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판부를 재판한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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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1-12 19:42 조회7,6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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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검찰의 린치행위
검찰에서 지금도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최성필 검사, 그러나 그가 나를 통해 남긴 족적은 영원히 5.18역사와 함께 세상에 기록될 것이다. 2002년 10월 22일, 16:00시, 최성필 검사실 조사계장 김용철이 광주 서부경찰서 순경 3명(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을 이끌고 내 아파트에 침입했다. 운동 후 샤워를 하고 팬티바람으로 있는 나를 옷도 입지 못하게 하면서 무작정 끌어내려 했다. 체포영장이라며 종이 조각과 “대검찰청”이라 쓰인 신분증을 눈앞에 슬쩍 스치게 하면서 자세히 좀 보자는 내 요구에 대해 “너 같은 새끼에게 이런 걸 왜 자세히 보여주냐”며 달려들어 팬티만 입은 나를 끌어냈다. 가족의 강력한 항의로 겉옷만 간신히 입힌 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뒤로 채웠다. 이 광경이 가슴에 각인된 가족과 아이들은 전라도 사람이라면 지금도 분노한다. 나를 뒷 좌석 가운데 앉힌 네 사람, 차안에서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다.
“니미씨팔 좇 같이,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씨발놈아, 니가 시장 5.18을 씨부렀당가, 네깟 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씨부러, 이 씨발 개새끼 가다가 목을 비틀어 파묻고 가야 한당께,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처먹었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은 얼마나 받아 챙겼냐, 부하 꽤나 잡아 쳐먹었을 거다. 이런 쥐새끼 같은 개새끼, 우익새끼들은 모조리 밟아 죽여 없애부러야 한당께. 너 이새끼 가다가 죽을 줄 알아, 너를 때려 죽여서 파묻어도 증거가 남냐? 증거가? . ."
자식뻘 되는 검찰 및 경찰들로부터 6시간 동안 차에 갇혀 들었던 욕의 대강이다. 6시간 동안 안양에서 광주로 호송되는 동안 수갑을 뒤로 채인 채 찰싹 찰싹 뺨도 맞고 머리도 수 없이 쥐어박혔다. 나는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송되는 동안 최성필 검사와 광주서부경찰서로부터 받는 전화였는지, 이들은 각기 전화를 받았다. “네, 김용철입니다” “네, 이일남입니다” “네 박찬수입니다” “네 이규행입니다. 예 박찬수입니다.”
수갑을 뒤로 채이면 보통 사람은 단 10분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생지옥의 아픔과 모욕 속에서 나는 수 없이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가슴에 적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 했다가 몰매를 맞았다. “야 이 씨발 개새끼야, 바지에 흥건히 싸부러, 좇대가리를 팍 뭉겨버리기 전에” 광주검찰청에 도착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 했더니 바짝 옆에 붙어 “이 씨발놈아 빨리 싸부러” 최성필 검사실의 또 다른 조사관(이름 모름)이 옆에 붙어 채근했다. 수갑을 뒤로 채였는지라 팔과 손가락이 퉁 퉁 부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빨리 싸부릴” 수 있겠는가?
최성필 검사가 나를 보더니 곧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삿대질을 했다. “당신이 뭘 알아, 당신 이회창에게서 얼마나 먹었어, 돈 벌려고 한 짓 아냐? 이 개새끼 수갑 풀어주지 말고 밤새워 조사해” 2시간 이상 더 수갑을 뒤로 체인 체 조사를 받았다. 수갑을 뒤로 채운 채 6시간을 이동하고 2시간 이상 조사를 받았다. 팔과 등이 손바닥 두께만큼 부어 올랐다. 그 부기는 거의 4개월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광주구치소 의무관은 어깨가 아프다며 약을 지으려는 나를 보더니 “이 사람들 왜 고소하지 않습니까? 변호사가 없습니까?” 딱하다는 듯 분노를 표시했다.
검사로 보이는 이웃 사무실 여성이 치마폭을 날리며 살랑살랑 최성필 검사실로 걸어 들어왔다.
“오미, 이 자가 지만원이라는 그자랑가 잉? 어이, 이 보소, 얼굴 좀 들어 보소 잉, 당신 눈에는 광주시민 전체가 빨갱이로 보이요? 당신 눈에는 여기 있는 우리가 빨갱이로 보이요? 이 자도 인간이랑가 잉~, 참말로라 잉, 광주가 아니었다면 한국에 무신 민주주의가 생겼겠소. 어림도 없재이 잉~ 이 보소, 당신이 시스템공학 박사요 엥? 시스템공학이란 게 있당가, 어디서 학위를 받았소? 처음 듣는 건디, 이거 가짜 아닝가벼, 좀 알아봐야 겠구만, 어이 좀 알아보소”
내가 광주지법에서 처음 만난 판사는 정경헌 부장판사(1957, 전남 함평), 그는 10월 24일에 영장실질심의를 진행했다. 그는 광주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내 변화를 맡은 서울 변호사들의 추천을 받아 나의 변론을 공동으로 맡았다. 당시 44에 불과한 정경헌 판사는 66세의 광주출신 이근무 변호인에게 “변호인은 광주 시민들에게 무슨 욕을 들으려고 서울 사람의 재판을 맡았소”라며 아버지 뻘 되는 선배 법조인에 모욕을 주었다. 이때 무료변론을 맡은 서울변호사는 임광규, 정기승, 강신옥, 이종순 변호사였다.
이근무 변호인이 나의 경력과 훈장 받은 사실들을 나열하자 “시끄럽소, 지저분한 신문은 집어치우시오”라고 또 한 차례 면박을 주었다. 이어서 정경현 판사는 나를 삼킬 듯 노려보면서 “당신이 광주에 대해 무얼 아요?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구속영장은 발부됩니다. 이상이오”
10월 30일,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다. 김용출 부장판사(1959년생 전남 장성)가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나의 형님도 아무런 죄 없이 계엄군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고초를 받고 왔소. 이런 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요?”
형사소송법 제15조는 지역정서가 작용하는 본 사건을 광주지법 이외의 다른 지역 법원으로 이송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필자의 서울지역 변호인들은 이 지역정서와 토지관할 권을 이유로 관할이전 신청을 3회씩이나 냈지만 광주지법은 이러한 법의 정신과 실정법을 무시했다. 대법원에 상고를 했지만 대법원은 광주에서 재판받는 것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대법관은 강신욱(재판장) 조무제(주심) 유지담, 손지열이었다.
내가 쓴 답변서들
광주구치소에 101일간(2002.10.22-2003.1.28) 있으면서 나는 볼펜을 가지고 5회의 답변서와 2회에 걸쳐 구속에 항의하는 항의서를 써서 냈다. 대표적인 문장만 아래에 발췌한다.
<11.3 제1회 답변서>
광주 최성필 검사는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습니다”라는 문구가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주장합니다. 주장의 유일한 근거는 논리와 자료가 아니라 단지 국회가 특별법을 만들어 5.18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할 것을 의결했다는 사실 자체뿐입니다. 검사의 주장대로라면 역대 국회가 의결한 것이면 모두가 ‘진실한 사실’이며, 이에 어긋나는 비판과 사관은 ‘허위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소가 웃을 전근대적인 주장입니다. 분서갱유의 암흑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연구는 학자가 하는 것이지 정치인들이 하는 게 아닙니다. 학자의 영역을 정치인들이 침범하는 것은 전체주의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현 대통령은 50여 년 전에 대법원에서 ‘좌익폭동’으로 판결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역사를 재평가하고 좌익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50여 년 전의 역사는 재평가해도 되고, 20여 년 전에 발생한 광주사태는 역사적 재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운동의 목표는 구호에 담겨있습니다. 당시의 구호들은 민주화운동 구호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주한미군을 몰아내자”, “보안법과 반공법을 철폐하라”, “공무원과 군발이를 몰아내자”, “사회주의 건설을 앞당기자”. 이들을 어찌 민주화구호라 할 수 있습니까?
<11.9 답변서>
피고인은 피고인의 표현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자료와 근거에 기초했다는 것을 재판부에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피고인만이 마련해둔 각종 형태의 자료 즉 컴퓨터, 문서, 복사물, 책자 등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 뽑아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교통사고나 사기사건 등과 같이 변호인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검찰과 피고인의 다툼에서 한 쪽의 손발은 풀어주고 다른 쪽의 손발은 묶어 놓은 채 경쟁을 하라는 것은 심히 불공정한 인권유린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재판의 승복력을 잃는 부끄러운 행위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구속 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더구나 감정대립의 당사자인 광주가 장기간 구속 수감한 채 불공정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은 ‘앞으로 누구든 광주를 건드리면 본떼를 보여주겠다는 대국민 협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위에 광주공화국이 군림한다는 느낌을 정말로 지울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광주의 원칙‘이 아닌 ’대한민국의 원칙‘에 따라 대우받기를 원합니다.
< 2002.11.27 답변서>
행실이 고와야 양반이라 합니다. 광주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면 하는 행동도 양반다워야 합니다. 권위와 명예는 남이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광주 역사 역시 외부자 시각으로 써야 객관성과 승복력이 있습니다. 지금 지내놓고 보니 광주의 민주화는 남이 인정해 준 게 아니라 광주인들이 피고인에게 보여준 바의 폭력-린치-세도에 의해 탈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 2002. 12. 2. 답변서>
학자의 역사관을 법정에 세운다는 것은 민주주의 시대가 갑자기 ‘분서갱유’의 암흑시대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본 사건은 누가 봐도 ‘학자의 객관적 사관’과 ‘호남인들의 주관적 감정’간의 정면 대결입니다. 비록 법복을 입기는 했지만 호남출신 판사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호남정서를 가진 호남인들에 틀림 없으며, 광주지법 법관들의 감정적인 지역정서는 이미 4명의 법관(체포영장 발부 판사, 구속영장발부판사, 영장실질심리 판사, 구속적부심 판사)들에 의해 노골화되어, 신성해야 할 법정에서까지 피고인을 감정적으로 공격한 사실에 명확히 증명된 바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법관기피 신청이나 법원기피 신청의 사유가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형사소송법 제15조는 본 사건을 광주지법 이외의 다른 지역 법원으로 이송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놀랍게도 광주지법은 이러한 법의 정신과 실정법을 유린한 채, 재판의 권위와 승복력을 스스로 허물고 있습니다.
본건의 사건 번호는 ‘고단’으로 분류된 단독사건이었으나 2002.11.27에 갑자기 합의부를 형성하여 다루게 한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 불거지는 객관성 문제에 대해 광주지법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짐작케 하며, 1명의 판사가 아니라 3명의 판사들이 ‘신중하게’ 다루었다는 겉모양새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본 건을 맡은 합의부 재판관 3분(재판장: 전성수 조재건 윤영훈)은 모두 호남인으로 알려져 잇습니다. 법은 양심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객관적 사실이 남 보기 좋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양심이 불량해 보니는데 속에 있는 법관의 양심을 믿으라구요? 합의부 세분의 판사들께서 호남정서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는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의해 판가름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합의부를 3인이 아니라 30인으로 구성한다 해도 그 판결문은 호남정서로 작성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광주는 이미 피고인을 잡아다 구속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지법은 어떻게 해서든 장기구속에 상응하는 형량을 주어야 대외적으로 장기구속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타 지역 법원으로 이송하면, 처음부터 무죄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렇게 되면 광주는 그야말로 세인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해 보입니다.
그래서 광주는 여러 가지 무리수를 감수하면서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억지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분노하는 분쟁 당사자인 광주시민들이 법복만 갈아입고 분쟁의 다른 당사자를 재판한다는 것’이 도대체 광주지법의 상식인지 4,700만 국민을 향해 소리쳐 묻고 싶습니다.
글로서 활동이 많고 연설로 활동이 많다보면 간혹 실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설사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인민군이 아닌 이상 대한민국 국가 안보의 선두진영에 서있는 피고인을 이렇듯 적대시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동물에게도 차마 할 수 없는 학대와 만행을 공공연히 저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피고인은 아주 잔인한 인신매매단에 납치돼온 심정이며, 낯선 괴한들에게 강간당한 규수의 심정이 아마 피고인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나 국민은 ‘쿠데타군’과 ‘진압군’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나회 등 전두환을 따르는 일부 정치장교들이 이끌었던 수경사나 9사단 등은 ‘쿠데타군’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찰마저 포기하고 물러선 광주의 무질서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진압군’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간 신정한 관군이지 결코 전두환의 사병이 아닙니다.
‘진압군’을 전두환의 사병이요 ‘반란군’으로 부르는 것은 한국군 전체에 대한 명예훼손입니다. 왜냐 하면 당시의 70만 한국군은 그 어느 부대이건 상관없이 명령만 내리면 광주로 내려가야 했고, 광주로 갔다면 그들 역시 ‘반란군’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이 어찌 70만 한국군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당시의 광주 ‘진압군’은 전두환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녕과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간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사태 이전인 12.12 쿠데타로 이미 창출돼 있었습니다. ‘진압군’을 광주에 보내기 위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각료화의를 여러 번 주재했고, 국방장관이 전군지휘관 회의를 열어 장시간 고뇌한 증거가 회의록에 담겨 있습니다. 이를 어찌 내란군이라 할 수 있습니까?
당시 군은 호남출신 영관장교들을 선발하여 C-54라는 대형 수송기 2대에 실어 광주로 보내 선무활동을 벌이게 했습니다. 광주에 무질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압군도 없었을 것이며, 경찰이 진압만 할 수 있었어도 진압군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상은 행여 소위 ‘반란군론’ 하나만 가지고 피고인측이 제출하는 자료들을 법정이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기술하였습니다.
광주법원의 판결
판결문의 요지는 “5.18은 비상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등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벌인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5.18특별법이 규정해놓고 보상법으로 부상도 받고 있는데 사망한 자들이 마치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에 의하여 선동되어 일으킨 폭동인 것처럼 허위로 묘사하여 사자와 생자의 명예를 다 같이 훼손했다”는 것이다.
1심재판장은 전성수, 2심 재판장은 박삼봉이었다. 한마디로 5.18이 전두환의 내란을 분쇄하여 헌정질서를 수호하려고 일어난 성스러운 운동이고, 여기에는 불순세력과 북한특수군이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는 건방진 판결문이었다.
2014.1.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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