 나는 김대중으로부터 많은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는 무슨 자리든 주겠다는 제안까지 여러 차례 받았다. 하지만 햇볕정책을 수행하고 봉이 김성달식 금강산 사업을 핑게로 북한에 합법을 가장하여 자금을 퍼부는 것을 보고 “저 사람 빨갱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부터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과 거래를 밀착 추적해 “백서”까지 만들었다. 이에 김대중과 임동원의 보이지 않는 박해가 있었지만 나는 2005년 11월 도청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1999년부터 갑자기 모든 신문들이 나에게 칼럼을 써달라 부탁하는 일이 일체 중단됐고, 2개월 동안 빼곡하게 받아놓은 대기업 강연 약속이 한순간에 취소됐고, 업체 경영진단 건도 취소됐다. 귀신이 곡할 일이었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정신적 공황이 엄습했다.
1990년대에 나는 방송, 신문에 프리마돈나가 되어 있었고, 대기업들로부터 강연이 쇄도했다. 대기업에 가면 기업 간부들이 현관에 도열하여 나를 맞았다. 이른바 VIP.강사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당시 장관 봉급이 400만원일 때 나는 강연료만 쳐도 월평균 1,000만원 이상을 벌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생활비가 들오는 것이었다. 일예로 1995.4.25 매일경제신문은 당시 민간기업연수원장들이 뽑은 10대 강사를 소개했고, 그 중에 내 이름이 있었다. 이들은 두뇌활동으로 연 억대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보도도 했다. 당시 나는주는 대로 받았지만 1시간 강연에 50-100만원을 받았다. 이런 활동이 1999년 단칼에 베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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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4.25 매일경제신문)
당시의 내 프로필이 이러했기에 김대중이 내게 접근해왔고, 나는 그가 요청에 의해 국제세미나에서 기조연설도 했고, 학술 세미나 차 중국에 가서 1주일 동안 같이 생활도 했고, 서울에서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설도 해주었다. 김대중과의 인연을 잠시 소개한다.
김대중과의 인연
나는 1991년 “70만 경영체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김영사)라는 처녀작을 발표하면서부터 언론에 뜨기 시작했다. 이 처녀작은 소설을 제치고 연 7주간 베스트 1위를 했다. 1991-1999년까지만 해도 나는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칼럼을 쓰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러는 나를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나이”라고 표현했고, 더러는 “장안의 지가를 높인 사나이”라는 평을 해주었다.
1994년 어느 날 아침 흥사단(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이 힐튼 호텔에서 열리는 아침 조찬강연에 나를 강연자로 초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김대중 당시 민주당 총재를 초청했다. 그 때에 나 나가보았다. 김대중의 강연은 그리 인상에 남지 않았다. 강연이 끝나고 김대중 총재가 나가는데 그와 악수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가 나가는 길에 늘어섰다. 나는 한 구석에서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김대중의 몸종 비서처럼 보이는 젊고 빨라 보이는 사람이 김대중을 내게 모셔와 인사를 시켰다. 이강래였다. "바로 이 분이 지만원 박사입니다". 김대중은 나를 유심히 보면서 악수를 청했다.
어느 날, 아태재단에서 내게 강연을 하나 부탁했다. 3개월 코스인 아태재단 정치 지망생들에 대한 강의였다. 나는 나가서 내가 창안한 통일 방안인 ‘영구분단 통일론’과 군사적 분석을 곁들여 90분간 강연을 했다. 박수를 많이 받았다. 얼마 후 내가 강연을 해준 클라스가 졸업을 한다며 졸업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마포 쪽에 있는 서교호텔, 김대중이가 긴 테이블의 가운데에 앉고 내 위치는 맨 가장자리였다. 파티에는 아태재단 간부들과 강사로 나갔던 교수들이었다. 나는 그 학기의 학생들이 뽑은 최고의 강사였다. 전에는 임동원이 1등이었는데 내가 가면서부터 내가 1등을 했다는 것이다.
파티에서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김대중과 마주 앉도록 자리를 재배치했다. 아마도 김대중의 지시였던 것 같다. 나는 각 분야의 부정과 비리 사례를 주저 없이 말해주었다.시 스템 이야기도 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모든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무척 재미있어 했다. 김대중이 내 얼굴을 보면서 "모든 분야에 다 나사가 풀렸군요"하고 말했다. 내 옆에는 서울대 총장을 했던 분, 중앙대 총장을 지낸 분이 앉아있었지만 웬 일인지 굳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서운 게 없는 아이처럼 마냥 이야기를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궁금한 것을 물었고 나는 그야말로 아무 거리낌 없이 종횡무진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날, 내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드디어 어느 분이 박정희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국가경영에 대한 시스템적 안목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내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대중은 “분배 문제에만 더 신경을 썼더라도 박대통령의 경제정책은 훌륭했을 것”이고 말했다.
헤어져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침 내가 탔던 엘리베이터에 김대중이 탔다. 그는 내게 명함을 하나 달라고 했다. 나는 "아, 죄송합니다. 명함이 떨어졌습니다"하면서 작은 전화번호부 수첩을 뒤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딱 한 장의 명함이 있었다. 그걸 건넸더니 아주 소중하다는 듯 간수했다.
1995년 5월,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한.중 국제세미나가 크게 열렸다. 아태제단 젊은 학자로부터 기조연설을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의 말은 이랬다. "사실, 기조연설은 무게가 있는 게 아닙니까. 저는 역대 총리급, 부총리급, 서울대-연고대 총장들의 이름을 16개 정도 올렸습니다. 김대중 총재님이 모두의 이름을 그으시더니 지만원 교수로 해라, 그 사람은 젊지만 시각이 새롭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지박사님이 선정된 것이니 잘 해 주십시오".
사실 기조연설은 일생에 한 번만이라도 해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미국 인사들의 정서다. 나는 그야말로 내용과 표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7분간 원고 없이 외워서 연설을 했다.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이어진 점심 식사 때에 나는 가장자리 테이블에 이종찬 의원과 함께 앉았다. 그런데 김대중이 나를 자기 옆으로 불러 앉혔다. 이휘호가 내 손을 잡아주면서 너무 잘했다며 좋아했다. 그 후 김대중은 사람을 시켜 내게 꿀 항아리를 하나 보내주었다. 당시 나는 안양 12평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다. 꿀 심부름을 한 사람이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해 하는 눈치였다. 아파트로 옮기기 직전이었다.
그 후 얼마 만에 다시 젊은 학자에서 전화가 왔다. 1995년 10월 24-31일간 중국에 가서 세미나를 하니 김대중이 나더러 똑 같은 강연을 또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나는 기꺼이 가겠다 했다. 1등 칸에서 나는 맨 뒷 자석에 앉았다. 그런데 김대중이 나를 그의 옆에 오라고 했다. 부인과 자리를 바꾼 것이다.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총재님, 저는 장관도 싫고 국회의원도 싫습니다. 저는 자유를 가장 사랑합니다. 지금처럼 프리랜서로 사는 게 가장 좋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진지하게 듣는 표정이었다.
중국에 간 학자는 나와 김태동 박사였다. 나는 정치-통일 분야를 발표했고, 김태동 박사는 경제를 발표했다. 나는 또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나는 중국 체류 1주일간 늘 김대중과 같은 헤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그는 참으로 아는 게 많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전두환을 김대중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10월 28일, 김대중은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기습적인 발표를 했다.
그 후 돌아와 김대중은 중요한 파티에 나를 불렀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는 "지교수,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며 묻곤 했다. 내 대답은 언제나 직설적이었다. 그 다음부터 김대중은 가는 곳마다 나를 칭찬했다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직전 어느 날 이종찬 의원이 나와 함께 총재에게 가자고 했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여러 곳에서 "나를 견제하는 두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가 당선됐다. 김상현 의원과 나는 한영고 선후배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는 친화력이 매우 좋았다. 그가 나를 두 번에 걸쳐 아침 조찬에 불렀다. 단 둘이 하는 조찬이었다. 장소는 여의도 만하탄 일식집, 그는 당시 위치가 아주 좋았다. "이보게 동생, 자네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해주게. 동생이 원하면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네". 나는 프리랜서로 살겠다고 예의 바르게 거절하면서 신정부의 100대 과제의 전시성과 경제적 몰락에 대해 우려부터 표했다. 1997년 7월 나는 "추락에서 도약으로, 시스템 요법"이라는 책을 내서 한국경제의 몰락을 예고했을 만큼 한국경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보게 동생, 아직 출범조차 하지 않았는데?". "바둑 10단과 1급이 바둑을 둡니다. 꼭 끝까지 두어봐야 알겠습니까? 신정부 100대 과제에는 시스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곧 경제가 망가지고 대량실업이 닥칠 것입니다". 그 후 나는 김상현씨에게 코리아나 호텔에서 경제의 시시템적 메커니즘에 대해 2시간 동안이나 강의를 헸다. "동생의 강론은 너무나 새롭네!".
나는 김대중 정부가 160조의 공적자금을 그렇게 쏟아 부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 경제적 붕괴는 공적자금의 효력이 있는 동안만큼 연기되겠지만 그 대신 일단 시작되면 그 폭풍이 더욱 거세질 것이었다.
그후 청와대 총무수석 박금옥씨가 나를 조선호텔 조찬에 초대했다. 그 때에도 나는 현 정책이 매우 잘못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후 김태동 경제수석이 나를 플라자호텔에 초대했다. 그 때에도 시스템 강연만 했다. 그 후 황원탁 수석이 프레지던트호텔에서 내게 식사를 제안했다. 그는 햇볕정책에 신들린 사람이었다. 임동원 이론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것을 보고 매우 실망했다. 2001년, 마지막으로 박지원씨가 내게 힐튼호텔에서 점심을 하자며 초대했다. 그때 나는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청와대 정책수석이 되었다.
박지원씨가 말하더라는 소리가 있다. 나이 80이 넘은 장군 출신들도 자기를 만나면 자리 하나 얻을까하고 애매한 말들을 하는데 지만원은 자기와 단둘이 만났는데도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공격했다. 지만원은 깨끗하기는 하더라.
이상이 내가 김대중씨와 쌓았던 인연의 전부였다. 나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정신적인 한량이었다. 김대중 역시 내게 다가왔다 간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정치를 잘 해주기를 바랬지 그로부터 얻고 싶은 게 없었다.
김대중의 경우에는 그가 간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난 것이다. 빅딜이니 워크아웃이니 하는 부정과 비리의 메커니즘을 만들어 돈을 거두어들이고, 북한에 대해 노골적인 애정을 보이면서부터 그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그로부터 얻고 싶었던 이익이 있었다면 그를 비판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권노갑, 한화갑 등 수많은 실세들로부터도 상당한 호감을 얻고 있었으니까.
나는 새 점부에서 참고하라는 듯에서 "국가개조35제"라는 국가경영 비전을 담은 책을 냈고, 이어서 2000년에도 새 정부에서 참고하라는 뜻에서 "한국호의 침몰"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경제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책을 냈다. 이 책은 일본어로도 번역돼 있다.
2000년 4월 총선이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이회창이었고, 부총재는 홍사덕이었다. 총선 직전 홍사덕이 과천 호프호텔 7층 커피숍으로 2차례 찾아와 나를 만났다. 전국구는 공정가가 20억인데 나에게는 한 푼도 받지 않을터이니 전국구 의원을 하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조직속에서 인간공해를 받는 것이 너무 싫어 군복을 벗은 사람이라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며칠 후 다시 찾아와 백지수표를 가져왔다며 내게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의 조직도를 보여주며 이 중 어느 조직이라도 하나 맡아달라고 했다. 정책위 의장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나는 그것마저 싫다고 했다. 홍사덕은 매우 서운해 하면서 돌아갔다.
2014.1.8.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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