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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탄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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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5:59 조회11,1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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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급 초급 지휘관은 매월 1회씩 병사와 신상면담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우기 철이 오기 전에 벙커 식 내무반 8개동과 상황실 및 포대장 벙커의 건축을 서둘러 끝내야 하는 병사들을 불러 가족사항으로부터 애로사항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묻는다는 건 짜증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규정이라 해도 나는 1년 내내 병사들을 개별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이 쓰는 편지를 보기로 했다. 들어오는 편지는 개봉할 수 없어도 나가는 편지는 보안검열의 대상이 됐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보안검열을 하사관에게 맡겼다. 숫자가 담겨 졌는가만 체크한 후 편지를 봉해서 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나는 편지 읽는 일을 스스로 맡아 했다. 개인별로 신상 파일을 만들어 놓고, 편지내용과 수신인과의 관계를 메모했다. 오는 편지는 주소와 성명만 메모했다. 한두 개의 편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많이 모이니까 신상파악이 제대로 됐다. 신상면담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사실들과 느낌들이 시시각각 들어 있었다. 트럭 운전병이 면허증 갱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옛날 면허증은 쉽게 따지는 것도 아닌데다, 3년마다 갱신해야 했다. 시한을 넘으면 면허증 자체가 취소됐다. 이를 회복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지옥 같은 획득 과정을 거치면서 돈을 써야 했다. 그런데 그 갱신 기간이 파월 기간 중에 걸려 있으니 얼마나 걱정이 됐겠는가? 나는 경남 도지사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썼다. “전투에 전념해야 할 병사가 이런 일에 마음을 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고국의 모든 국민이 파월장병들을 위로합니다. 매일같이 편지와 위문품을 보내주십니다. 존경하는 도지사님, 이 병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대위의 간절한 소망에 도지사가 매우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주었다. 도지사의 서명날인이 들어 있는 그 편지를 고이 간직했다가 귀국해서 운수교통과에 제시하면 무조건 갱신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당번병을 통해 그 병사에게 전달했다. 생색내는 것이 싫어서였다. 또 다른 편지를 읽어보니 중태에 빠진 어머니를 걱정하는 병사가 있었다. 그를 위해 대대장께 특별휴가를 부탁했다. 주월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보잉 707 여객기의 좌석 하나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 병사를 불렀다.

“어머님이 몹시 아프시다며? 자네, 독자라고 했지?”

“…….”

병사는 눈만 크게 떴다.

“차를 내 줄 테니 대대본부 인사과로 가봐. 보름간의 휴가다. 사이공까지 가면 고국에 가는 보잉 707 여객기를 탈 수 있어. 모래 오전 11시에 떠나는 보잉기에 자네 자리를 마련했어. 잘 갔다 와.”

나는 그에게 20달러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포대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996년 어느 날 나는 수원 소재의 경기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에 특강을 나간 적이 있었다. 앞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학생이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그는 자기의 이름을 댔다. 바로 이렇게 휴가를 보내주었던 부하였다. 그는 지금은 귀뚜라미 보일러 대리점을 많이 가진 부자가 됐다고 했다. 그날, 그는 내게 동원참치 스페셜과 술을 대접하며 이런 말을 했다. “포대장님, 그때는 참 크게 보이시더군요. 패기의 화신이셨죠.” 당시 47kg의 바싹 마른 체구가 그때 당시의 병사들 눈에는 크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또 다른 병사는 내게 많은 보약을 만들어 주고 금전적 지원도 하고 있다. 또 다른 병사는 논산에서 쌀을 보내고 인삼을 보내주고 있다.


또 다른 편지를 읽었다. 태권도 5단인 박병장이 갑자기 세상을 비관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에 쾌활하던 녀석이 왜 그럴까?……혹시…?'

나는 위생병을 불렀다.

“어이, 김상병. 박병장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볼래? 그 녀석 혹시 말 못할 병 걸린 거 아닌지 말야. 내가 그러더란 말은 하지 말고. 눈치 못 채게 물어봐.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곧 보고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위생병이 다시 왔다. 눈이 커다래 가지고.,

“맞습니다. 그런데 포대장님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셨습니까?”

“얼마나 심하디?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건 자네 책임이야. 교육 좀 시켜.”

나는 연대 군의관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그 녀석으로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명약(?)을 구해 위생병에게 건네주었다. 포대장이 구해줬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런 조치가 취해질 때마다 소문은 그날로 모든 병사들에 퍼졌다. 포대장은 자기들과 일일이 대화하지 않고서도 병사들의 행동과 애로를 귀신처럼 꿰뚫어보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리고 포대장이 병사들에게 일일이 생색내지 않고 애로를 해결해 주듯이 그들 역시 포대장에게 생색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일을 찾아 했다. 하루는 연대 기지에서 보급품을 수령해오던 병사가 헌병 초소에서 뺨을 맞고 왔다. 인사계와 중위가 쉬쉬하며 소곤거리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뭐야?”

“아, 포대장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가 맞았다구? 어서 말해봐.”

“김병장이 연대 헌병 초소에서 C-레이션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뺨을 맞고 왔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김병장을 불러와.”

“포대장님, 졸병들은 원래 다니면서 헌병에게 맞게 돼 있습니다. 예사로운 걸 가지고 무얼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진정하십시오.”

2년 후배인 중위의 말이었다. 그는 후에 2성장군으로 예편했다. 나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났다.  나는 우람하게 생긴 15명의 고참들에 총을 장전시킨 후 트럭에 태웠다. 날은 벌써 어두웠다. 트럭을 타고 가다가 베트콩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연대 정문 헌병대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세웠다. 

“야, 이 헌병 놈들 포위해.”

헌병들이 덜덜 떨었다. 뺨을 맞은 김병장을 앞으로 내세웠다.

“어느 놈이야, 나와.”

“접니다.”

“너, 임마 계급이 뭐야?”

“네, 상병입니다.”

“오라, 너 바로 하극상을 저질렀구나. 너 내일 영창에 넣을 꺼다.”

겁이 나자 그 녀석은 다시는 안 그럴 테니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한동안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다.

“야, 사단 헌병대장에게 전화 걸어.”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퇴근해 버렸다. 헌병 세 녀석 모두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비는 모습을 보는 병사들의 얼굴에 만족감이 흘렀다. 남의 부하들에게 혼만 내주고 그냥 돌아서 온다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져갔던 C-레이션 5개 박스를 던져 주면서 앞으로 필요하면 병사들에게 달라하지 말고 내게 직접 전화하라고 말했다. C-레이선 1개 박스는 당시 시중에서 5달러에 거래됐다. 그 후부터 녀석들은 우리 포대 차번호 ‘30포 2-’자만 보면 무사 통과시켰다. 이는 모든 병사들에게 신나는 무용담이 됐다.


분대장 이상과의 간부회의가 매일 2시간씩 계속됐다. 첫 번째 회의는 “어떤 내무반을 지어야 하는가”가 의제였다. 베트콩의 박격포 공세 때문에 내무반은 지붕을 지면과 일치하도록 땅에 묻으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다. 빨간 진흙 속에 내무반을 지붕까지 묻으면 더위에 숨이 막히고 냄새가 나며 우기에는 습기가 차고, 마루 밑에서 물이 솟아 밤새내 물을 퍼내야 했다. 아무리 상부의 명령이라지만 이러한 내무반에서는 나도 살기 싫었다. 밤늦도록 나는 병사들이 남기고 간 작업장에 쪼그리고 앉아 궁리를 했다. 이틀만의 궁리 끝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물을 퍼내지 않으려면 물이 마루 밑에서 자동적으로 흘러나가도록 해야 했다.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바닥을 좌우로 수평이 되도록 판다. 그런데 나는 가로와 세로가 다 같이 한쪽 귀퉁이로 기울어지도록 땅을 팔 생각을 했다. 네 개의 코너 중에서 한 개의 코너를 향해 물이 흐르도록 경사지게 파는 것이었다. 마루 밑에서 샘물처럼 솟아난 흙물은 가장 낮은 한쪽 코너를 향해 내려갈 것이고, 거기에 드럼통을 묻으면 맹물은 위에 뜨고 흙은 가라앉게 된다. 맹물은 파이프를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배수시키고, 흙은 가끔씩 마루 뚜껑을 열어 퍼내면 될 일이었다.


쾌적한 내무반, 바람도 잘 통하고 채광도 잘 되고 시원한 내무반을 짓기 위해서는 벽의 50%만 땅에 묻기로 작정했다. 병사를 박격포 파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철판과 흙으로 덮인 튼튼한 지붕을 벽에서 3m 정도 길게 내뽑기로 작정했다. 지붕 위에 떨어지는 박격포는 모두 안전할 것이다. 지붕 밖에 떨어지는 포탄의 파편이 내무반에 들어오려면 3m의 거리를 수평으로 이동해서 직각으로 낙하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동하는 파편은 없다. 지붕 하나만 넓게 빼면 내무반의 50%만 땅에 묻어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리고 신이 났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지시하면 병사들은 피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다음날 회의에 이 문제를 회부했다. “내무반을 지금 짓는 방식대로 지으면 우기 철에 마루 밑에서 샘이 솟는다. 그러면 밤새내 물을 퍼내야 한다. 물을 퍼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집을 지을 수는 없을까?” “그런 방법이 있으면 다른 부대에서 벌써 했게요?” 좀 늙어 보이는 상사가 가소롭다는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기분이 좀 상했지만 모른 체 했다. “방법이 있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책도 있다. 반드시 있으니 찾아내야 한다. 자, 우리 분대장들 중에 누가 먼저 말해 볼까?” 내 눈이 가는 데마다 하사들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얼굴을 숙였다. “야, 맥주 한 깡씩만 가져와라. 커피 좀 끓여오고. 마시고 나면 말해야 해” 10여분 후에 제2분대장을 지명했다. 그는 말을 약간 더듬어서 고문관으로 불렸다. 그가 얼떨결에 한참 중얼거렸다.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중사가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니는 마, 좀 알아 묵도록 말해라. 도대체 무슨 말인겨?” “아 아, 김중사, 여기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모두 다 편하게 말하는 대화의 장소입니다. 2분대장 말을 들으니 나는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가 한 말 중에서 살릴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를 찾아내 내가 생각해낸 방안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듣기에도 그럴 듯한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마 맞습니다. 포 포 포대장님, 바로 그런 말인데 제가 말하는 게 서툴렀습니다. 감사합니다. 포 포 포대장님.” 나는 김중사를 돌아봤다. “거 봐요. 김중사, 2분대장이 일리 있는 말을 했잖아요.” 나는 그 하사에게 여러 번 발표 내용을 따라하게 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알아듣겠나?” “예, 알아먹겠습니다.” 이 얼마나 멀고 먼 길인가? 나는 토의가 막힐 때마다 힌트를 주면서 하사들을 표 나지 않게 유도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내가 생각했던 결론이 그들로부터 나왔다. “첫째, 지붕을 넓게 내뽑을 것, 둘째, 바닥을 경사지게 팔 것, 이 두 가지만 준수하고 각 분대는 마음대로 집을 지어라. 원형으로 지어도 좋고, 빨갛게 지어도 좋다. 이의 없지?”


그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들이 시행하는 것이라 주인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토의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거를 수 있다. 열흘을 거르지 않으려면 단 하루도 거르면 안 된다. 하사들은 매일 무엇을 착안해야 포대장에게 예쁨을 받고 동료들에게 쭉정이가 안 될까 생각하면서 일했다. 분대원들의 도움도 받았다. 내무반에서는 분대장을 중심으로 모든 병사들이 토의를 했다. 착안사항이 날로 예리하고 다양해 졌다. 어제까지는 예사로 지나치던 것들이 오늘은 문제로 부각됐다. 관찰력이 향상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4개월을 훈련하니까 다음부터는 내가 참석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검열이나 전투력 점검이 언제 있는지 등에 대한 외부 정보를 얻어 무전기로 포대에 알렸다. 알리기만 하면 금방 시행됐다. 이처럼 시스템을 설치하고 궤도에 올리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단 시스템이 돌아가고 나니까 포대장은 여유를 가지고 보다 큰 것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병사들은 그들이 갖게 될 내무반 설계를 매우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만큼 진도가 빨랐다. 6개월 이상이 걸릴 것이라던 작업이 불과 3개월 만에 끝났다. 병사들마다 철침대가 있었다. 내무반은 웬만한 가정집보다 더 깨끗하고 넓고 시원했다. 휴양을 가라고 해도 “여기가 최고”라며 가지 않았다. 나는 외부에 나가 교환병의 친절 정도를 체크했다. 교환병과 정문 보초병의 매너는 그 부대의 대외 이미지를 좌우했다. 지적만 해주면 교육은 하사들이 알아서 철저하게 시켜 주었다.


전쟁터에서는 포성이 자장가였다. 고요와 적막은 오히려 긴장과 공포를 유발했다. 필자가 너무도 곤히 잠들었던 어느 날 밤, 나민하 소위가 매복을 나가 모두 42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 1970년 11월이었다. 나민하 소위는 그날로 특진을 했고, 영웅이 되어 고국을 방문했다. 그가 김포에 도착하자 국회의원들까지 공항에 나와 그를 영접했다. 바로 그 매복전에서 우리 포대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나를 깨우지 않고 베트공 퇴로에 1,800발의 포탄을 밤새내 날렸다. 당시에는 미군이 포탄 사용량을 통제했기 때문에 하루 밤에 50발정도 밖에 쏠 수 없었다. 하지만 간부들은 필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배짱 좋게 1,800발이라는 엄청난 포탄을 밤새 쏜 것이다. 이로 인해 베트콩 18명이 퇴로에서 죽었다. 보병이 24명을, 우리 포병이 18명을 사실한 것이다. 베트콩들도 우리 포대를 향해 박격포를 쏘았다. 포대 장교들이 훈장을 탔다. 필자는 자다가 훈장을 받게 됐다. 간부들이 깨우지 않는 것은 필자의 조치가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필자의 몸무게는 47kg, 가끔 코피를 흘렸다. 월남전에서만 40개월을 보내고 있었으니 월남사람처럼 마를 만도 했다. 그래서 간부들은 필자가 과로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챙겨주었을 것이다. 며칠 후 사단 포병사령부에서 이 1,800발을 문제 삼았지만 사령관님은 “포는 그렇게 운영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감싸주셨다 한다.

고지에서 수여받은 화랑무공훈장, 며칠 후 사단 부관장교가 인헌무공훈장으로 바꾸어 갔다


 1970년 11월13일,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참모들을 이끌고 고지로 날아와 나민하 소위와 그의 부하 병사들에는 물론 필자와 필자의 부하들에도 화랑무공훈장을 달아주었다. 그런데 그 후 두 달 정도 지나자 사단부관참모부에서 중위가 찾아와 행정착오가 발생해 화랑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인헌무공훈장으로 바꾸어야 하니 화랑무공훈장을 돌려 달라 했다. 필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 “인헌도 화랑도 다 내겐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고 다시 오지 마시오” 하고는 화랑무공훈장을 던져 버렸다. 필자는 사이공 사령부에서 전속부관을 하면서 사단 부관부 참모들이 돈을 받고 훈장을 판다는 부끄러운 말들을 많이 들어 그 중위가 그런 심부름으로 왔을 것이라고 직감했기에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필자 또한 훈장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필자가 가지고 있는 훈장은 이렇게 해서 인헌무공훈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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