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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13 조회11,55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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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기간 1년 중에서 나는 10개월 동안 그야말로 강도 높은 고생을 했다. 다른 포병 소위들이 한 개의 중대를 지원할 때, 나는 2개 중대, 그것도 전투 강도와 빈도가 가장 높은 수색중대와 기동타격중대를 동시에 지원했다. 수색중대가 작전에 나가면 수색중대에 투입됐고, 3중대가 작전에 나가면 3중대에 투입됐다. 이는 좀 과한 조치였다. 그게 안쓰러웠던지 새로 부임한 포병 대대장은 나를 즉시 뽑아내 사단 사령부 월남어 교육대로 보냈다. 월남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귀국을 연장시키기 위한 하나의 보상수단이었다. 월남어 교육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우리말처럼 높낮이가 없는 그런 말이 아니라 노래하듯 말해야 의사가 통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음치는 배우기가 참 어려웠다. 월남 말 중에는 중국말도 꽤 많이 들어있다. 대통령을 한문으로 ‘총통’(總統)이라고 써놓고 ‘똥~통~’이라고 곡선을 넣어 발음했다. 한문으로 ‘위험’(危險)이라 써놓고 ‘윙이~힘~’이라고 발음했다. 우리말처럼 편편하게 발음하면 알아듣지 못한다. 작곡된 음을 내야 소통이 됐다. 내가 어학을 배우는 요령은 좀 특이했다. 대개의 학생들은 책 내용을 무작정 외웠지만 나는 내용에 상응하는 현실 장면을 상상해가면서 외웠다. 책 내용을 외우면서 장면들을 연상하기 때문에 다이얼로그(대화) 한 줄 한 줄에 마다 영화 장면이 생기는 셈이었다. 책이 없어도 장면들을 연상해가면서 다이얼로그를 복습할 수 있기 때문에 걸으면서도 대본 없이 외울 수 있었고, 눈을 감고 누워서도 외울 수 있었다. 동료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 영화라고 해봐야 옛날 활동사진 시대처럼 운동장 한가운데 영사기와 야전용 스크린을 차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보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다이얼로그(dialogue)를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니까 실제생활에서 비슷한 상황에 접할 때마다 저절로 외국어가 튀어나왔다.
이는 영어를 배울 때에도 적용했다. 영어 책 내용만 달달 외운 사람들은 미국에 가서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적절한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고생을 한다. 책의 내용과 가상 장면과를 연결시키는 방법은 특히 수학을 공부할 때에도 적용됐다. 나는 모든 수학 공식 및 이론을 배울 때마다 현실 세계를 가상했다. 수학을 현실과 매치시키는 것이다. 현실 세계를 연상하지 않고 익히는 공식과 이론은 아무런 응용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많다. 많은 이들은 수학을 딱딱한 공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수학 세계를 현실세계로 통역하는 능력을 길렀다.
이런 연상법 때문에 나는 사관학교 때, 영어와 수학은 늘 1~2등을 차지했다. 훗날 응용수학 계열의 박사과정에서 세상에 없는 새로운 수학공식 2개를 만들어 냈고, 석사 이상의 학도들이라야 사용할 수 있는 수학정리(theorem)를 6개나 만들어 냈고, 복잡한 군수문제를 푸는 알고리즘도 만들어 냈다. 알고리즘이란 논리적 명령대로만 따라하면 고등학교 출신도 실무에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명령서 묶음을 의미한다. 내가 만든 알고리즘은 “제한된 예산 범위 내에서 장비의 가동도(availability)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1번 부품 몇 개, 2번 부품 몇 개, … 17번 부품 몇 개를 구매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푸는 ‘요령’이었다. 이는 미 해군이 그동안 풀지 못했던 골칫거리를 일거에 해결해 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미군 소령 한 사람이 후에 석사 논문을 썼다. 논문주제는 내가 만든 공식과 알고리즘을 이용해서 도출해낸 수리부속 구매 세트와 기존에 미 해군에서 편법으로 사용해온 모델(당시 400만 달러 프로젝트)을 이용하여 구매한 수리부속 세트를 비교하여 기존의 모델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를 가르친 교수들도 내가 이 공식을 만들어 낸 과정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결과에만 승복했다. 이 분야의 수학인들은 내가 만든 수학 작품에 내 이니셜인 Jee를 붙여 인용하고 있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인스턴트식 학습은 손끝 기술에 불과할 뿐, 생각하는 방법을 길러주지 못한다. 내가 연상법을 터득하게 된 것은 어릴 때의 고학 덕분이었다. 하나의 진리를 터득하려면 엄청난 궁리를 해야 했다. 이해하지 못할수록 궁리가 많았다. 나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려가며 궁리의 폭을 넓혔다. 그래서 내가 다닌 미국 학교에서 나는 응용력의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것도 37~39세의 만학에! 내 이름은 지금도 그 학교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월남으로 가보자. 3개월 과정을 마친 후 나는 1등을 했다. 동료 장교들은 내가 영화도 보러 다니고, 맥주도 마시러 다니고, 공부벌레처럼 굴지도 않았는데 1등을 했다며, 머리가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길을 가면서, 식사를 하면서 속으로 영화장면들을 생각하면서 대사를 외웠다. 연상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오히려 머리는 다른 사람들 이 나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월남어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나는 중위로 진급을 했다. 대대장께서 정찰기에 대위를 태워 보내 내게 중위 계급장을 달아주게 했다. 이를 보고 다른 장교들이 부러워했다. 졸업 후 나는 월남어를 전혀 쓰지 않는 사격지휘 장교로 보직되어 작전 상황실에 투입됐다. 다른 부대에서는 대위 두 사람이 교대하면서 근무하는 자리를 나는 혼자서 지켰다. 대대장님은 나의 요약보고를 매우 좋아하셨다. 다른 장교들이 보고를 하면 자주 역정을 내셨다.
상황실에는 매일 수많은 첩보가 접수됐다. 첩보의 신뢰성에 따라 A급부터 D급까지 분류돼 있었다. 이들 첩보들은 접수되는 순서대로 두꺼운 첩보일지에 기록됐다. 한 달이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200쪽이 넘는 책이 됐다. 하루에도 7~8쪽이나 되는 첩보내용을 장교들이 일일이 읽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상황실 선임하사가 중요하다고 표시해주는 첩보만 대강 훑어봤다. “응, 그렇구먼. 이 지역이 늘 말썽이군.” 일단 날짜가 지나면 모든 내용들이 두꺼운 첩보철 속에 묻히고 만다. 하루 이전의 첩보 내용, 열흘 이전의 첩보 내용을 다시 들춰내 읽는 사람은 없다. 자료는 많지만 모두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보석의 원석이 땅 속에 방치돼 있듯이!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첩보일지 속에는 모든 첩보가 다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많은 첩보를 즉시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중사에게 똑같은 지도판을 3개 만들라고 했다. 중사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급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중위님, 상황판을 3개씩이나 만들어 무얼 하시게요?” “나도 몰라. 일단 한번 만들어 봐.” “합, 옛~써~ 즉각 대령하겠습니다.” 중사는 다섯 손가락을 꼬부려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갔다. “김중사. 하나는 초저녁용, 또 하나는 밤중용,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새벽용이야. 상부로부터 첩보 내용을 받아 적을 때마다 상황판을 골라 표정을 하라구. A급은 적색, B급은 청색, C 및 D급은 노랑색으로. 알았어?” “아! 존경하는 중위님, 이제야 감이 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첩보를 받아 적는 노력이 10이라면 지도판 위에 점 하나를 표시하는 노력은 1도 안됐다. 하나하나의 점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날에 걸쳐 표시된 수많은 점들은 일련의 분포와 추세를 나타냈다. 시간대별로 베트콩이 어떻게 이동해 다니는지에 대해 훤히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통계의 묘미였다. 매일 밤 나는 이 상황도에 따라 사격을 가했다. 구태여 내가 사격을 가해야 할 좌표를 찍어줄 필요가 없었다. 누구라도 상황판만 보면 언제 어디에 사격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이 들더라도 병사들은 정해진 시스템에 의해 포를 날렸다. 얼마 후, 체포된 베트콩의 진술이 나왔다. “한국 포병에는 눈이 달렸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병사들이 점점 더 많이 메워 줬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위 두 사람이 해야 할 업무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 나는 밤새 있었던 상황들을 손바닥만 한 쪽지에 요약하여 대대장 숙소로 직접 가져다 드렸다. 구두로 보고를 하지 않아도 그 쪽지만 읽고도 만족해 하셨다. 무섭기로 소문난 대대장이었지만 내가 가면 언제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응, 응, 알았어. 그래그래, 수고했어. 어서 가봐. 아니 우유 한잔 줄까?”
어느 날 미군 중령이 나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를 찾아왔다. 나의 직속상관은 소령이었다. 내가 통역을 맡았다. 미군 중령은 포병 대대장이었고, 예하 포대들이 월맹 접경지역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포들을 헬기로 공수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헬리콥터로 포를 수송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험용으로 1개포만 잠시 빌려 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시범에는 미군 장성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라며 시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나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는 이를 쾌히 승낙했고 대대장님도 이를 허락했다. 다음날, 나는 1개 분대를 포차에 태우고, 차 뒤에는 포를 매단 채 미군부대로 나갔다. 하지만 그 미군 중령은 없고 대신 뚱뚱하게 생긴 미군 소령이 나와 있었다. 그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트럭에 타고 있는 우리 병사들을 거만한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모두들 차에서 내려와 일렬로 서라고 했다. 예상 외의 행동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하지만 나는 정중한 표현을 써서 물었다. “혹시 무엇 때문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검열을 해야겠다” “나는 미군 중령 아무개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사람이다. 당신한테 검열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고문관을 지냈다. 한국군 장군들도 내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검열을 하려거든 한국에 가서 그런 장군들에게나 해라” 소령이 무의식중에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나는 선 자리에서 미군 소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 이 건방진 놈, 손 한번 봐주자. 이놈 발밑에다 일제히 조준 사격을 가하라. 얼른 쏴버려” 따따따따닥 . . ! 수많은 총알이 그의 발 밑, 모래 바닥에 꽂혔다. 그는 체신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혼비백산 도망을 쳤다. 지프차도 내팽개쳤다. 병사들이 그의 발밑을 따라가며 조준 사격을 가했다. 그는 아마 십 년 이상 감수했을 것이다. 병사들이 웃어대며 그를 야유했다. 그에겐 일생일대의 모욕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빨리 돌아온 내게 작전참모가 사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내가 경솔하게 큰일을 저질렀다며 질책을 가했다. 나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직속상관은 감히 어디라고 미군을 그렇게 건드렸느냐며 겁을 냈다. “과장님, 미군에 대해서는 배알도 없이 대해야 하나요?” “어~어~ 이 친구, 뭘 한참 모르는구먼!” 작전참모는 내게 그가 한국에서 겪어 본 미 고문관의 위력에 대한 사례들을 설명해 주면서 내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했다. 대대장의 예쁨을 받고, 또 대대장님을 위한 통역이라면 도맡아 하는 내게 작전과장이라고 해서 그 이상의 야단을 칠 수도 없었다. 이튿날이었다. 미군 중령이 다시 찾아와 중위에 불과한 내게 정중히 사과했다. “나도 그 소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곧 다른 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는 어제 제 계획을 망쳐놓았습니다. 하사관 한 명을 파견할 터이니 우리가 요청할 때, 포를 좀 지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미군 하사관과 함께 근무하면서 약간의 회화능력을 더 기를 수 있었다. 이렇게 8개월을 지하 벙커 속에서 보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벙커생활은 힘든 것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햇빛이 유난히도 밝던 어느 날,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졸도했다. 들것에 실려 나가 생전 처음 알부민이라는 주사를 맞았다. “안되겠다. 내가 좀 편하자고 저놈 하나 부려먹다가 사람 잡겠다. 당장 미군부대로 보내.” 그래서 나는 졸지에 미군부대 연락장교가 됐다. 그때의 몸무게는 47kg. 26세의 청년 사관에겐 어울리지 않는 몸매였다.
미군부대는 동지나해의 아름다운 모래 위에 있었다. 부대 위치 자체로 휴양지였다. 깊은 바다 속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맑은 바닷물, 희고 고운 모래밭, 한가로이 흔들리는 야자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물 색깔, 파도만이 주인인 적막함, 이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감추어진 아름다움이었다. 낮에는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냈고, 밤에는 맥주, 밴드, 춤이 자아내는 미 병영 문화권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휴양생활을 보냈다. 대대장님이 귀국하시고 신임 대대장님이 부임하셨다. 신임 대대장님이 맨 먼저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자매 마을에 가서 신고를 하는 일이었다. 대대장 당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임 대대장님이 자매 마을에 가서 잔치를 베풀고 연설을 할 때 통역을 하라는 것이었다. 월남어 교육대에서 1등을 했으니 얼마나 잘하겠느냐는 게 참모들의 중론이었다 했다. 하지만 월남 말을 배우긴 했지만 8개월이나 쓰지 않아 통 자신이 없었다. 설사 졸업 직후였다 해도 공식 연설을 즉석 통역한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극복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캔 맥주 한 개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내가 대대장이 되는 길이었다. 다음날, 대대장님이 무슨 연설을 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대대장이 되어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뛰어와 연필을 잡고 내가 대대장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사전을 찾아가면서 월남 말로 옮겼다. 드문드문 웃기는 말도 집어넣었다. 그래야 통역이 잘됐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날, 신임 대대장님이 수많은 주민들을 놓고 마이크로 연설을 했다. 연설을 하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기록하는 척 했다. 대대장님이 한동안 연설을 하시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통역할 차례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써간 원고를 조금씩 읽었다. 노인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웃기는 말을 할 때는 와~ 하고 웃었다. 박수도 쳤다. 대대장님이 싱글벙글 하셨다.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는 것을 보니 대대장인 자기도 연설을 잘했고, 통역도 잘됐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가져온 떡을 먹고 맥주와 콜라를 마시는 동안 대대장님과 노인들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런 대화 정도는 통역할 수 있었다.
내가 고지식하게 했더라면 대대장님도 나도 모두 난처했을 것이다. 연설을 끝낸 대대장님은 여러 참모들 앞에서 나를 극찬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나를 뚜이호아 시내에 있는 월남군 연대의 연락장교로 보냈다. 월남군 연대장은 중령이었는데 성장(도지사)을 겸임했다. 주월한국군은 미군과의 유대보다 월남 성장과의 유대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내가 미군부대를 떠나 월남성장 옆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남의 군수 자리는 통상 대위~소령들이 겸직했다. 일반적으로 월남군 장교들은 미군에 대해서는 당당하고 추상같은 태도를 취했지만 한국군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자상한 형제처럼 대해줬다. 한국군이 그들의 처지와 사정을 잘 이해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월남 사람들의 생리구조였다. 그들을 지켜주고 있는 미군에 대해 왜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도시 알 수가 없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 장면들이 떠오른다. 부자의 미남 클라크케이블은 ‘아름답지만 버릇없는’ 비비안리를 인내하며 잘 대해주었지만, 그녀는 잘해주면 줄수록 콧대를 더 높이 세웠다. 그리고 싸늘하게 버림을 받았다. 떠나는 클라크케이블을 향해 그녀는 가지 말라 울부짖었지만 그 때는 이미 마음을 접은 뒤였다.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월남 민족, 잘해 주면 해 줄수록 콧대만 세우는 이상한 민족,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려는 월남 민족, 드디어 미국은 마음을 접었다. 미군이 떠나자 그 버릇없던 월남인들은 1975년 4월 30일에 패망을 맞이했다.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도망가다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재교육 캠프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운 좋은 사람들은 미국 등으로 건너가 미국의 품에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미국을 그토록 싫어했던 사람들이! 정동영과 강정구 등은 미국을 증오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동영은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후 자기도 미국으로 가서 장기간 체류 했으며, 강정구의 아들들도 미국에서 산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의 덕을 크게 보는 사람들이 어째서 미국을 증오하는지 그 2중적 정신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온갖 부를 누리며 살고 있는 친북 좌익들, 그들 역시 적화통일이 되면 미국으로 도망들을 갈 것이다. 월남으로부터 망명하여 프랑스에서 명상의 마을 플럼빌리지를 설립-운영하고 있는 틱낫한이라는 중도 월남에서 평화를 외치며 극렬시위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월남이 패망했고, 수많은 월남 국민이 죽었다. 그렇게 해놓고 그는 프랑스로 도망가서 고승인체 하면서 잘 살고 있다. 나는 지금 틱낫한처럼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사람들 역시 같은 상황을 맞이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외국으로 도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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