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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부관은 선의의 거짓말도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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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08 조회12,1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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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29일, 장군을 따라 보잉707을 타고 사이공으로 날아갔다. 결혼 3개월만이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사이공 시내에 있었다. 사령부라고 해봐야 콘크리트 울타리벽 속에 소박한 건물 몇 개가 들어 있는 곳이었다. 본청만이 3층짜리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들은 창고 같이 생긴  1층 건물이었다. 아마도 이 건물들은 지금쯤 가난한 월맹의 점령 하에서 황폐해 있을 것 같다. 벽을 따라 철조망이 쳐있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초소들에는 어깨 위로 총을 치켜든 병사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사령부에는 3명의 장군이 있었다. 사령관은 3성, 부사령관은 2성, 참모장은 1성 장군이었다. 장군들의 숙소들은 옛날 왕가들이 살던 대규모 저택이었고, 계급 순으로 1, 2, 3공관으로 불렸다. 대령들은 한때 훌륭했던 렉스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다. 대령 이상의 일과는 대개 파티로 종결됐다. 미군, 월남군, 한국군, 각국 대사관 간부들, 한국에서 오는 VIP, 월남 정부 관리들이 만들어 내는 파티는 일주일 내내 계속됐다. 고위급들에게 월남의 밤은 파티의 밤이요 때로는 향락의 밤이었다.


국제파티는 보기엔 화려해도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고역이었다. 월남 장교들은 오랜 불란서 문화권에서 자란 탓인지 대개 유창한 영어를 사용했고, 서양식 매너가 몸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 장교들은 그렇지 못했다. 훗날 1987년, 연구소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갔을 때였다. 그 때에도 파티에서 내가 본 한국군 장군들의 매너와 사교적 센스는 일반적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동 심지어는 아프리카에서 온 장군들보다 뒤떨어져 보였다. 국방연구원에서 쫓겨나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먹고 잘 데가 없었을 때,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 미국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가 외국 장군들을 저택으로 초청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다른 나라 장군들은 알아서 텃밭에 나가 상치와 당근 같은 걸 뜯어오기도 하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굽기도 하고, 샐러드 등을 만들며, “무엇을 또 할까요?” 묻기도 했고, 설거지와 청소도 알아서들 했다. 하지만 한국군 장군들은 소파에 앉아 자기들끼리 고국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외국에 나왔으면 외국을 배우고 외국인들과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배움과 민간 외교의 길이다. 특히 한국의 외교관들은 몸만 외국에 나와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본 외교관들은 겨우 교민들과 어울려 골프와 술자리로 나날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월남으로 가보자. 흥청거리는 파티 문화권에서도 긴장과 불안감은 늘 마음속 깊이 깔려 있었다. 1969년 구정을 기해 베트공과 월맹 정규군이 합세하여 총공세를 취했다. 이를 ‘구정공세’라 불렀다. 물론 사이공도 강타를 당했다. 얼마나 혼이 났던지 일부 한국군 장군들은 그때부터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했다. 화려한 사이공 거리였지만 곳곳에서 테러가 자행됐다. 음식점 밖에 주차한 지프차 밑에 시한폭탄이 부착되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들어오는 모든 차량은 정문에서 한동안 멈춰 차 밑에 시한폭탄이 부착돼 있지나 않은지 검사를 받아야 했다. 헌병이 커다란 거울을 막대기에 달아 가지고 차량 밑을 여기저기 비춰보는 것이 검사였다.


한국에서는 전속부관에게 퇴근이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월남에서는 24시간 장군과 함께 행동했다. 장군의 침실은 2층에 있었고, 전속부관의 침실은 아래층 파티 홀 귀퉁이에 마련된 조그만 대기실이었다. 거기에서 전화도 받고, 장군이 소리를 지르면 “예” 하고 달려가야 했다. 통상 잠은 12시를 넘어야 잘 수 있었고, 후덥지근해서 늘 에어컨을 켜고 잤다. 문이 없어 앞과 뒤가  뚫린 대기실에서! 장군들 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내가 모시고 있던 참모장이었다. 그는 건강한 분이었지만 업무량이 과한데다 웬만하면 눕지 않는 성격이라 피곤을 참고 견디다가 신경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고국에서 찾아오는 귀빈들이 많아, 하루에 세 번씩이나 40분 거리에 있는 탄소누트 공항을 왕복해야 했고, 손님을 서운치 않게 하기 위해 공개 파티에서부터 은밀한 접대 파티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써야 했고, 선물을 마련하는 데에도 세밀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국에서 갑자기 귀한 손님이 급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방문한다는 연락이 왔다. 사령관이 밤 2시에 갑자기 참모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참모장은 자고 있는 대령 참모들을 갑자기 소집해야 했다. 대령 참모들의 차는 수송부에 있기 때문에 부르려면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걸렸다. “지대위. 운전병을 대령 숙소로 보내 5명의 참모를 빨리 데려와.”


급하기는 한데 어이없게도 운전병이 없어졌다. 밤중에 바깥 구경을 나간 모양이었다. 실로 난감했다. “죄송합니다. 운전병이 없습니다.”하고 곧이곧대로 보고했다간 불벼락이 날판이었다. 나는 당번병에게 5명의 참모 명단을 건네주면서 빨리 전화를 걸어 회의소집을 통보해 놓으라고 지시한 후에 차고로 갔다. 미제 8기통 시보레이 세단,  기어를 작동하여 전진과 후진 요령을 터득한 후 인적 없는 사이공 거리로 나서 호텔로 갔다.  영감님 같은 대령들이 눈을 비비며 차에 올랐다. 공관에 다 와서야 정신들이 드는 모양이었다. “어! 이거 지대위 아냐? 야, 지대위. 자네 운전까지 하는군. 어? 허허허.” 소위 시절에는 야외 훈련이 참으로 많았다. 무료한 낮 시간에 나는 포차 운전병을 꼬여서 트럭을 가지고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양평 시내를 거쳐 꼬불꼬불한 도로를 타고 용문산에까지 차를 몰았다. 좁은 다리를 건널 때가 가장 아슬아슬했다. 운전을 하는 동안에는 운전병과 모자를 바꿔 썼다. 멀리서 헌병 차가 마주보며 달려왔다. 소위 계급장이 붙어있는 내 모자를 쓰고 선임탑승자 자리에 앉아 장교 행세를 해야 하는 운전병, 여간 불안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야, 임마. 의젓하게 경례를 받아야 해. 이상하게 보이면 걸리는 수가 있어.” 막상 헌병으로부터 인사를 받으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 후 월남에서의 중위시절에 나는 미군부대와 월남군 부대의 연락장교로 있으면서 지프차를 직접 몰고 다녔다. 출발할 때, 정지할 때, 기어변속 할 때에, 컵에 담은 물이 흔들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운전하는 연습도 했다. 이렇게 배운 운전 실력 덕분에 그날 밤 밖으로 샜던 장군의 운전병과 내가 불호령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장군들이 모이면 2층 장군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군들이 유쾌한 시간을 보낼 동안, 전속부관들은 나의 조그만 부속실에서 참새 모임을 가졌다. 자기 장군에 대한 흉을 보기도 했고, 좋은 점을 드러내 칭찬하기도 했고, 또 새로운 뉴스 같은 걸 가지고 조잘대며 시간을 보냈다. 전속부관들이 차고 다니던 권총은 서부활극에서 보는 큼지막한 6연발 리볼버였다. 하지만 장군들의 권총은 각양각색의 예술적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아주 작은 사치품이었다. 보석으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것들도 있었다. 장군들이 위층으로 올라갈 때, 맡긴 이런 권총들은 한동안 전속부관들의 장난감이 됐다. 돌아가면서 권총을 구경했다. 6개의 약실에는 오발을 예방하기 위해 한 실을 비워 두었다. 실수로 방아쇠를 당기더라도 약실에 총알이 없으면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약실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다. 내가 그날 처음 만져본 권총은 너무나 작았다. 방아쇠를 한번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나는 대기실 천장 코너에 대고 격발을 해보았다.

“땅!!” 이게 웬 일일까? 놀랍게도 총알이 발사된 것이다.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전속부관이 총알을 잘못 장전한 것이다. 콘크리트 건물이라 2파 3파의 에코 현상까지 가담해 소리가 증폭됐다. 나는 순간 천장에 대고 격발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2층에 있던 장군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반질반질한 고급나무로 설치돼 있는 가이던스를 잡고 제비들처럼 나란히 고개를 내밀었다. “야, 뭐야” 하고 다그쳤다. 눈앞이 캄캄했다. 오발이었다고 하면 총알을 잘못 장전한 다른 전속부관이 더 혼날 참이었다. “예, 아무 것도 아닙니다.” 2층을 향해 일단 이렇게 소리부터 질러놓고 장군이 보이는 쪽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짧은 순간에 머리를 굴렸다. “벽에 세워 두었던 탁구대가 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야, 놀랬다 야.” 이 실수를 통해 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고, 이는 몇 달 후부터 시작된 포대장 근무 때 아주 요긴하게 적용됐다.

“격발을 할 때엔 총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향해 경건하게 하라!” 포대장 시절, 나는 병사들에게 이를 하루에도 열 번씩 훈련시켜 쑥스럽지 않도록 습관화시켜 주었다.

    전속부관시절, 맨 좌측이 필자


장군은 강아지를 좋아하셨다. 누군가가 ‘치와와’ 한 쌍을 선사했다. 그렇게 작은 강아지는 처음 보았다. 꼭 그림자가 다니는 것만 같았다. 장군은 암컷의 이름을 ‘미미’로 불렀고, 수컷은 ‘끼끼’로 불렀다.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당번병은 미미와 끼끼를 안고 장군 방에 들어갔다. 강아지와 노는 것이 낙인 듯 했다. 이렇게 아끼는 강아지에게 뜻하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령부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공관에서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얼마 전, 공관에는 중사 계급장을 단 장군의 처남이 와 있었다. 그 중사가 지프차를 후진하다가 하필이면 재롱이 철철 넘치는 ‘미미’를 치어 숨지게 했다. 아무리 처남이지만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친척 티를 제법 내는 녀석이었지만 원체 큰일을 저질러 놓았기 때문에 풀이 죽어 있었다. “부관님, 죄송합니다. 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 나는 공관 인력을 모두 동원해서 온 장안을 뒤져서라도 ‘미미’와 비슷하게 생긴 놈을 구해놓으라고 했다. 시장에 나가 한 놈을 구해오긴 했지만 뚱뚱하고 애교도 없었다. 병사들이 하루 종일 “미미야, 미미, 미미, 이리와” 하고 훈련시켰지만 낯선 개는 딴전만 부렸다. 그 다음날 다시 시장에 나가 ‘미미’처럼 날씬한 놈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당번병이 ‘끼끼’만 데리고 장군 방으로 올라갔다. “야, 미미는 어디 갔냐?” 기껏 일러두었건만 순진한 당번병의 얼굴이 빨개지고, 머뭇거렸다. 당번병이 못미더워 내가 따라 들어간 게 참 다행이었다. “그녀석이 갑자기 설사를 해서 강아지 병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5일간 매일 장군은 ‘미미’의 안부를 물었지만 중사는 더 이상 날씬한 암컷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드디어 그 새로운 강아지는 ‘미미’라는 이름에 꼬리를 흔들고 덤비기 시작했다. 그 제서야 당번병이 두 마리의 강아지를 올려갔다. 얼른 보아도 ‘미미’ 대치품은 뚱뚱하고 재롱이 시원치 않았다. 장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개, 잘못 찾아온 게 아니냐?” 당번병의 얼굴이 또 새빨개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미’라는 이름에 꼬리를 치고 덤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석이 병원에 좀 있더니 살이 찌고 좀 둔해진 것 같습니다.” 순간은 모면했지만 참 기막힌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국의 어머니 상이 떠올랐다. 무서운 가장을 모시고 사는 어머니들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안에 큰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리 묻고 저리 묻는 어머니 상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니었나 하면서 그 거짓말로 인한 죄책감을 스스로 자위했다. 대통령들에 ‘가신’이 문제되는 시절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친척 중사’가 떠오른다. 처음엔 30여 명의 공관 요원들이 모두 타인들로만 구성됐었다. 그 때에는 모두가 장군을 일사불란하게 모셨다. 하지만 그 친척 중사가 공관에 들어오면서부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졌다. 중사는 친척 티를 냈고, 그로 인해 공관 식솔들은 두 파로 갈라졌다. 그 녀석에게 잘 보이려는 파와 “눈꼴이 시다”는 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나는 장군을 수행해 다니느라 전화로만 원격통제를 했지만 밤늦게 공관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냉랭했다. 그때까지 장군을 ‘나의 장군’이라고 생각했던 병사들이 “그래, 네 놈만의 장군이다”하는 식으로 마음이 떠났다. 장군에 대한 충성심도 떠났고, 공관 살림도 “내 살림이냐, 네 살림이냐”는 식으로 주인 없는 살림이 돼 버렸다. 이렇게 되자 재미있던 월남 생활이 귀국 날짜만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고 웃어주지만 속으론 무엇이든 잘 안돼서 일이 터지기를 은근히 바랬다. 이 사례는 국가에도 적용된다. 대통령의 가신들과 친척들이 설치면 설칠수록 장관들과 고위 공직자들은 대통령으로부터 마음이 떠난다. 그리고 국가는 ‘장군의 공관’처럼 빈집이 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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